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21장 17-26절
지난 금요일에 우리는 성령충만했던 사도 바울과 성도들이 바울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일을 두고 일어난 의견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해 냈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울과 다른 성도들은 분명히 이 일에 대해서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원만한 결론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그 일이 너무나 예루살렘에서 커다란 위험이 바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만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에게는 그 일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소명이었습니다. 자기 앞에 그 어떤 위험과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그 일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성도들은 바울을 만류하는 일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이사랴의 성도들 중 몇 사람은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바울의 위험은 곧 자신들의 위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말이지요.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성령충만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소명을 떠나지 않습니다. 때로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 때문에 고민할 땓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다시 소명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또한 성령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합니다. 주님을 의지하면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고, 그것이 가장 선한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어려움과 손해를 있더라도 성도들과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누어 지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세상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바울과 일행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바울과 일행들을 반갑게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쉰 다음, 바울은 일행과 함께 야고보에게로 갔습니다. 이방인 선교의 대표자로서 유대인 성도들의 대표자를 만나기 위해서 였습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을 통해 이루어진 이방인 선교에 대해서 보고했습니다. 이 보고는 정말 은혜롭고 화기애애하게 이루어 졌고 또 끝이 났습니다. 보고가 끝나자 야고보는 그 당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던 문제 하나를 끄집어 냅니다. 물론 그것은 잘못된 소문 때문에 생겨난 오해였지만, 그 당시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은 바울이 로마의 영토 곳곳에서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지키거나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비록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었지만 유대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여전히 율법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로서는 유대인인 바울이 다른 유대인들을 그렇게 가르친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덕분에 이들은 이방 땅에 사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약간은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게 되었고, 이것이 둘 사이에 오해와 갈등을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이미 해결책을 생각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아마도 이전에 나실인으로 헌신했었던 것같은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침 정해진 헌신 기한이 다 되어 그 동안 자르지 못했던 머리카락을 잘라야 했는데,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을 바울이 내고, 그 다음에 그들과 함께 7일 동안의 정결예식에 참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저절로 바울이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 증명되어서 바울에 대한 오해가 해결될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이미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바울로서는 전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자신이 복음 안에서 얻은 자유를 포기하는 일로 생각될 수도 있었고, 자신이 왜 그런 말도 안되는 오해를 풀려고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항변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마디 말도 덧붙이거나 그 어떤 반대 의견도 표시하지 않고 그저 야고보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우리가 이 모습을 21장 1절부터 16절 까지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둘은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그 때의 바울은 정말 강경했습니다. 자신이 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그는 전혀 양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일행들까지도 위험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여행을 감행했고 그렇게 해서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렇지만, 17절부터 나오는 예루살렘에서의 바울의 모습은 마치 무골호인처럼 보입니다. 그저 야고보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따라 합니다. 이미 율법에서 완전히 자유로워 졌습니다. 그런데도, 그 다시 율법 밑으로 들어가 자신의 입장에서는 전혀 불필요한 일을 합니다. 제사를 지내기 전에 7일동안의 정결예식 기간을 거치는 일이 그런 일들 중의 대표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바울은 제사가 더 이상 필요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또 믿고 있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 차이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처럼 완전히 달라 보이는 바울의 두가지 모습을 어떻게 하나로 만들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바울이 왜 예루살렘으로 오기 위해서, 목숨까지 걸면서 그렇게 노력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정반대처럼 보이는 두 가지 모습은 사실 똑같은 이유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오려고 했던 데에는 두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이방인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모금한 헌금을 전달하는 것이고 둘째는 예루살렘을 통해서 로마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을 전달하는 일은 단순히 어려움에 처한 교회를 돕는 구제가 아니었습니다. 공식적인 면에서만 보면 사도행전 15장에서 내린 결론으로 이미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그리스도인 사이의 율법으로 인한 갈등이 다 해결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도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그들 사이에는 묘한 갈등과 알력이 있었습니다. 그 갈등이 주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반쪽짜리 그리스도인으로 낮춰보는 데서 생겨난 것이지만 여전히 좁혀지지 않는 골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헌금한 연보를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일을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한 몸’이었습니다. 절대로 여럿으로 나뉠 수 없고, 그렇게 나뉘어 지면 더 이상 참된 그리스도의 몸일 수 없는 것이 바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아직 이방인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는 실질적으로 하나가 되어 있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에게 이방인 교회와 유대인 교회를 온전히 하나로 화해시키는 일은 너무나 중요한 일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자신들도 어려운 상황에 있는 이방인 성도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헌금을 하고,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이 그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한다면 그것은 이 어려운 문제를 푸는 훌륭한 열쇠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만약 그의 생각대로 예루살렘 교회의 도움과 파송을 받아 로마로 갈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결국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인 로마 선교를 지원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그것 또한 두 교회를 한 몸으로 만드는 은혜로운 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쓴 것입니다.
바울이 다시 율법 밑으로 들어가 마치 율법을 지켜야만 하는 사람처럼 행동한 것도 똑같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고, 타당한 반론을 제기해서 야고보의 제안을 거절할 수도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그럴 자유도 권리도 충분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그 모든 것들을 다 내려 놓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복음됨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라면 그것이 자신의 자유이든 권리든 얼마든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섬기고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고 또 꼭 보아야 하는 것은 과연 성도는 자신의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 성령충만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유를 얻게 되면 그 자유를 사용하는 일에 대해서만 생각합니다. 마치 그 자유를 전부 다 행사하는 것만이 최선이고 자유를 다르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또 주어진 자유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여기고 심지어는 어리석은 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자유를 그렇게 생각하고 또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자유를 너무나 가치 없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그저 사용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모두 사용하는 것이 제일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유는 그야 말로 ‘자유’입니다. 자유에는 무엇을 할 수 있는 자유도 있지만, 반대로 그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도 있습니다. 자유를 사용하는 것도 자유이지만 그 자유를 사용하지 않는 것도 자유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보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선택하는 것이 자유를 진짜 가치있게 사용하는 일이 될 때가 많습니다. 밥을 두 그릇 먹을 수 있습니다. 자유이지요. 그렇지만 두 그릇 먹을 수 있을 때, 한 그릇만 먹고 나머지 한 그릇을 배가 고픈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가장 자유답게, 가장 값지게 사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진짜로 자유한 사람일까요?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를 얻은 사람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자신이 자유롭다는 사실 그 자체에도 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더 크고 소중한 가치가 있다면 언제든지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자유를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원래 우리의 자유는 자유를 가지는 것이나 그 자유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자유는 섬김의 도구입니다. 자유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하는데 사용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너무나 아름답고 귀한 도구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신 이유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묶여 있고, 또 세상에 속한 어떤 것에 묶여 있으면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 안에서 우리 자신에게도 구속되지 않을 수 있는 놀라운 자유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자신의 자유를 생각할 때, 그것을 주장하거나 사용하는 일 자체에 목적을 두지 않습니다. 그 자유를 진짜 자유답고 귀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애쓰며, 그래서 그 사람이 자유를 사용하는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사람들이 서로 하나가 되는 화해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자유를 이렇게 귀하고 능력있게 사용할 줄 아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자신이 자유하다는 그 사실에도 묶이지 않는 정말 자유로운 사람들이 되어서, 우리가 우리 자유를 사용하는 그 곳에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사람들이 유익을 얻고 화해하게 되는 귀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