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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6.03.18. 금요기도회 - 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사도행전 145)




본문 : 사도행전 24장 1-9절





바울은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저 때마다 자신이 서게 되는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기만 했을 뿐, 바울은 다른 어떤 것도 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에 바울 주변의 상황은 정말 긴박하게 바뀌어 갔습니다. 오해 때문에 잡히기도 했고,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지기도 했습니다. 로마의 천부장에게서 억울하고 부당한 대접을 받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천부장의 특별한 보호를 받게 되었고, 암살 결사대 때문에 죽을 뻔하기도 했지만, 조카의 우연찮은 도움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470명이라는 대부대의 호위를 받으며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갔습니다. 바울은 그저 가만히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일만 했습니다. 그런데, 마치 온 세상에 바울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 같더니 그는 어느새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옮겨져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저는 믿는 사람들의 삶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아니 이래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스스로 정하려고 하고 그 길을 따라 가려고 애씁니다. 목적지도 자신이 정하고 거기까지 가는 일도 자기 힘으로만 하려고 합니다. 개인을 보아도 교회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정반대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하고 있으면 길은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또 가게 하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하나님을 믿고서 살아가는 삶이 청용열차를 타는 것 같아서 참 스릴 있고 재미있다고 하셨습니다. 들으면서 얼마나 공감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르락 내리락, 올라가는 것 같았는데 툭 떨어지고 떨어지는 듯하다가 다시 솟아 오르는 이런 모양의 삶을 사는 것은 스릴 있을 지는 몰라도 그 자체로 재미를 느끼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삶이 재미있게 느껴지려면 청용열차는 반드시 목적지까지 가게 되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우리의 삶이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데리고 가시려고 하시는데까지 가게 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태우신 청룡열차 위에서도 그 청용열차에 몸을 맡기고 평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고생한 바울에게 가이사랴에서 닷새 동안의 소박한 휴가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울이 떠난 후, 예루살렘에서는 그야 말로 난리가 났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 완벽한 계략까지 세워 놓았지만 갑자기 바울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천부장이 그들에게 바울을 가이사랴로 보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을 리가 없습니다. 극비리에 진행된 일이었고 가이사랴로 갔던 병사들이 되돌아 오기 전이었으니까요. 결국 어떻게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아내는데 닷새라는 시간을 허비하고서야 그들은 허겁지겁 바울을 뒤쫓아 예루살렘을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바울과 그들 사이에는 꼬박 닷새동안의 시간간격이 벌어졌고 그 동안 바울은 쉼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휴가가 끝나자 대제사장 아니니아가 다른 장로들과 함께 더둘로라는 굉장히 유능한 변호사까지 대동하고서 가이사랴에 도착했고 곧바로 바울을 고소했기 때문에 바울은 또다시 벨릭스 총독이 주제하는 법정으로 불려 나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과 인도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은 바울과 같은 삶을 예상해야만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삶 속에 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시의 쉼이 있고 나면 또 다시 자신을 대면하여 불어오는 거센 바람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런 바람 중에서 가장 센 바람은 어떤 물리적인 환경이 주는 어려움들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통해 일하시듯이 사탄도 자기 수하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정에 서자 마자 더둘로는 바울을 고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더둘로의 고발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더둘로의 짧은 발언 중에서 절반에 해당하는 내용이 벨릭스 총독을 칭찬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벨릭스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이것은 물론 당시 재판장에게서 호의를 얻기 위해 관례적으로 했던 존경의 표시라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이건 도가 지나칩니다. 게다가 더둘로가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으로 봐서 더둘로도 유대인이 분명합니다. 유대인의 입에서 로마가 파견한 총독을 이렇게 칭송한다는 것은 당시 유대인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드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일제 강점기에 일본 판사 앞에서 재판을 하면서 우리나라의 변호사나 검사가 그를 향해서 당신들 덕분에 우리나라가 이렇게 발전했고 이렇게 잘 살게 되었다고, 그런 사실은 어디서나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고 또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더둘로가 했던 말들은 과연 사실이기나 한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다 거짓말이었습니다. 다 꾸며낸 허구였습니다. 당시 기록으로 보면 그 당시 상황은 이스라엘 내부의 불만이 들끓고 있어서 구실만 있으면 터질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태평과는 거리가 먼 상태였지요. 그런데, 벨릭스는 앞을 지혜롭게 내다보는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 불안을 다스릴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유대를 다스리면서 그 지역을 이렇다하게 발전시키지도 못했습니다. 또 인성도 형편 없어서 자비로움이나 관대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더둘로의 말은 아첨이었을 뿐만 아니라 순전히 거짓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더둘로는 이런 거짓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던 것일까요? 원래 사람을 너무 허황된 거짓말로 칭찬하면 그것은 칭찬이 아니라 모독이 되는 법입니다. 그런데, 유능한 변호사였던 더둘로가 벨릭스 앞에서 그렇게 했던 것은 그가 벨릭스의 인물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벨릭스는 이런 것이 잘 통하는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벨릭스는 노예였다가 총독이 된 사람이었는데, 여전히 그는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떨쳐 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벨릭스를 구워 삶아 놓은 다음 더둘로는 본격적으로 바울에 대한 고소로 들어갑니다. 벨릭스는 그렇게 거짓말로 칭찬해 놓고서 바울에 대해서는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전염병’, ‘소요’, ‘성전을 더럽게 하는 자’… 이런 말들은 사실 로마의 파견을 받아 유대 땅을 다스리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골치 아픈 말들이었습니다. 더둘로의 말은 ‘당신이나 우리나 그저 이전처럼 하던 일이나 계속하면서 평화롭게 서로의 이익을 챙기면서 살아가려면 이 사람의 등장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그러니 당신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 이유를 불문하고 이 사람을 막아달라. 그러지 않으면 뒷 일은 책임질 수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동행했던 유대인들 또한 거기에 적극적으로 찬동하는 바람에 그런 압박은 더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연륜은 아직 별로 없지만 세상을 살펴보다가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개 무언가를 가진 사람이 그것을 지키려는 의지가 그것을 빼앗으려는 사람의 의지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빼앗으려는 사람들은 잘 몰라도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주는 유익과 달콤함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바울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소중한 것, 그들에게 현실적으로도 엄청난 유익을 안겨 주었던 것들을 빼앗으려는 사람으로 여겨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곧 자신들을 떠나고 그러면 자신들의 유익은 줄어들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정직하게 살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삶을 살아가려고 할 때, 이상하게도 그 일과 별로 상관이 없는 사람들도 그것을 굉장히 싫어하고 또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도 그렇습니다. 정작 복음을 전해 듣는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괜히 빈정됩니다. 그냥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하고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자기가 손해를 보거나 괴롭힘을 당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하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일들은 영적인 구도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거나 혹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은 사탄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놀이터를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고, 또 자기 사람을 빼앗아 가는 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사탄이라는 놈이 이 일을 그냥 넋놓고 보고만 있을 리가 없지요. 그래서, 사탄은 자기 수중에 있는 사람들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정말 황당하게도 그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 까지도 우리의 바르고 정직한 삶과 복음을 전하는 일을 방해하고 핍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막상 왜 그러느냐고 물어 보면 자기도 이유를 모르면서 말이죠. 


그런데, 사탄은 자신이 그런 식으로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자신의 임무를 잘 감당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의 선한 삶을 살고 복음을 전할 때, 그 일 때문에 자신의 이익에 직접적인 손해를 입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지켜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뿐만 아니라 거짓이든 아첨이든 아니면 협박과 압력이든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실제적인 어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다가, 혹은 복음을 전하려고 하다가 이런 악한 방해자들을 만날 때, 물론 그것이 당황스럽겠지만 그래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을까, 어떻게 믿는다는 사람들까지 저럴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생겨날 수 있겠지만, 그런 질문에만 붙들려 있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그러면 낙심과 분노만 쉽게 싸이게 됩니다. 올 것이 왔구나 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그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나 또한 무언가 지키고 이루려는 욕심이나 목적이 너무 지나치면, 저 사람들과 같은 모습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고 그들을 우리들의 거울로 사용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더둘로 같은 사람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우리의 앞길을 가로 막는 가장 대표적인 방해자들이고 장애물들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언제나 더둘로를 닮은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얻고 지키려는 욕심이 지나치게 강하거나 혹은 강해지면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 보겠지만 바울은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 손에서 가야 할 길을 계속해서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야 할 곳으로 옮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도와 교회 앞에는 항상 더둘로의 길과 바울의 길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길을 가느냐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도 우리 자신의 몫입니다. 항상 우리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믿고 가는 길을 온전히 의탁하는 우리들, 그렇게 주님께서 가게 하시는 곳까지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