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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6.02.05. 금요기도회 -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사도행전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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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21장 27-36절





오해를 풀고 서로 화해한다는 것은 항상 쉽기만 한 일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면 때로는 내가 아무런 잘못이 없어도 일단은 먼저 용서를 구해야 할 때도 있고, 내 편에서 보자면 전혀 할 필요도 없는 그런 일들을 해야만 할 때도 있습니다. 대개는 누가 더 먼저, 더 많이 잘못했느냐를 따지고 그래서 누가 먼저 사과해야 하는지를 따지느라고 영영 화해에 이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 친구와 그래서 영영 화해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는데요. 그 때를 생각해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정말 친하고 좋은 친구였는데, 하나의 오해 때문에 약간의 다툼이 생긴 후에는 영영 멀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려서 그랬었지만 왜 그 때 내가 먼저 다가가서 화해를 청하지 못했을까 지금도 후회가 됩니다. 자존심을 내세우는 일이나 잘잘못을 가리는 일보다 화해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특히 갈등하고 다투고 있는 이유가 오해 때문이라면 그 때는 정말 자존심을 내세우고 잘잘못을 가리느라고 화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더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오해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줄을 알면서도 결코 자기 입장을 내세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변명을 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대신 묵묵하게 그 오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바울에게는 자기의 옳고 그름을 증명하는 일보다, 그리고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보다 성도와 성도, 교회와 교회가 서로 화해하고 하나가 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더 중요한 것을 붙들기 위해서 덜 중요한 것은 과감하게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자기 자신과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뿐만 아니라 그들과 이방 땅에 사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오해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는 모름지기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더 유익한 것이 있다면, 사람들을 다시 하나로 묶어 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자존심이나 자기의 같은 것들은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실은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자존심 있는 사람이고 의로운 사람입니다. 정말 자신의 귀함을 알고 마음이 있고 또한 올바른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고상한 선택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은 자존심과 의로움에 대한 바른 생각을 하고 있기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은 자신과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의 오해를 풀고 그들과 이방 땅에 사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오해도 풀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더 큰 오해와 또한 더 큰 위험이 바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는 유대교의 명절이었기 때문에 아시아, 그러니까 지금으로 하면 터키 쪽에서 살던 유대인들도 예루살렘으로 많이 와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사람들 때문에 일어났는데요. 이 사람들이 성전에 왔다가 성전에 있는 바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뜸 소리를 지르며 다른 유대인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이랬습니다 “이 사람은 이 곳 저 곳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앞쪽의 내용은 완전히 거짓말 아니었습니다. 물론 바울이 유대인들을 향해서 그런 메세지를 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바울이 전하고 있었던 복음은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에게는 충분히 그렇게 들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이런 사태를 불러온 것은 그 내용이 아니라 뒤쪽의 내용입니다.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29절이 분명히 설명하고 있듯이 그들은 이전에 바울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함께 예루살렘 시내에 있었던 것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울이 지금 성전에 있으니 당연히 그렇게 율법과 성전을 무시하는 바울이라면 드로비모를 데리고 성전에도 들어갔을 것이 틀림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런 주장을 했던 것입니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이렇게 이야기하자 몰려든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그게 설사 사실이라고 해도 이방인 하나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것이 죽어야 할 정도의 죄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당시 기준으로는 그게 거의 그런 일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안뜰과 바깥뜰을 구분해 주는 장벽 위에는 로마말인 헬라어와 북아프리카 쪽에서 통용되던 라틴어로 된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표지판에는 이런 경고가 기록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곳을 넘어오는 외국인은 누구든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이 표지판은 유대인들 마음대로 붙인 것인가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사안에 대해서 만큼은 로마 당국도 그 사람에 대한 처형권을 유대인들에게 주었습니다. 물론 바울은 이방인이 아니었지만 그런 기준에서 보면 할례도 받지 않은 이방인을 성전 안뜰까지 데리고 들어간 일은 거의 현장에서 즉결처분을 해야 할 만큼 큰 일이었습니다. 


사태는 정말 급박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렇게 바울을 끌고 나간 유대인들은 정당한 재판도 하지 않은 채로 즉시 바울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르면 바울은 생명을 잃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로마군 천부장의 귀에 그 소동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는 즉시 부하들을 이끌고 현장으로 출동했고, 바울에게 쇠사슬을 채워서 일단 그들과 격리했습니다. 그리고는 거기 모인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렇지만 군중들의 이야기는 서로 하나도 일치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증거도 불분명했구요. 그래서 천부장은 바울을 영내로 데리고 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군중들은 바울을 따라오며 계속 바울을 때렸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죽이라고, 죽여야 한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는 통에 바울은 로마 병사들의 손에 들려서 그 자리를 빠져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복음 때문에, 하나님과 교회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바울의 모습을 묵상할 때면 그 위로 겹쳐지는 똑같아 보이는 그림 하나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군중들에게 당하신 일들입니다. 그 때도 예수님은 정당한 재판을 받지 못하고 공회의 정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을 거짓말로 선동하고 사주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하수인들이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거짓 선동에 휩쓸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도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증언은 서로 하나도 맞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무조건 바울을 없애라고 소리지르는 군중들의 함성마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군중들의 함성과 꼭같이 닮아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이런 이야기를 만날 때마다 우리 마음은 정말 많이 안타깝습니다. 때로 그 고난과 고통이 너무 심해 보이는 경우에는 꼭 이런 일까지 당해야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우리가 꼭 생각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일들을 직접 일어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이 그런 악역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해서 더욱 더 영광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고난과 손해를 감수하는 그 사람을 더욱 더 영광스러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구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일들에 대해서 여러 번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쟁기를 쥐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않다”, “사람들이 주인을 핍박하고 선생을 핍박한다면 종과 제자를 핍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는 말씀들이 바로 그런 말씀들이지요. 이런 말씀들은 만약 누군가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고 하면 그 사람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예수님이 감당하셨던 고난과 어려움, 손해와 오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바울이 당한 일 또한 예견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예루살렘으로 오는 중간에 하나님께서 두 번씩이나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바울에게 분명하게 알려주신 일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가 예수님을 섬기다가 그 삶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어려움들 중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십니다. 알고 계시면서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사실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내가 믿음을 따라 무언가를 선택해도, 정말 고난을 당하고 손해를 입을 각오를 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도 전혀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그것이 나에게도 유익한 일이 되고 칭찬받는 이유가 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다가 이와 반대가 되는 일이 일어날 때면 그 일이 그렇게 당황스러운 것이지요. 그렇지만, 충분히 그 일을 막아주고, 그 일 때문에 우리가 현실적으로 유익을 얻을 수 있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그 일이 그냥 우리의 손해와 아픔으로 이어지게 하시는 데는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고 또한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더욱 더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바울이 유대인들의 손에서 로마 군사들의 손으로 넘겨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해서 예언하신 것과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이 일이 하나님이 알고 계신대로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로마로 가는 첫번째 중요한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이 재판을 가이사에게 상소할 것이고, 그러면 로마로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바울은 참 쉽지 않은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서게 될 것만을 소원하였던 바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귀하고 유익한 일들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일들은 바울을 더욱 더 큰 영광으로 인도해 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곳에서 높아지려면 그만큼 더 낮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으신 분이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시니까요. 그런데, 그 분은 이 세상에 오실 때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을 뿐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로 오셔서 가장 낮은 삶을 사셨습니다. 가장 낮은 사람들을 섬기시다가 가장 낮은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그것도 죄인들을 위해서 말이지요. 그러니 하나님 나라에서 그 분보다 높아질 수 있는 분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이 원리에 따라서 높고 낮음이 결정될 것입니다. 분명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아가려고 애썼고, 그래서 자신의 삶 구석 구석에 예수님의 흔적을 남겨 놓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시각에서 보면 가장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의 누추한 삶이 우리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드러내는 통로가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 삶은 충분히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은 죄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나와 같은 사람의 보잘 것 없는 삶을 통해서 그런 영광스러운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세상이 아니라 십자가를 흉내내며 사십시다. 어쩔 수 없이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내 삶의 한 부분이라도 더 우리 주님을 세상에 보여주는 통로가 되게 하겠다는 소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내 삶이 그렇게 사용되는 영광을 얻기 위해서 살아보십시다. 우리 삶을 통해서 십자가의 영광이 빛나도록 말이지요. 물론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 가치 있는 일들 중에서 쉬운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도 수많은 희생과 어려움을 각오하며 산다면, 우리 삶이 지금 이 땅에서 더 영광스러워지고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서도 더 큰 영광을 얻는 그런 삶이 되게 하기 위해서 불편함과 어려움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 때문에, 또 하나님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어려움이나 불편함이 있습니까? 그리고 불쾌함이나 손해들이 있습니까? 바로 그것을 통해 우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져 갈 것이고,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 삶은 하나님 앞에서 더 가치있고 영광스러운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 삶을 통해서 우리 주님의 모습이 언뜻 언뜻 비쳐지기만 하여도 우리 삶은 충분히 가치있고 영광스러운 삶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우리 예수님의 삶이 닮은 것이 더 많아지게 하는 은혜와 영광을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귀한 도구가 되며,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 날, 우리의 삶이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영광을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