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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5.12.11. 금요기도회 - 밀레도에서10(사도행전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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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20장 33-35절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의 에베소 장로들을 향한 권면이 계속되고 있는데요. 오늘 본문에 처음 나오는 내용은 사도 바울의 경제생활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가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도 분명히 하고 있듯이 에베소의 장로들도 바울의 방식을 모범으로 삼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그 당시 에베소에는 부자나 귀족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큰 저택에 살고, 날마다 고급스럽고 귀한 음식을 먹으며, 화려한 옷을 입고 보석으로 치장하고 다니는 그런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을 해 보셨겠지만, 그냥 나 혼자 있을 때는 그렇지 않은데, 나보다 잘 사는 사람들, 많이 가지고 많이 누리고 사는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는 나도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소유하고 싶어지고, 그런 사람들이 부러워지고 나도 그렇게 살고 싶은 욕망이 겉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특히 내가 경제적으로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상황이 그만큼 더 견디기 어려워 집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도 바울은 결코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살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가죽으로 천막을 만드는 힘든 육체노동을 해야 했지만, 대개의 육체노동자들이 그렇듯이 전혀 풍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당시 에베소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 부자들과 귀족들을 부러워하지 않았고 또 그들의 소유를 탐내지 않았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복음이 전해지자 가난한 사람들 뿐 아니라 많이 가진 사람들도 교회에 들어왔지만 사도 바울은 그들의 소유와 풍족한 형편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절대로 단 한 번도 그런 것을 탐내본 적이 없었을까요? 단 한 번도 부자들을 부러워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테니까요. 아마도 매일 매일 낮에는 천막을 만들고 저녁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감당하다가 지치고 피곤할 때면, 그러면서도 끼니걱정 해야할 때면 그런 사람들이 부러워지고 정말 아주 아주 약간은 돈에 대한 유혹도 받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은 자신이 그런 시험조차 당한 적이 없었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런 유혹에 굴복해서 자신이 탐내고 부러워 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그것을 목적으로 삼아 손을 뻗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선택을 하고 또 자기가 선택한 대로 그 원칙을 끝까지 지켜냈던 것은 단순히 그렇게 하는 것이 옳거나 혹은 탐심이 나쁜 것이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을 복음답게 전하기 위해서 그는 탐심을 싸웠고 그 탐심을 이겨냈던 것입니다. 우리가 탐심에 굴복하기 전에는 탐심은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불편하게는 만들 수 있지만 우리 행동이나 선택을 바꾸지 못하지요. 그러나 탐심에 굴복하게 되면 그 탐심은 우리의 행동이나 선택을 그 이전과는 정반대로 바꿔 놓습니다. 우리가 탐심에 굴복하는 순간, 우리는 그 탐심의 대상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다른 것들은 다 수단으로 삼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탐심에 따라서 살면, 그 사람은 가치있고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그렇게 살고 싶다는 소원이 있다고 해도 그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탐심이 그 사람의 목적을 바꾸어 놓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탐심을 너무 가볍게만 여기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당연하고 꼭 필요하다고까지 생각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그런 풍토에서 살고 있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까지도 그런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말입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해주신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목적에 맞춰 살아야 죄를 짓지 않고 가장 사람다운 아름답고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탐심은 우리의 목적을 바꿉니다. 그게 무엇이든 탐심의 대상이 되는 것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 놓고, 하나님을 그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바꿔 버립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불편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을 피하려고 하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이 탐심에 빠져 있고, 무언가를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탐심은 언제나 우상숭배가 됩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탐심에 빠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복음 전하는 일을 제대로 해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 복음을 들어야 하는 사람들이고, 특히 그들 중에는 그것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부자들도 섞여 있을테니 복음을 전하더라도, 원래의 모습대로가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모습, 특히 부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그런 모습으로 변형시켜 전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탐심의 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탐심이 복음 전도자로서의 자신의 사명을 완전히 망쳐 놓을 것이고, 동시에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에게서 복음을 빼앗아 가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탐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또한 그 탐심의 유혹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는 그 탐심과 싸울 수 있었고 또 싸워서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시지요?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을만한 영광스러운 삶을 살기 원하시지요?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게 고상하고 아름답게 살고 싶으시지요?  그렇다면 여러분 속에 있는 탐심을 당연하게 여기지 마시고 그 탐심과 싸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욕심을 채우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 살아가지 마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탐심에 대해서 말씀드리면서도 꼭 주의를 드리고 싶은 것 하나는 제발 탐심에게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요. 탐심은 절대로 여러분을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하지 못합니다. 탐심이 우리 속에 있을 때, 탐심은 항상 나를 채워야 너도 만족하고 너도 행복할 수 있다고 소리치고, 그것이 대부분 우리가 바라는 것과 일치하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 속아 넘어가기 쉽지만 그것만큼 큰 거짓이 없습니다. 


제가 이것을 결혼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남녀가 결혼을 하면 처음에는 많이 다툽니다. 다들 서로 맞춰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그럴 듯하게 말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다툼이 왜 생겨납니까? 바로 상대방에 대한 욕심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적어도 이만큼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상대방이 그 욕심을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싸움과 다툼이 약하고 많지 않은 부부들은 애초에 그들이 그만큼 더 착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서로에게 대한 욕심이 그만큼 적고 또 그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그런 싸움이 언제부터 줄어들기 시작하고 언제부터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뜸해 지지요? 물론 갈등의 이유가 사라지면 싸움도 줄어들게 되지만 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욕심을 포기할 때, 그것을 채우겠다고 고집부리지 않기 시작할 때부터 가정의 평화와 행복이 시작됩니다. 이게 안되면 평생 티격태격 사는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 욕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욕심이란 욕심은 모두 우리가 다루어 내야 할 우리의 적이지 우리를 만족시키고 행복하게 만드는 아군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자기 욕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욕심이란 원래부터 밑 빠진 독하고 똑같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욕심에 속으면 안됩니다. 내 안의 욕심과 탐심이 나를 채워달라고 소리칠 때, 말 안 듣는 아이 윽박지르듯이 일단은 까불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거짓말 하지 말라고 꾸짖으시기 바랍니다. 나를 만족시키는 것은 네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여러분의 마음에 빗장을 질러 놓으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너희들도 나처럼 복음을 위해서 너희들 속에 있는 탐욕과 싸워야 하고 또 이겨야 한다고, 그래야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맡기신 일을 제대로 해 낼 수 있다고 말한 사도 바울은 이야기를 이렇게 이어갑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사실 바울에게는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충당하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그렇듯이 천막 만드는 일처럼 천한 일이 돈벌이가 좋았을 리가 없고, 게다가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까지 함께 감당해야 했으니까요. 사실 그런 점에서 보면 바울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지 누군가를 도와줄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열심히 일해서 자기 자신의 필요를 채웠을 뿐 아니라, 자신의 동료들, 그리고 나아가서 교회 안의 연약한 사람들의 필요까지 채워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렇게 했을까요? 단지 복음을 제대로 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자기 자신만 책임지면 되었을텐데 왜 바울은 굳이 이렇게 고생스러운 삶을 이어갔을까요? 그것은 우리 주님의 분명한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하신 말씀 말이지요. 성도 여러분, 정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됩니까? 그렇다면 왜 그렇지요? 단지 줄 수 있는 상태가 받아야만 하는 상태보다 더 낫기 때문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이 더 복되다고 하시는 삶이 실제로도 더 복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우리가 탐심을 이겨내려면 탐심을 따라 사는 삶은 절대로 우리를 만족시키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를 바른 목적에서 멀어지게 만들어서 우상숭배에 빠지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생각으로 탐심을 다스려야 합니다. 이것이 앞서 살펴본 내용인데요. 그러나 이렇게만 생각하는 일은 아무래도 소극적입니다. 이것은 그저 인생을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죄를 짓지 않기 위한 방법이니까요. 무엇이든 항상 소극적인 것에 머물러 있을 때, 어떤 일을 하거나 혹은 하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이유만 가지고 있을 때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것으로는 충분한 동기가 되지 못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50점을 맞지 않기 위해서 공부할 때보다는 70점을 맞을 목표로 시험 공부할 때 50점을 넘길 가능성이 많은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소극적인 이유와 소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실패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든 무엇을 하든 소극적인 이유에서 적극적인 이유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알면서도 자꾸 탐심에 속아 넘어가는 것이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언제나 우리 자신만 생각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면요. 우리는 반드시 탐심의 유혹에 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탐심이란 본래 내 힘으로 모든 것을 해 보려는 교만이 만들어 내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탐심을 이기려면 삶의 중심을 나 자신에서 나 아닌 다른 것으로 옮겨야 합니다. 나 아닌, 하나님. 구체적으로 나 아닌 내 주변의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에게로 옮겨야 합니다. 


내가 열심히 일하는 중요한 목적이 내가 잘 먹고 잘 사는데 있지 않고, 남을 섬기고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는데 있다면 그 사람은 탐욕을 부릴 이유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그만큼 탐욕의 유혹을 이기기가 쉬워집니다. 남을 돕고 섬기기 위해서라면 열심히 일하기는 해도 더 많이 쌓아놓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정말로 믿는다면, 나 자신이 아니라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복되다고 하셔야 정말 복되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믿는다면 그 사람은 더욱 더 탐욕과 싸워 이기기 쉬워질 것이고 그만큼 더 그의 소중한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귀하고 아름답게 살아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욕심을 이루며 살라고 부름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욕심과 싸우고 그 욕심을 이기며 거룩하고 고상한 삶을 살아가라고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절대로 탐심에 속지 마십시오. 탐심이 들려주는 달콤한 거짓에 속지 마십시오. 탐심은 절대로 우리를 만족하게 하고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를 더 불편하게 하고 더 불행하게 하며 더 속박할 뿐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상숭배입니다. 탐심대신 부르심을 따라 사십시오. 너의 인생을 내 앞에서 더 복된 인생이 되게 하라는 하나님의 복된 부르심을 따라 더 적극적으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려면 자구 받고 움켜쥐려고 하면 안됩니다 나눠야 합니다. 줘야 합니다. 약하고 부족한 사람들과 삶을 나누고 물질을 나눠야 합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열심히 살고 또 일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 목적에 따라 살면 탐심도 이기고 소명도 이루는 정말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처럼 우리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된 줄 알아서 날마다 더 복된 삶을 살아가며 주신 소명 이루는 아름답고 고상한 삶을 사는 복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