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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절기

2016.11.20. 주일오전 - 모든 일에 감사하기(2016 추수감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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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8절




올해도 어김 없이 추수감사주일이 또 다시 돌아왔습니다. 기쁘십니까? 감사합니까? 그러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우리들 중에는 어쩌면 전혀 감사할 수 없는 마음으로 앉아계신 분들도 계실 줄로 압니다. 사실 절기는 그 절기의 참된 의미를 살려서 지키지 않으면 차라리 없느니만 못합니다. 그러면 그저 형식과 행사에 그치고, 억지로 마음을 짜내야 하는 부담스러운 날이 되지요. 추수감사주일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 감사라는 것만큼 억지로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도 감사해야 한다니까 감사해 보기는 하지만 마음은 썩 기쁘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감사에 대해서 때때로 이런 반응을 보이고, 이런 마음으로 추수감사주일을 보내는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감사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감사란 특별히 감사할 꺼리가 있을 때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엄밀하게 말씀드리면 전통적인 기독교 절기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교회의 역사를 보면 옛 성도들은 저마다 한 해의 농사를 끝내고서 하나님께 그 해의 수확을 감사하는 특별한 예배를 드렸고, 또 그 날을 축하하며 넉넉한 잔치를 벌이곤 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미국의 추수감사주일을 따르고 있는데요. 아마도 이것은 우리나라에 기독교를 전해 준 나라가 미국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면서 예배를 드린 것이 지금 우리의 추수감사주일이 된 것이겠지요.


아무튼 한국교회는 미국의 추수감사절을 따라서 추수감사주일을 지키고 있는데요. 아마 어떻게 해서 미국의 추수감사주일이 생기게 되었는지는 여러 차례 들어서 다들 알고 계실 줄 압니다. 그렇지만 날이 날이니 만치 다시 한 번 그 유래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습니다. 이야기는 청교도라고 불렸던 영국의 성도들이 자기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 일부터 시작됩니다. 1620년 9월 6일 영국의 플리머스 항구에서는 청교도들 28명을 포함한 102명의 승객을 태운 메이플라워호가 미국으로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그 항해는 66일 동안 계속되었는데요. 그 동안 배 위에서 2명이 숨지고 나머지는 모두 미국대륙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 뒷 이야기는 아시는 대로 참 아름답고 은혜롭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도착한 그들은 그 땅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계절도 이미 11월이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그 땅에서 농사를 짓는 방법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때 그들을 도와준 것이 바로 그 곳의 원주민들인 인디안들이었고, 그들은 옥수수 농사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해에 풍성한 수확을 거두고 그것을 감사하면서 그렇게 자신들을 도와준 인디안들을 청해서 함께 식사를 하고 예배를 드린 것이 기원이 되어 추수감사절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은혜로운 버전이고 원래는 이야기가 이렇지가 않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처음에 대륙에 도착한 것은 배 위에서 태어난 아이까지 101명이었지만 그 해 겨울이 지나가면서 그 중에서 절반이 풍토병에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날 때까지 그들은 별다른 수확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흉년과 식량난으로 고생했으며 미국에 올 때 배를 빌리느라 진 빚이 이자가 불어나서 경제적으로도 더 쪼들리게 되었지요. 뿐만 아닙니다. 이들은 다른 인디안들의 입장에서는 자기 땅을 침범해 들어온 침입자였습니다. 그래서 인디안들은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해서 투쟁을 벌였고 그래서 이들은 그들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상황적으로만 보면 별로 감사할 것이 없었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거기까지 왔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렇게 척박한 환경 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이들은 그래도 의미있는 수확을 거두던 첫 해, 정말 얼마 안되는 적은 양의 곡식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주신 것에 대한 감사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과 인도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되었구요.


여러분 보시기에 어느 것이 더 신빙성 있어 보이십니까? 첫번째 이야기인가요, 아니면 두번째 이야기인가요? 미국의 역사를 알고, 또 농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분들이라면 아마도 두번째 이야기가 더 현실성 있게 들리실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추수를 감사하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그 추수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향한 청교도의 믿음을 기념하는 의미가 더 크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감사는 받은 것이 많아서, 감사할 꺼리가 충분해서 드린 그런 감사가 아니었으니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에도 ‘감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만나는 감사라는 말은 우리를 참 부담스럽게 만듭니다. 감사라는 말이 감사하라는 ‘명령’으로 주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범사에’라는 말과 함께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감사하는 것도 쉽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감사하라!’고 합니다. 그것도 범사에 감사하라고 요구합니다. ‘감사’는 정말 좋은 것이지만 이런 식으로 강요되는 것, 그리고 이렇게 무리하게 요구되는 것은 별로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왜 그런지를 두 가지로 나눠서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함께 생각해 볼 것은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계신가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사하라고 명령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공부해라, 옷 정리해라 하고 요구하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 입니다. 만약 자녀가 이미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면 부모는 자녀에게 공부하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녀가 자기 옷을 칼같이 정리하는 습관이 되어 있다면 부모는 절대로 옷 정리하라는 명령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녀가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명령하는 것이지요. 하나님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감사해야 하는데 감사하지 않으니까, 아직 우리 몸에 감사하는 습관이 붙어있지 않으니까 우리에게 감사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신앙 밖에 있을 때, 사람들은 감사하는 것 자체에 대해 매우 인색합니다. 감사하며 살아가는 습관이 되어 있지 않지요. 그래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진심에서 나오는 감사의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래 사람은 감사해야 합니다. 사람이란 자기 바깥으로부터 무언가를 공급받지 않고서는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다른 사람들과 이 세상에 의존해서 살아가야 하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이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합니다. 그저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자동적으로, 그리고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다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 무심하게 지나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실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갑자기 감사하게 되나요? 갑자기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그런 것들을 전달해 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습관이 생기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나서도 여전히 감사하지 않는 옛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런 습관을 고쳐 주시려고 감사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감사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이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기가 살면서 받고 누린 모든 것들이 자기가 만들어 낸 것도 아니고, 당연히 자기에게 주어져야만 하는 것들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니까요. 만약 이 사실을 알면서도 감사하지 않는다면 그건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은혜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우리에게 ‘감사하라’는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그 명령에 우리의 진심을 더해 순종할 때, 옛 습관을 깨뜨리고 감사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올해도 이미 열 한 번째 달이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열 한 달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지나갈 수 있었을까요? 물론 여러분이 보낸 열 한 달 속에는 특별한 일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기념할만한 복된 일이 없었을 수도 있었겠지요. 이 문제는 뒤에 다루겠지만,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일들, 그리고 부정적이고 불행한 일들도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그런 열 한 달이었지만 그래도 이 열 한 달 동안 우리 삶은 계속해서 이어져 왔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들은 전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설사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셨다고 치더라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경우가 더 많습니까? 아니면 내 삶에 꼭 필요한 것을 주신 경우가 더 많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요? 그게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맞지요? 그렇다면 분명해 지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꼭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이미 주셨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여기 앉아 있는 일조차도 불가능할 테니까요. 그래서 우리 삶 속에는 분명히 부족하고 불완전한 것도 있고, 불행하고 화가 나는 일들도 있지만, 그런 것들과는 별개로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만으로 우리는 감사할 수 있고, 거기 감사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는 것, 감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꾸 없는 것, 부족한 것, 아닌 것, 나쁜 것만 보기 때문입니다. 주신 것들을 본다면 충분히 감사할 수 있고 또 감사해야 합니다. 평범한 것이라고 해서 내가 받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남들 다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이 아니지요. 그게 무엇이든 나는 그것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받은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되고, 주신 분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이것을 일컬어 성경은 교만이고 불신앙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부정적인 일들과 부족함들 때문에 이런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오히려 부족하고 불완전 해도 그 안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겸손하고 행복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감사하라’는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때,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두번째로 우리가 살펴 볼 부분은 ‘범사에…’라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저 감사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감사할만한 일이 있으면 감사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감사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범사에…. 무슨 뜻이지요? ‘모든 일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감사는 모든 경우에, 모든 일에 대한 감사입니다. 정말 요즘 아이들 표현으로 “헐~!”입니다. 정말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말씀하시는 것인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보다도 더 현실성이 없는 말씀처럼 들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은 사실 우리가 ‘감사’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반응입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귀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제가 아주 아주 좋아하는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제가 그 분에게 뭐라고 해야 하지요? 그렇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이럴 때 저의 감사는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그 분이 저에게 주신 것입니까, 아니면 그것을 주신 그 분입니까? 물론 제가 감사를 표시한 것은 그 분이 저에게 그 귀한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감사는 그 물건을 향하지 않습니다. 감사는 그 물건을 주신 분을 향합니다.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도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내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 불행하고 슬픈 일들,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들 그런 일들 자체를 감사하라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 일이 나쁜 일이건 좋은 일이건 그런 일을 경험하는 동안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 같지만 사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들으면 자꾸 이렇게 말하지요. “슬픈 일에도 감사합니까? 아파도 감사합니까? 도둑 맞아도 감사하고, 죽어도 감사합니까?”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일어난 일과 하나님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질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부정적이고 불행한 일들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렇지만 이것도 오해입니다. 내가 죄를 짓고 사람들이 나에게 악하게 대합니다. 사업이 힘들어 진 것이 하나님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큰 질병에 걸린 것이 하나님께서 병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악이 존재하는 것 또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한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절대로 직접 악을 행하지 않습니다. 악을 행하는 것은 사람 밖에 없습니다. 사람만이 악하고 사람만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사람들이 저질러 놓은 잘못을 뒤처리 하느라고 바쁘십니다. 쓴 열매를 없애시고 상처를 치유하시고 망가진 사회를 고치시고… 하나님은 언제나 그 일을 하고 계십니다. 


우선 우리는 상황과 하나님을 나누어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상황 자체를 가지고는 감사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감사해서 안될 일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기에 아무리 악하게 보이는 일들도 결국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습니까? 


우리는 아무리 똑똑해도 앞을 내다 보지 못합니다.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일의 마지막 결론이 어떻게 될 지, 지금 내가 경험하는 이 현실의 마지막 모습이 어떤 모습이 될 지, 그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저 인간은 지금 당장을 볼 수 있을 뿐이고, 그것을 근거로 약간의 미래를 그것도 아주 희미하게 내다볼 수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도 그러실 테지만, 제가 저의 길지 않은 삶을 이렇게 되돌아 보면요. 저는 저의 삶에 대한 저의 생각과 판단이 얼마나 형편 없는지 깨닫게 됩니다. 살면서 이것 아니면 정말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생각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또 이런 일이 있으면 정말 안된다고 생각했던 그런 일들이 일어난 적도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저의 인생은 완전히 망가져 있어야 합니다. 저 스스로 통제할 수 없었던 일들 때문에, 그리고 저의 실수 때문에 말이지요. 그렇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도 살고 있고, 그럴 뿐 아니라 잘 살고 있습니다. 저 개인의 인생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이 세상은 사람들의 악함과 저질러 온 죄들만 생각한다면 망해도 수 없이 망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이 세상은 여기 있고, 지금도 그런 대로 굴러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모두가 다 하나님 덕분입니다. 모든 것이 협력해서 선을 이루도록 그렇게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그 어떤 부족함과 그 어떤 죄악도 이 세상과 우리 삶을 완전히 망쳐 놓지 못하게 막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아플 때는 함께 아파해야 합니다. 슬픈 일이 일어나면 함께 슬퍼해야 하구요. 또 세상에 악이 들끓을 때면 우리는 함께 분노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도 우리는 하나님께 는 감사할 수 있고, 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결국 우리의 삶과 이 세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실 것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전할 말씀을 준비하면서 사실 저는 스스로 정말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여러가지 이유로 저 스스로가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정말 많이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요 몇년 동안 이 나라의 상황 때문에 마음 편할 날이 없었고, 마음 놓고 기뻐할 수 있는 날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을 수 있고, 또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 의 삶과 이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계속해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 눈에는 정반대로 보일 때도 많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그 일을 행하실 것이며 또 완전히 이루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고 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이 말씀은 그저 감사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또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기대하며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감사는 믿음의 증거입니다. 우리의 감사는 소망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감사를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항상 없는 것과 부족한 것만 보지 마시고 이미 주신 것들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사용하셔서 우리 삶과 이 세상을 가장 선하게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께 여러분의 눈길을 고정하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으로 감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며, 그 믿음 안에서 소망 넘치는 삶, 모든 근심과 걱정을 넉넉히 이기는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감사의 절기에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을 회복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모든 것이 은혜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감사가 몸에 배게 하소서.
  2. 당장 눈앞의 현실만 보느라고 하나님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는 감사하게 하소서.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