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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5.11.20.금요기도회 - 밀레도에서7(사도행전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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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20장 25-31절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자기 자신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일했던 것을 근거로 해서 에베소의 장로들, 그러니까 목회자들에게 목회자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교회를 돌보아야 하는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서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보지 못할 줄 아노라” 바울은 자신이 에베소에서 3년 동안이나 머물면서 전한 말씀의 모든 내용을 ‘하나님 나라’라는 한 마디 말로 요약합니다. 바울이 3년 동안 구약성경을 근거로 해서 복음을 가르쳤다고 한다면 이 모든 것의 초점과 중심이 하나님 나라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든 성경의 중심에 무엇이 있을까요? 성경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이야기라고 한다면 그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오셨다는 것, 그러니 우리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나라의 백성이 되어야 하며, 지금 여기서도 그 나라의 백성으로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살다가 주님 다시 오시면 완전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스럽게 거하게 될 것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고 모든 성경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가장 중요한 메세지입니다. 이것이 복음과 성경의 핵심이라면 우리의 신앙의 중심에도 하나님 나라가 자리잡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제까지 많은 교회에서 사역을 해 왔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제가 전도사, 강도사, 부목사로 17년 넘는 세월을 사역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하는 설교를 거의 듣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저만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렇다면 그렇게 수많은 설교들의 중심이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요? 놀랍게도 ‘하늘’이 아니라 ‘땅’에 있었신앙적인 헌신을 해야하고 죄를 짓지 말하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이유들이 전부 다 그 결과 이 땅에서 더 많이 가지고 더 복받아서 세속적으로 평안한 삶을 살기 위해서라고 가르쳐 지고 있었습니다. 신앙은 하늘과 연결되지 못하고 계속해서 땅에서만 맴돌고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들의 신앙이 이렇게 힘이 없고 열정이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많은 성도들이 이미 가질 만큼 가지고 있고 누릴만큼 누리면서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땅의 복을 얻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니 신앙을 위한 동기부여가 되질 않습니다. 또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임할 때, 주님과 더불어 누리게 될 영광이 소망이 되어 있지 않은 성도는 이 땅에서 신앙 때문에 불편을 감수해야하는 필연적인 이유를 찾을 수 없고, 세상의 죄와 싸워 자신을 지키며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용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니, 진지하고 참되게 하나님을 믿으려는 열정도 가지기 힘들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도 살아내기가 어려워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 믿음 간신히 지키기에도 빠듯한 그런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그게 자신이 3년 동안 전한 모든 말씀의 핵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최고의 목회자,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기록한 바울이 그렇게 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땅 이야기만하는 목회자는 절대로 좋은 목회자가 아닙니다. 그가 하는 이야기가 아무리 편안하고 달콤하고 위로가 된다고 해도 땅에 대해서만, 현실 속에서 주어지는 복이나 은혜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목회자는 진실된 목회자가 아닙니다. 성경의 중심, 복음의 핵심, 사도 바울이 그토록 열심히 전한 모든 메세지의 핵심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반드시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중심의 신앙인이 되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관심과 소망의 한 복판에 이 세상과 현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 나라를 위해서 그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셔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이기며 살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고상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주님 나라가 온전히 임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영광 가운데 거하게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도 없이, 그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지 않고서 살았던 사람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성경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큰 것이 확실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목표가 없거나 불분명한 분들이 계십니까? 그러면 제가 가장 중요한 목표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하나님 나라에 붙들리고 그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을 여러분 신앙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아 보십시오.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들을  찾아 마음을 담아 읽고 묵상하며, 사도 바울이 들려주는 그의 소망에 대한 이야기를 묵상하시면서 나에게도 그 소망을 달라고, 그 소망의 기쁨과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고 애써 보시기 바랍니다. 그 나라가 여러분의 가장 귀한 보배가 될 때까지 하나님 나라에만 집중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도, 말씀을 읽을 때도, 설교를 들을 때도, 마음 한 가운데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두고서 그렇게 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와 추구에 응답하시는 날, 여러분은 정말로 하나님 나라 때문에 살아가는 가장 복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을 이겨내며 거룩한 삶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절대로 죽어서 가는 ‘천당’이 아닙니다. 죽으면 가게 되고, 죽어야만 의미있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비록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지금 여기에서도 충분히 경험될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내 참된 소망이 되고 내 믿음의 중심이 되면, 그 나라는 내 삶 속으로 스며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도 그 나라를 맛보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는요. 그 나라를 맛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충분히 복되고 충분히 기뻐할 수 있고 세상을 이기고 이기심과 죄를 이길만큼 충분히 능력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실은 여기서 이런 모습으로 맛보며 누리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들어가게 되는 그런 나라입니다. 


저는 모든 성도들의 믿음과 소망의 중심에 이 하나님 나라가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늘을 잃어버린 성도만큼 비참한 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만약 부활이 없다면 세상에 예수믿는 사람들처럼 불쌍한 사람들이 없을 것이라고 했으니까요. 우리가 땅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라면 굳이 이렇게 고생하면서 불편하게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현실의 만족과 즐거움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면 되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믿음을 지키면서 순종하며 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불편한 삶을 자초하는 것은 우리 인생의 결론은 이 땅 위에서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때, 우리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생의 결론이 날 것을 알고 있고, 그 결론만이 영원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꼭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의 중심에 하나님 나라가 놓여있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는 것을 추구하시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며, 그것을 깊이 생각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것이 여러분을 살게하고 또 이기게 해 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도 저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하나님 나라를 맛보아 알게 하는 은혜를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처음으로 부탁한 것이 하나님 나라의 메세지였다면 두번째로 맡긴 것은 교회입니다. 복음의 직접적인 결과는 교회이고, 그 교회야 말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교회를 그들에게 맡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목사들을 권면하면서 무엇보다도 ‘삼가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말은 스스로 조심하고 절제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렇다면 왜 목회자에게는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스스로 삼가는 것이 필요할까요? 목회자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덕을 세우는 사람이어야 하니까 그럴 것입니다. 조심하고 절제하지 않으면 덕이 되지 못하니까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목회자가 절제해야 하는 이유를 양떼, 그러니까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서 그래야 할 뿐만 아니라 목회자 자신을 위해서도 그래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곧 목회자의 절제는 교회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말해 주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알려주는 목회자가 스스로 조심하고 절제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목회자의 직분이라는 것이 자기의 노력으로 얻어서 자기 능력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목회자의 직분은 누가 주신 것입니까? 성령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성령님 직분을 주셨다고 말하는 이유는 목회가 성령님께서 주시는 은사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의 의미는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특별한 사람이고 특별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목회자의 권위는 자신의 권위가 아닙니다. 그 권위는 성령님께서 교회를 잘 다스리고 돌보라고 위임해 주신 것입니다. 절대로 자기 것이 아니지요. 이것을 알고 있는 목회자라면 그 권위를 사용하는데 굉장히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권위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최대한 삼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대한 월권으로 이어질 수 있고, 그것이 교회의 교회됨을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자신의 권위를 사용하고 또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는 일을 할 때, 스스로 삼가야 하는 두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너무나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느니라” 목회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교회를 돌보라는 소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하나님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귀하고 중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로 값주고 사신 양떼입니다. 성도는 그 안에 속해 있는 하나 하나의 양들이구요. 양 자체는 별로 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양을 자신의 양떼로 만드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양떼들은, 교회는 그만큼 귀한 것입니다. 그러니, 목회자가 이런 교회를 돌보면서 조심성 없이 하고 삼가지 않으면서 되는대로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이 되겠습니까? 저 스스로도 목사가 되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저 자신도 삼가지 않는 목회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굉장히 두렵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하나님께 이렇게 귀하다는 사실은 목회자들 뿐만 아니라 성도들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중요합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교회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희미해져 버린 시대의 성도들에게는 이것을 제대로 아는 것이 더더욱 중요합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하나님께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의미있는 모임입니다. 그 양떼를 얻기위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댓가로 지불하셨으니까요. 그래서 교회는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하나님께는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그만큼 귀하게 보십니다. 그런데, 막상 그런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은 자신은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알아도 그저 형식적으로만 인정하고 있는 듯합니다. 


교회를 생각할 때도,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교회를 교회가 가진 만큼의 가치로 대하고 귀하게 여기는 일에 관심이 거의 없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무언가 하고 싶은 것을 내려놓거나 자기를 희생하려는 모습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저 자기 마음과 자기 생각이 우선이고 거기서 나온 자기 바램을 교회 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주장합니다. 교회가 이렇다 저렇다 수없는 이야기를 쏟아 놓지요.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내가 귀하게 여기지 않는 교회가 정말 귀하고 훌륭한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내가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교회가 참으로 가치있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물론 하나님의 눈에는 여전히 그만큼 가치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작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들은 그런 귀하고 가치있는 교회를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를 정말로 가치있는 교회, 귀하고 훌륭한 교회로 만들고 싶다면, 나부터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교회를 평가하려는 모습을 내려놓고, 당신의 양떼인 교회를 얻기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눈으로 교회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를 그만큼 가치있고 중요하게 여기며 매사에 삼가면서 교회를 섬겨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무엇보다도 그 마음과 생각 중심에 하나님 나라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삶에서 하나님 나라가 경험되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피 값으로 사신 하나님의 양떼라는 것을 기억하며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려고 애쓰고 헌신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을 알고 또 그 복음을 통해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의 마땅한 모습일 것입니다. 


언제나 가슴 한 가운데 하늘을 품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고 또 경험하며 살아가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