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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5.10.02. 금요기도회 - 생명이 그에게 있느니라(사도행전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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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20장 01-12절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가지기 쉬운 가장 큰 약점은 그 사람이 자기 생각과 하나님의 뜻을 혼동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자기가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틀’이 믿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을 모두가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까지 성도로 살고 또 목사로 일하면서 교회 안에서 이런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 모릅니다. 제가 목사 이기 때문에 저 자신도 이런 함정에 쉽게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목사들 중에서 이런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자신은 이미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했고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 일합니다. 그 일하는 곳도 교회이구요. 그러다 보니 그 안에서 무언가를 판단하고 결정하거나 혹은 계획을 세우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목사들은, 그게 무슨 의미이든 간에, 교회가 잘 되게 하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서 고민하고 그것을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방법을 선택하곤 하는데요. 이럴 때, 내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니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라고 믿어 버리게 되기가 굉장히 쉽습니다. 그러나, 바른 목적을 가지는 것과 그 목적을 이루는 바른 수단을 선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바른 목적을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 목적을 이루는 바른 수단을 선택하는 일이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바른 계획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 바른 계획이 언제나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계획을 고집하느라고 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일과 목적이 틀어지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 보았듯이 사도행전 19장 23절 이하에 나오는 사건은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갸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계획을 세워놓고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먼저 마게도냐로 보내놓고 나서 에베소를 떠나기 전 그 사이에 일어났던 사건이었습니다. 


우선 바울은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일으킨 소요 때문에 에베소에 좀 더 머물려고 했던 그의 계획을 바꾸어서 조금 일찍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거기서 마게도냐 전 지역을 순회하면서 제자들을 격려하고 권면한 후에 헬라, 그러니까 그리스 지역으로 갔고, 거기서 석 달 동안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배를 타고 수리아로 갔다가 계획대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수리아로 가는 배를 타려다가 그는 예루살렘에서 자신과 관련해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은 자신의 원래 계획을 완전히 포기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려던 발길을 돌려 다시 마게도냐를 거쳐서 아시아로 되돌아 가기로 한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우리 삶에서 흔히 벌이질 수 있는 일입니다. 내가 원하던 일이 있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한 계획을 세워 놓았는데, 그 일이 실현가능성이 낮거나 많이 위험한 일일 때, 혹은 더 좋은 것이 있을 때, 우리는 그 이전의 계획을 얼마든지 수정하거나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사도 바울은 개인적인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여행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따라 여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그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을 이루기 위해서 여행하고 있습니다. 그가 여행계획을 대폭수정하고 포기한 일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이루기 위해서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우고 움직여 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모든 걸음 걸음에 대한 계획을 전부 다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와 또 다른 인도 사이에 있는 공간을 메꾸는 일은 우리가 직접 해야 합니다. 최대한 하나님의 뜻과 나의 생각을 일치시켜 가면서 말이지요. 바울의 예루살렘으로의 여행계획은 그렇게 해서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비록 한 걸음, 한 걸음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은 아니지만 바울은 그 여행을 오랫동안 심사숙고했을 것이고 또한 기도하면서 계획을 세웠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여행을 마지막 단계에서 포기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다시 이미 떠나왔던 마게도냐를 거쳐서 아시아 지역으로 갔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여행계획을 이렇게 쉽게 내려놓고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은, 비록 그 여행계획이 즉흥적으로, 그리고 자의대로 아무렇게나 결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나 명령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 계획이 바울에게 중요한 것이고 또 오랫동안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소원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만큼 결정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목숨을 해치려는 악한 계획을 알고서도 예루살렘으로 향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생각을 분리해서 생각할 줄 알아야 무엇을 고집해야 하는지, 무엇을 양보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이 하나님의 명령이었다면 사도 바울은 어떤 위험이 있더라도 예루살렘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과 자기 계획이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자기 계획은 끝까지 고집해야 할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포기되고 내려놓아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로 떠나기 바로 직전에 방향을 되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과 일행은 아시아 지역으로 갔고 거기서 드로아라는 도시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한 주간을 머물게 되는데요. 체류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그의 일정은 굉장히 빡빡하고 또 어느 정도는 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사도 바울은 거기서 교회를 말씀 위에 더 든든하게 세우기 위해서 날마다 밤 늦게까지 성경을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날, 그러니까 마지막 7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 날도 저녁부터 시작된 강론이 밤 늦게 까지 이어졌고 그러면서도 언제 끝날지 모를 정도로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날씨가 조금 더웠는지 사람들 중에는 3층 난간에 걸터 앉아서 말씀을 듣는 사람들도 있었는데요. 그런 사람들 중의 한 명이 바로 유두고라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강론이 길어지자 이 청년은 졸기 시작했고 한밤중이 되어서도 끝나지 않자 아얘 잠에 빠지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불행한 것은 그러다가 그만 3층 난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린 것입니다. 그 청년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애석하게도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 청년은 예배시간에 졸면 안된다는 것을 이야기할 때, 항상 그 실제 예로 등장하는 악역스타인데요. 실제로 이 청년을 이렇게 보면 안됩니다. 당시 유두고라는 이름은 노예들 중에서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개똥이 쯤 될까요? 아무튼 그렇게 본다면 이 유두고는 하루 종일 심한 육체노동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몇일 동안 밤 늦게까지 이어지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 그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버텼으니 그 날은 정말 참을 수 없이 피곤했을 것입니다. 마지막 날인지라 바울의 설교가 다른 날보다 훨씬 더 길게 이어졌으니까요. 그렇게 버티고 또 버티다가 결국 그런 안타까운 일을 당한 것이지요. 물론 우리는 예배 시간에, 특히 그 이전까지는 찬송도 잘 부르고 가장 은혜로운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도 이상하게 설교만 시작되면 잠을 청하는 그런 성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말로 옳지 않은 일입니다. 유두고는 그런 청년은 아니었습니다. 아주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몇 날 며칠을 잠도 자지 못하고 집회에 왔던 그런 진지함과 열정이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런 사고가 일어났으니 바울의 설교는 중간에 멈춰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두고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들 너무 너무 슬퍼하며 낙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울도 뛰어 내려 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위에 엎드려 그의 몸을 끌어 안았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엘리야가 그렇게 한 것과 똑같이 했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이 일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사람들을 진정시키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사람들과 떡을 뗀 후, 바울은 다시 날이 샐 때까지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떠났습니다. 성경은 이 일의 결론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이것이 사도 바울이 자신의 여행 계획을 내려놓고 발걸음을 돌려 다시 아시아로 왔을 때, 드로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일주일간 드로아에 머물면서 바울이 날마다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했던 것은 아마도 그 곳의 성도들의 신앙적인 상태가 그만큼 집중적인 바울의 돌봄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두고의 추락사는 드로아의 성도들에게 더 큰 충격과 의심, 그리고 낙심을 가져다 줄 수 있었습니다. 그 사건이 다른 곳에서가 아니라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또 그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일은 그 어떤 일보다도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준 그런 도구가 되었습니다. 영적인 생명이 선포되는 그 곳에서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난 그 사건은 정말로 생명이 하나님께 있고, 복음은 생명을 위한 복된 소식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도 남았으니까요. 오히려 후에 신앙으로 인한 어려움이 있을 때, 드로아의 성도들은 이 날의 놀라운 사건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더욱 더 굳건하게 지켜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통해서, 모든 상황들 속에서 일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구별할 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내려놓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는 더욱 더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들을 하십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계획을 내려놓고 다시 아시아로 돌아왔을 때 그는 긴급하게 말씀을 공급받아야 하는 드로아 사람들을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집중적으로 돌볼 수 있었고, 비로 그 일 자체는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유두고 사건을 통해서 오히려 드로아의 성도들에게 더 큰 확신과 위로를 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일을 통해서 드로아의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셨던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여 생각하는 것은 때로 참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별한 후에 내 뜻과 계획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은 더욱 더 힘이 드는 일이지요. 그렇지만 그렇게 하는 일은 참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입니다. 우선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해 보이는 일이 됩니다. 순종과 인도란 말만으로는 아무리 많이 이야기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게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따라가 봐야 그 순종과 인도의 능력과 유익이 무엇인지 재대로 알 수 있고, 또한 자기 자신도 스스로가 자신은 자기 뜻이나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든든한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더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을 행하실 수 있으십니다. 아주 기뻐하시면서 말이지요. 사실 우리는 나의 계획과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했을 때 나타나는 일들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일의 참된 묘미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일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경험하게 해 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가는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길, 그렇지만 너무도 분명하고 너무도 확실한 증거가 있는 그런 길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그 길은 바로 내 생각, 내 계획보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더 앞세우는 그런 길입니다. 언제나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을 분별하기 위해서 애쓰시고, 또한 내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르기 위해서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여정은 평탄해 질 것이고, 그 과정은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는 아름다운 도구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성숙한 신앙이 주는 즐거움과 복을 만끽하는 확실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