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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5.05.17. 금요기도회 - 선지자 요엘로 말미암아 말씀하신 것이니(사도행전 13)


행0204to21 -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사도행전1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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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2장 14-21절


제가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로 부터 종종 받게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자신은 은혜를 받고 너무 기뻐하면서 신앙생활하고 또 자신이 은혜받은 일을 나누면, 성도들 중에서는 마치 너만 예수믿는 것처럼 설치느냐는 듯한 태도로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이전에는 몰랐던 큰 은혜를 받게 되면, 최소한 그 당시에는 사실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때로는 스스로도 적응이 잘 되지 않을 정도로 달라지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변화는 우리 안에 하늘나라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시작되는 변화이기 때문에 그 이전과는 굉장히 많이 이질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는 것이 그런 것 같습니다. 그저 좋기만 한 것이 아니라, 너무 좋은 것이기 때문에, 제대로 좋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세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과의 차이가 생겨나게 되어 있고, 그 차이 때문에 때로는 오해나 무시같은 짐도 져야 하는 것이죠.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받아야 하고 또 누려야 합니다. 그 은혜가 우리를 우리되게 하며, 참된 만족과 기쁨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처음 성도들이 성령충만을 받았을 때, 그들은 각 지역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또 그 이야기를 들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놀라워 했습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놀라운 일을 지켜보고 있으면서도 그 성도들을 향해 “저 갈릴리 촌놈들이 아침부터 싸구려 술에 취해서 주정을 하고 있구만.” 하면서 그들을 조롱하고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처음 성도들 뿐만아니라 시대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성도들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함께 예수를 믿는 식구들조차도 우리에게 이런 반응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흐지부지 예수 믿을 때는 가만히 지켜보다가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태도가 바뀌고 삶이 달라지면, “예수를 믿어도 곱게 믿어라.” “하나님도 고상하게 믿어라.”라고 말하며 자신은 굉장히 수준높은 신앙생활을 하는 듯이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그저 몰이해에서 오는 갈등이라고 볼 수 있지만 영적인 구도에서 보면 분명히 사탄이 우리를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공격해 오는 것이분명합니다. 물론 이런 일을 경험하는 것이 과히 유쾌한 일도 아니고 또 쉬운 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런 일들을 당할 때, 이것을 고통과 시련이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영적인 도전’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기가 죽고 의기소침해 지는 대신에 그렇다면 이 도전을 어떻게 이겨낼까? 어떻게 하면 이 도전을 오히려 선하게 활용할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런 일들을 우리 삶에 허락하시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일부 사람들의 조롱과 모함 때문에 한창 고조되었던 영적인 분위기는 물을 끼얹은 듯이 사그라들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교회에게는 큰 위기였습니다. 성령충만함이 오히려 그들을 술주정뱅이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론이라는 것이 무섭습니다. 그저 그렇게 믿으면 거기서 끝납니다. 아무리 설명하고 해명해도 안 믿으려고 하면 어쩔 수가 없어집니다. 당시 교회는 그럴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호도하는 여론의 희생물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다른 열 한 명의 제자들과 함께 일어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는 사람들의 오해를 풀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상기시킨 것이 바로 그 때가 3시 그러니까 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오전 9시라는 시간은 120명이 넘는 사람들이 단체로 술판을 벌여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지껄일 정도로 취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닙니다. 이것은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아주 논리정연한 설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그런 역할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모함과 비난을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만드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것은 다시 군중들로 하여금 각자가 자신의 말로 들었던 ‘하나님의 큰 일’에 집중하도록 하는 효과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래, 오전 아홉시구나. 아홉시부터 이 많은 사람이 집단으로 술에 취할 수는 없지. 그것도 술에 취해 있다면 저들이 저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겠지. 그렇다면 저건 무엇일까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하면서 오히려 조용히 베드로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이 주시는 능력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원래의 베드로의 모습을 잘 압니다. 그는 정말 다혈질이고 즉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옛날의 베드로라면 “뭐야!”라고 하면서 윗통이라도 벗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번에 베드로는 원래의 베드로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당당하고 차분하게, 아주 이성적으로 도대체 그 베드로가 이 베드로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모습이 되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충만하게 되면 우리의 기질이나 성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통제를 받게 됩니다. 그러한 성령님의 다스림 덕분에 우리는 굉장히 바람직한 사람이 됩니다. 베드로를 보면 그것이 나타납니다. 그는 평소처럼 용기는 내었지만, 그렇다고 혈기를 내지는 않았습니다. 거칠게 반응하지도 않았습니다. 마음을 다 담아서 움직였지만 그렇다고 감정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이 우리 속에서 만들어 내는 가장 중요한 변화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성품이나 기질에 있어서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게 되시는 것이니 그렇게 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바로 여기에 우리 모두가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정말 아름답고 균형잡힌 성품을 지닌 사람이 되고,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 그리고 우리 밖의 세상에 대해서 온전한 반응과 태도를 보이면서 살아가려면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오셔서 우리를 다스려 주시고 변화시켜 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타고난 기질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질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또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그 기질을 주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니까요. 사실 우리 모두의 기질은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성품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양성을 모두 합할 때, 하나님의 성품의 풍성함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죠. 저는 교회의 소명과 복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다양한 모습을 조화시켜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보여주고 또 우리 안에서 누리는 것 말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기질이나 성품들이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생각할 때,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 한 가지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질이나 성품은 원래 하나님께서 주셨던 그대로의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의 의미는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제 모습 모두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고, 그래서 자연상태 그대로는 가장 바람직한 반응과 행동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그런 죄인들 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런 죄인들이 어울려 살아가면서 만들어 내는 죄와 그 죄의 결과들이 그나마 온전하지 못한 우리의 성품에 또 다른 흠집을 내고, 그래서 우리의 성품과 기질은 더 많이 일그러진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지니고 있는 성품이나 기질대로만 살아서는 안됩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에서 조차도 상처와 실망, 그리고 그로 인한 문제들이 끊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자신들이 누려야할 행복도 망가뜨리고 말입니다. 우리의 성품과 기질은 자연상태로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변화되고 치료되어야 하며, 우리 감정이나 욕구의 지배가 아니라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 속에 성령님을 주시는 것이고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성령충만을 덧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 안에서 더 아름답고 더 가치있고 더 균형잡힌 성품과 기질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선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기질과 성품 중에는 변화되고 치료되어야 할 부분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그것이 무엇인지 하나 하나 헤아려야 하며, 그것을 구체적으로 내놓고 기도하며 또 하나님의 말씀에 그것들을 복종시켜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요즘 성령충만함을 위해서 계속해서 기도드리고 있는데요, 그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와 전혀 함께하고 계시지 않기 때문에 드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가요? 우리 속에 거하고 계신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면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그 성령님으로 충만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성령님이 우리 삶과 신앙, 그리고 우리 성품과 기질의 부분 부분까지 다스리실 정도로 성령님으로 가득 채워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은 너무 부분적으로만 영향을 미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이런 우리들의 전체를 다스려 주시도록 성령충만함을 위해서 기도드려야 합니다. 내 삶의 능력 뿐만 아니라 내 기질과 성품을 변화시키시는 능력이 되어주시도록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려면 기도만으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인격이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인격이시라는 말 속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는 성령님은 결코 억지로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꺼이 우리 인격과 기질의 작은 부분까지 성령님께 내어드리고 순종하려고 할 때, 그런 의지를 가지고 그런 방향으로 갈 때, 그 때 우리는 비로소 성령충만해 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령님의 충만하심은 우리의 성품과 기질을 가장 아름답게 변화되어질 수 있습니다. 나에게도 상처가 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런 모습으로 다시 빚어져 갈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성령님과 다투어서는 안됩니다. 성령님께서는 이리로 가자고 하시는데 나는 저리로 가려고 실랑이를 벌여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 성품과 기질의 영광스러운 변화는 그만큼 더딜 수 밖에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성령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 지혜 덕분에 반대자들의 모함을 오히려 군중들의 귀를 끌어당기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지혜가 없어서 고민이신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성령충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필요한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생각지도 못할만한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혜는 우리가 성령님께 의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삶과 소명에 충실하려고 힘쓸 때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기가 막히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반대자의 비방을 활용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으니까요. 그렇다면 지금 그 지혜는 어디에 사용되고 있습니까? 바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의 효과적인 증인노릇을 하는 일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지혜는 물론 때로는 우리 자신을 건져주는 역할도 하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들을 온전하고 효율적으로 해 내기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우리가 거듭나고 성령충만을 덧입기 전에는 무엇이든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성령충만하게 되면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할 줄 알게 됩니다. 천천히라도 그리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들어와 계시니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도 그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이전에는 무엇이든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했습니다. 그의 주어는 항상 “나”였고 그래서 자신이 흔들릴 때는 대책없이 무너지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충만한 후 베드로는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자기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중심이었고, 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소명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가 그 자리에서 감정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그 답지 않은 차분함과 논리, 그리고 탁월한 지혜를 가지고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이미 그런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것입니다. 성령님은 내가 아니라 나를 통한 하나님의 목적에 집중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며 전혀 다른 지혜를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또 개인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갈등과 반대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성품과 기질의 모나고 상처입은 부분들은 여지없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프게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질 탓으로 성질 탓으로만 내버려 두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여전히 이런 문제들이 있고 또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만큼 더 충만한 성령님의 함께 하심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아직도 그 분 안에서 더 회복되고 아름다워져야 할 부분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살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지혜로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하게 되고, 성령님의 소욕에 기꺼이 복종하려고 할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더 아름답고 아름다운 인격을 지닌 사람들로 바꾸어 가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이 되는데 필요한 지혜도 공급해 주십니다. 항상 성령님을 의지하시고 또 성령충만함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변화와 축복을 기대하며 성령님께 삶의 구석 구석, 성품과 기질의 구석 구석까지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고치시고 바꾸시며 새롭게 해 주실 것입니다. 


성령님의 새롭게 하시고 영광스럽게 바꾸시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