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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5.11.27. 금요기도회 - 밀레도에서 8(사도행전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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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20장 25-31절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쁜 발걸음 중에도 굳이 밀레도에 내려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그 곳으로 부른 것은 그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서 이제 다시 보지 못할 그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으로 다시 못 보게 될 그들에게 앞으로 스스로의 신앙과 소명을 지키며 교회를 제대로 돌보기 위해서 꼭 부탁하고 또 경고해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들과의 작별이라는 사적인 이유도 결코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없지만 그들을 사랑하는 만큼 그들의 영적인 스승이요 아버지로서 그들을 다시 한 번 교훈하고 다짐시켜야 하는 공적인 임무는 더더욱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에는 사적인 관계도 있고 공적인 관계도 있습니다. 그런데, 둘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은 사적인 관계가 아니라 공적인 관계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바로 서고, 성도가 바로 서려면 목회자나 영적인 지도자와의 사적인 관계보다는 공적인 관계를 더 확실하게 세워야 합니다. 사적이고 친밀한 관계는 목회자와 성도라는 공적인 관계 안에 세워져야 비로소 유익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친밀해야 합니다. 목사와 성도로서 서로 아끼고 사랑해야 하지요. 그렇지만 저와 여러분들 관계 안에는 반드시 주님이 정해 주신 공적인 차원이 잘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영적으로 지도하고 가르치며, 여러분은 그 지도와 가르침을 따라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저와 여러분의 관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관계가 되고 말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목회를 제대로 하려면 성도들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다 뼈아픈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이니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습니다. 교회가 정말 교회다워지려면 두 가지 모두가 다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바울이 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거짓 전도자들과 장로들의 목회적인 탈선에 대한 경고입니다. 성도 한 두 사람이 탈선한다고 해서 교회가 흔들리거나 영적으로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목회자 한 사람이 잘못되거나 혹은 잘못된 목회자가 교회에 들어오면 그 교회는 금새 무너지고 맙니다. 겉으로는 어떤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완전히 와해되고 맙니다. 그러니 바른 목회자를 분별하는 문제, 그리고 목회자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바르게 감당하는 문제야 말로 교회를 위한 가장 중요하고 예민한 문제들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이것은 밖에서 들어오는 거짓 전도자들과 거짓 목회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을 ‘사나운 이리’라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하나님의 종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종은 아닙니다. 참 불편한 것이지만 사실입니다. 물론 바울의 이 이야기는 이단적인 메세지를 전하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지만 꼭 그렇게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꼭 이단적인 메세지를 전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목적이 잘못되어 있을 때, 그는 얼마든지 사나운 이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리는 목자가 아닙니다. 목동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리들이 양떼 속에 있는 이유는 목자나 목동들이 양 떼 속에 있는 이유와 전혀 다릅니다. 목동과 목자는 양떼를 위해서, 그들을 먹이고 돌보기 위해서 양떼 속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리는 양들을 위해서 양떼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양들을 잡아 먹기 위해서, 양들로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양떼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양떼를 아끼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무엇을 말해 줍니까? 목자와 이리의 차이는 그 사람이 양떼 중심인 사람이냐 아니면 자기가 중심인 사람인가 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리는 지금 당장은 양떼를 위하는 것 같아도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위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목자인지 아니면 이리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목자는 양떼를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자기 개인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교회를 위한 수단으로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목자는, 참 목자장이신 예수님을 닮은 목회자는 성도를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는 그 일만 생각하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성도 여러분, ‘목회의 성공’이라는 말이나 ‘성공한 목회자’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아마 많이 들어보시고 또 여러분 자신도 이 말을 사용해 보신적이 있으실텐데요. 흔히 우리는 일정규모의 교회에서 인정을 받으면서 목회하는 목사를 보면 ‘저 사람은 성공한 목회자야.’, ‘저 사람은 목회에 성공했네.’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정말 목회에 성공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성공한 목회자가 있을까요? 우리는 과연 성공이라는 말을 목회나, 목회자라는 말과 더불어 사용해도 괜찮을까요? 


제가 스승처럼 생각하는 화종부 목사님은 어느 주일에 설교 중에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회에 왜 성공이 필요합니까? 예수 믿은 것이 성공인데 무슨 성공이 더 필요합니까? 목회자는 죽으라고 부름받은 사람인데 목회자에게 무슨 성공이 있습니까?”하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목회에는 성공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성공한 목회자’라는 말은 ‘뜨거운 얼음’이나 ‘차가운 불’처럼 서로 함께 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목사도 성도도 이것을 잘 모릅니다. 목사도 목회에 성공하기 위해서 기를 쓰면서 목회하고, 또 성도들도 자신들의 목사가 성공한 목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극히 세속적인 기준에서 말이지요. 바로 이것 때문에 목사는 스스로 이리가 되어가고 성도들은 자기 안에 목자가 아닌 이리들을 끌어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목회를 하다가 보면 유명해 질 수도 있고, 교회가 커질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성공적인 목회자가 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목적으로 삼고서 목회하는 사람과 하다가 보니 그렇게 된 것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많은 양떼를 돌보는 선한 목동과 살찐 이리가 다른만큼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항상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성도 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요. 교회도 아니고 무슨 일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뜨거운 은혜를 받는 일도 가장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도 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영혼의 안전입니다. 자신을 영적으로 안전한 곳에 두는 일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자기 영혼을 돌볼 목회자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만약 어떤 목회자가 성도의 영혼을 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성도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기 위해서 애쓰지 않고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이라는 판단이 서면 성도는 그 목회자를 빨리 떠나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이리에게 잡혀 먹는 일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바깥에서 들어온 이리가 가장 크고 첫번째가 되는 문제라면, 두번째 문제는 처음에는 좋은 목동이었는데 나중에 이리로 변하는 목회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이 말은 에베소 교회들을 돌보는 장로들이 듣기에는 매우 충격적이고 껄끄러운 말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성도들을 돌보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런데 너희들 중에서도 이런 이리가 생겨날 거야. 나는 그것을 확실히 알아.’라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 이야기는 그 누구보다도 그들을 위한 충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저도 목회자이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압니다. 성도 여러분, 목회자가 받는 유혹 중에서 가장 큰 유혹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자신을 성도들에게 절대적인 존재로 만들고 싶은 유혹입니다. 그런데, 이 유혹은 단순히 그렇게 되면 목회자가 하나님처럼 떠받들어 지기 때문에만 생겨나는 유혹은 아닙니다. 아주 좋은 이유 때문에, 그렇게 되어야 더 쉽고 효율적인 목회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겨나기도 합니다. 사실 어느 정도는 그런 점이 없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목회자들은 모두 성도들이 좋아하는 목회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성도들도 말씀드린 그런 류의 목회자를 더 선호합니다. 이런 스타일의 사람들을 리더십이 있다, 카리스마가 넘친다, 능력이 있다, 대단하다는 말로  칭찬하며 그런 사람이 자기 교회의 목회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저 사람 자신이 없다, 박력이 없고 나약하다고 하면서 큰 신뢰를 보내지 않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목회자는 자신이 교회 안에서 만큼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그런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는 안팎의 압박감과 유혹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은 사실 성경이 말하는 목회자가 되는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목회자가 교회 안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될 때,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되고 그렇게 되면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이 아니라 사람인 목사를 따르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성도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그 목회자의 제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지만 교회 안에서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실제로 우리가 ‘큰 교회’라고 말하는 그런 교회 안에서는 어느 정도는 전부 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작은 교회라고 반드시 안전하지는 않지요. 작은 교회일수록 목회자 한 사람이 성도들 전부를 장악하고 자기를 따르는 자기 제자로 만드는 일은 더 쉬울 수 있으니까요. 


제가 이름만 말씀드리면 다 아실만한 아주 훌륭한 목회자 한 분이 목회하셨던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은 처음 그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시작할 때부터 자신은 몇 년 동안만 목회를 하고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천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동안 계속해서 그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다음에 교회를 목회할 목회자를 무리 없이 받아들일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아주 훌륭한 새로운 목회자를 청빙했습니다. 그리고 이전 목사님은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 목사님께서 그 교회를 떠나기 전까지 그 교회는 그리 크지는 않은 교회였지만 참 좋은 교회로 이미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성도들도 참 성숙한 그런 교회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첫번 교회를 개척한 그 목사님이 교회를 떠난 이후 그 교회는 흔들리지 시작했습니다. 그 후 짧은 기간 동안 제가 알기로 두 번 목회자가 교체되었고, 결국에는 공중분해되고 말았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었는데요.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처음 그 교회를 개척하신 목사님이 너무 훌륭하고 탁월하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후임으로 온 목회자들에게서 첫 목사님의 모습을 요구했고, 결국 그것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 그 교회를 개척하신 목사님이 자기 성도들을 자기 제자로 만드실 분은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되는 것을 막으려고 애쓰실 분이지요. 그런데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원치 않았지만 성도들이 예수님이 아니라 그 목사님의 제자가 되어 버려서, 그 목사님이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에 빠졌고, 그래서 결국 그 좋은 교회가 공중분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목사는 성도들을 자기 제자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또 성도는 그 목회자의 제자가 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목회자는 그저 성도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작은 목동의 역할만 하면 되고, 성도들은 그 목회자를 통해서 항상 목회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애써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회자와 성도로서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고 그 안에서 성도와 목자의 바른 관계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실 너무 어려워서 수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애초부터 포기한 것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저는 이 일이 그렇게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기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할지라도 충분히 노력하고 애써야 할만큼의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교회 안에서 만났습니다. 이것은 저와 여러분의 관계가 교회 바깥의 그 어떤 사람들의 관계와도 같지 않고 또 같아서도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한 없이 친밀해야 하지만 동시에 아주 공적인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합니다. 인격적으로는 가족 이상으로 친해져야 하겠지만 신앙적으로는 그 중심에 우리의 주인이시요 참 목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 분을 통해서 성도와 목회자의 관계를 유지해 나가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저의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로 양육해 가야 하고 여러분은 항상 저를 통해서 스스로를 예수님의 제자로 세워나가고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을 한 교회로 묶어두신 하나님의 은혜요 목적이니까요. 우리가 이것을 단단히 붙들고서 함께 살며 신앙할 때, 우리는 모든 늑대의 위험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늑대같은 목회자가 되지 않게 해 달라고 항상 기도하고 또 기도해 주십시오.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서 목회하는 삯군이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십시오. 저는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그 누구의 제자도 아닌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며 항상 지켜야 할 것을 분명히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