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누가복음 2장 1-14절
성도 여러분, 어떠세요? 오늘 성탄절 분위기가 많이 납니까? 솔직히 그렇지가 않지요? 어린아이들이야 부모님에게 가지고 싶은 것을 선물받기라도하니 그 기대로 마음이 설레였겠지만 다 자란 사람들에게는 그런 즐거움도 별로 없으니 말입니다. 지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해가 거듭될수록 성탄절 분위기가 희미해지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빠듯하다 보니 그렇겠지요. 그렇지만 성탄절만을 놓고 보면 교회 바깥에서 그러는 거야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든지 우리 주님이 태어나신 날을 그저 흥청망청 제멋대로 노는 날로만 생각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교회 바깥이 그렇다고 해서 교회 안까지, 그리고 성도들까지 성탄절을 맞이하는 마음이 덤덤하고 시큰둥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는 우리가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고상하고 아름다운 삶,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하늘나라도 가져다 주셨고, 새 생명도 주셨습니다. 하늘문을 여시고 이런 좋은 선물들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은혜로운 일들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날이 바로 성탄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도 마음과 감정을 가진 인간인지라 우리들 또한 주변 상황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삶이 더 팍팍해지고 어려워질수록 성탄절의 은혜는 그만큼 더 큰 능력과 빛을 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본디 성탄의 은혜는 마음이 높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입니다. 가장 놀라운 은혜의 날입니다. 세상이 어수선하고 여러분의 삶이 여러분을 힘들게 하더라도 꼭 예수님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 나에게는 이미 이런 놀라운 은혜, 변하지 않는 은혜가 있었지?”라고 생각하시면서 성탄절에 허락하신 값없이 주신 선물들을 다시 되찾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성탄절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그림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큰 별빛이 내리쬐는 작은 마굿간에서 마리아와 요셉이 사랑 가득한 지긋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포대기에 쌓여 구유에 누워있는 갓 태어난 예수님을 그린 그림입니다. 우리는 이 그림을 보고 또 생각할 때마다 가슴 한 켠이 따스해 지는 은혜를 누리곤 합니다. 저도 이 그림을 보고 또 생각할 때마다 참 마음이 따뜻해 집니다. 차가운 날씨 속에서도 그 그림을 보면 마치 난롯가에 서 있는 것처럼 따스한 기운을 느끼게 됩니다.
한 밤중에 베들레헴 근처의 한 들판에서 피고한 몸을 달래가며 양떼를 돌보던 목자들이 있었습니다. 잠들면 이리라도 나타나 양떼를 물고 갈새라 잠을 잘 때도 한 눈만 감고 선 잠을 자면서 밤을 지새고 있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옆구리가 환해 집니다. 피워놓은 모닥불이 쓰러져 불이라도 번진 줄 알고 졸린 눈을 번쩍 떴지요. 그런데,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천사였습니다. 그 위세에 눌려 납작 엎드린 목자들을 안심시킨 후에 천사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목자들은 이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알아 들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그 소식이 들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막상 소식을 듣자 그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중요한 소식이 왕이나 높은 관리들, 제사장이나 율법선생님들이 아니라 자기들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들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사는 상관하지 않고서 이야기를 이어 갑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여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목자들의 기대대로 였습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온 백성이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스라엘의 구원자의 탄생소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는 말만 한 것이 아닙니다. 워낙에 믿기 어려운 소식이니 그게 진짜라는 증거도 함께 제공해 주었습니다. 천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여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대단한 증거가 주어질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습니다. 한 남자가 자기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지금 네가 효성병원 신생아실로 가 보면 거기 갓 태어난 아이가 하나 누워있을텐데 그게 바로 그 아이가 네 아이라는 증거다” 뭐가 빠졌습니까? 그렇지요? 그 아이가 자기 아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해 주는 아이의 특징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천사의 말도 이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여 있는 아기를 보게 될텐데, 그것이 바로 너희를 위한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냥 ‘증거’가 아니라 말이지요. 성경에서 표적이라는 말은 어떤 일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기적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천사는 그 아기, 태어날 방 마저 얻을 수 없어서 어떤 집의 마굿간을 빌어 태어나고 구유를 세상 첫번째 잠자리로 삼아 몸을 쉬고 있는 그 평범한 아기야 말로 그 아기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가장 큰 기적이라고 말해 주었던 것입니다.
‘기적’이란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예외적인 일이 갑자기 발생하는 것을 뜻합니다. 죽을 병이 갑자기 치료된다거나,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이 해결된다거나, 이유도 없이 마음에 깊은 평안이 찾아온다거나 갑자기 공부하고 담 쌓았던 아이가 밤을 세워 공부를 한다거나 하는… 이런 일들을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일들은 자연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날 천사가 기적이라고 부른 것, 메시야가 태어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적이라고 말한 것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냥 갓 태어난 아기를 보게 되는 것이었니까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이것을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표적’이라고 말씀셨다면 이것은 분명히 그만큼 놀라운 기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구유에 누워있는 이 아기는 그토록 놀라운 기적일 수 밖에 없을까요? 그것은 그 아기가 그저 사람이 아니라 바로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아기는 하나님께서 한 여인의 태를 빌어 다른 아기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아기, 엄마의 도움이 없이는 목숨조차 부지할 수 없는 약하디 약한 아기로 태어나신 그런 특별한 아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었다는 것, 게다가 어느날 갑자기 다 자란 어른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여인의 몸을 통해, 그 여인의 열 달 동안의 보호와 양육, 그리고 산고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기적입니다. 정말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온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 그 안의 모든 것들을 움직여 가시는 온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그런 아기로 태어났다는 것. 이것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누군가 이 아기 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완전한 사람이 되신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온 우주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을 목격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이런 탄생, 이렇게 볼품 없고 어찌보면 처량하기까지 한 우리 예수님의 탄생은 그렇기 때문에 가장 놀라운 기적이 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안에 너무 놀랍고 한 없이 큰 은혜를 담는 그릇이 될 수 있었습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 말하기를 지금부터 너희에게 들려줄 소식은 몇몇 특별한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고 했습니다. 다른 어떤 훌륭하고 내세울 것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목자인 너희’,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너희’가 가서 직접 구세주를 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귀족이나 고관대작의 집에서 나셨다면, 왕가의 후손으로 나셨다면, 마굿간이 아니라 아무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그런 귀한 곳에서 나셨다면 예수님이 나신 소식은 과연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될 수 있을까요? 그 분이 과연 목자들과 같은 낮은 사람의 참 구주가 될 수 있으셨을까요? 과연 우리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임마누엘’이라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다’고 ‘우리같은 사람들과도 함께 하셨다’고 기쁘게 외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몇몇 사람들 뿐만 아니라 바라고 소망하는 온 백성들의 구세주가 되실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목자들이나 우리들처럼 자랑할 것 내세울 것 없는 사람들까지도 스스럼 없이 ‘임마누엘’이라고 부르며 다가갈 수 있는 그런 그리스도가 되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가장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나셔서 그 분들과 함께 낮은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헛간의 구유를 요람으로 삼아 잠드셨던 그런 구세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 삶의 조건을 가지고 나 자신이 거부당한다는 느낌을 가지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느낌은 소외감과 박탈감으로 이어지고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되고 심지어는 사회 전체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그 삶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간에 이미 하나님께서 긍정하신 삶, 괜찮다고 하시고 문제 삼지 않으신 그런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마굿간 구유 위에 나시면서 이미 감싸 안으신 그런 삶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진 것 좀 없다고 해서 기죽지 마십시오.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체념하지 마십시오. 몸이 건강치 않아도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말해 주십시오. 우리 중고등부 친구들은 공부 좀 못한다고 해서 열등감 가지지 말고 스스로의 외모 때문에 화내고 부모 원망하지 마세요. 예수님께서 훌륭한 사람들이 아니라 목자들에게 자신을 가장 먼저 보이시고, 가장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작은 도시의 헛간에서 태어나 가장 낮은 삶을 사셨던 것은 주님이 없는 사람, 부족한 사람, 내세울 것 없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긍정하고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 그런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나는 네가 어떤 사람이든지, 어떤 조건에 있는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하지 않고 사랑한다고 하시면서 말이지요.
이 세상은 항상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문제 삼습니다. 무엇이든지 차이가 나는 것을 발견하면 그것으로 사람을 가르고 나누고 평가하지요. 그리고, 우리의 삶과 우리가 사는 사회는 바로 그것 때문에 상처 입고 고통당하며 서로 갈등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그렇게 낮은 자리에, 무기력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던 것은 바로 그 문제를 풀어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가장 낮은 자리로, 가장 무기력한 모습으로 와서 너희의 구주가 되었으니 이제는 너 스스로 너 자신을 감싸 안고 네 삶을 부둥켜 안으라고, 또 내가 그랬듯이 너희들도 서로의 삶을 감싸 안고 모든 차이점들을 넘어서서 서로와 함께 하라고, 그렇게 나의 성육신을 흉내내고, 나의 임마누엘을 흉내내면서 살아가라고 말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땅의 가장 낮은 곳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가 되어 준 것, 하늘의 지극히 높은 영광과 낮은 땅의 평화를 하나로 묶어낸 것, 그것은 바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여 있는 아기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 하나님의 본체이신 분, 그리고 거룩하고 높으신 분이 가장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아기가 되는 순종을 하셨기 때문에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땅에서는 그가 아무리 낮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은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작은 아기,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여 있는 그 연약한 아기가 온 세상을 하나님의 영광과 평화로 채우는 가장 큰 기적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우셨던 그 구유, 그 구유 덕분에 우리들은 거리낌 없이 오늘을 기뻐하며 그 은혜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 기독교는 이 귀한 구유를 애써 잊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목회자들도 성도들도 모두들 그 구유를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구유에 두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 구유에 참 기독교됨이 있고 거기에 참 교회됨과 성도됨이 있는데, 거기에 목회자됨이 있는데 그 구유를 좀처럼 사랑하지 못하고 그것을 자꾸 황금빛 궁전으로 바꾸려고만 합니다. 그렇지만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이 구유입니다. 땅 위의 사람들에게 평화가 되는 것 또한 이 구유이지요. 우리가 이 구유를 잊으려고 하고, 이 구유를 버리려고 하면 남는 것은 화려하지만 공허한 껍데기 밖에 없습니다. 거기에는 겸손하신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더 이상 계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구유에 누우셨던 예수님, 거기서도 편안하게 쉬시며, 하늘의 영광과 땅의 평화가 되셨던 구주 예수님의 나심을 기뻐하면서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를 우리 주님 편히 쉬실 작은 구유로 내 드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성탄절의 두번째 기원’을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지구촌과 우리 주변에 있는 주님께서 ‘작은 자들’이라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사람이란 자기 한 몸 편하면 온 세상이 평안한 줄 아는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가지 이유로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 우리의 형제들과 이웃들이 있습니다.
첫째, 신앙으로 인해 핍박받는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한 해 최소 만 명이 넘는 성도들이 신앙으로 인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둘째, 아프리카의 굶주린 이웃들, 특히 어린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전세계 국가들 중 52개국의 기아가 심각한 수준으로 보고되었습니다. 사람 수로는 8억 2천 400만명이 기아상태, 그러니까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세째, 우리의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겨울이 되면 이 분들의 삶이 더 팍팍해 지는데요. 독거 노인들, 소년 소녀가장들, 학대받는 어린이들, 그리고 결식아동들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또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서 그러셨듯이 우리가 이런 이웃들의 아픔을 더 헤아리게 하시고 또 우리 교회가 이런 분들을 위해서 더 많이 헌신하는 교회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