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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6.04.15. 금요기도회 - 가이사께 상소하노라(사도행전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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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25장 1-12절




바울이 가이사랴로 내려온 지 벌써 2년이 훨씬 지났습니다. 그 동안 벨릭스는 탄핵을 당해서 자리에서 물러났고, 베스도라는 사람이 유대의 총독으로 부임해 왔습니다. 삼일이 지나자 베스도는 의례 그렇듯이 유대의 지도자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갔습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는 서로 눈치를 보면서 서로 서로 좋은 이야기나 하면서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미우나 고우나 한 배를 타고 가야 하니까요. 그런데, 부임한 지 삼일 만에 인사차 들른 베스도에게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과 유대의 지도자들은 다짜고짜 바울을 고소합니다.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와서 재판을 받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물론 진짜 속내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요청이 받아들여져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이송하게 되면, 그 중간에서 암살을 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사실 베스도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안면도 없는 상태에서 다짜고짜 바울을 고소하고 나서는 유대인들을 무례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요구를 그저 무시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 유대에 새로 부임한 총독으로써 유대의 최고 지도자들에게서 받는 첫번째 요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스도는 선뜻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해 줄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처음 부임한 총독으로써 로마의 정식 시민인 바울을 함부로 다루었다는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고, 만약 이 사실이 로마 당국에라도 알려지게 된다면 그 일에 대해서 추궁을 받게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스도는 약간의 꾀를 냅니다. 그 일은 내가 잘 알고 있으니, 또 내가 이제 곧 가이사랴로 돌아갈 계획이니 나와 함께 동행해서 거기서 바울을 고소하라고 말이지요. 결국 유대인들도 베스도의 수정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 또한 처음 만나는 베스도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살 수는 없는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유대인들의 집요함을 보게 됩니다. 세상에 2년이나 넘는 세월이 지났고, 그 동안 예루살렘에서는 바울에 관한 그 어떤 일들도 일어나지 않았고, 또 그 동안 바울은 가이사랴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일도 전혀 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한 시도 바울을 잊지 않고 있었고, 어떻게든 기회가 오면 바울을 제거해 버리겠다고 별르고 또 별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신임총독이 부임해 오자 긴급회의를 열었겠지요. 신임총독이 인사차 들르면, 그런 입장을 이용해서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을 하고, 또 그렇게 바울을 없애버리자고 말입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악한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단면입니다. 악한 사람들은 생각보다 굉장히 집요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악한 목적을 잊어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는데는 굉장히 지혜롭습니다.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을 모두, 그리고 철저하게 이용합니다. 물론 악한 사람들에게는 대개 교만이라는 그들의 눈을 멀게 하는 약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이익을 지켜내고 목적을 이루는데는 굉장히 치밀합니다. 물론 우리가 온 세상 사람들 모두를 이런 의심과 경계의 눈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런 사람들은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고 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할 때,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자기도 모르게 사탄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많은 경우 이런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하고, 그저 순진하게 생각하고 만만하게 대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그들의 수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희생자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동조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수해야 하지만 순진해서는 안됩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불편한 밀월을 끝낸 베스도는 유대 지도자들과 함께 가이사랴로 돌아왔습니다. 아마 베스도도 굉장히 귀찮았던 것 같습니다. 바로 그 다음 날 재판을 열고 바울을 불러냈으니까요. 그 자리에서는 2년 전에 벌어졌던 일과 똑같은 일이 한 번 더 반복되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유대인들의 고소가 훨씬 더 많아지고 그들이 주장하는 죄가 훨씬 더 부풀려져 있었다는 것만 달랐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같았습니다. 아무리 고소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고소의 내용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재판은 그렇게 해서 다시 한 번 바울의 무죄만 입증해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모름지기 성도의 삶이란 이래야 합니다. 털면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다고 하지만 성도는 털어도 먼지 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하고, 최소한 그렇게 살기 위해서 조심하고 애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소명을 이루는데 있어서도 심각한 방해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거짓 고소가 다 끝나자 바울은 당당하게 말합니다.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이것은 과정을 지켜보던 베스도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동시에 바울을 불법적으로 다루는 일도 할 수 없었구요. 그래서 베스도는 이 모든 일들에 대한 선택권을 바울에게 주는 척 합니다.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넌지시 자신도 갈테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도 드러냈지요. 


그런데, 바울의 입에서는 예상할 수 없었던 이야기가 흘러 나왔습니다.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판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는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 줄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이제까지 유대인들이 다 들고 일어나서 이런 저런 죄목들을 나열했지만 그들 앞에서 혐의가 입증된 것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율법에 관한 한 아무런 잘못도 저지른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제 베스도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과연 바울이 로마의 법을 어겼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바울은 이 점에 있어서도 거리낄 것이 없었습니다. 이미 이것도 분명히 드러난 상태였지요. 그런데, 바울은 그 때 갑자기 로마 황제에게 상소합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면 이런 뜻입니다. ‘나는 로마시민이다. 로마시민이 로마 법을 어긴 일로 재판을 받는 일은 유대인들 앞에서 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내 권리를 사용하겠다. 이 일에 대한 재판을 황제께 상소하겠다’ 당시 로마시민들에게는 공식적으로 로마 황제에게 상소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했을 때는 그 누구도 그 재판에 참견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권리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끝난 재판을 또 받겠다고 나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바울이 여기서 재판을 끝내려고 했다면 끝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 법을 어긴 일이 없다는 사실도 이미 분명해진 상태였으니까요. 그렇다면, 왜 바울은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요? 바울은 2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갇혀 있으면서 자신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까 많이 생각하고 또 하나님께 여쭙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로마의 황제에게 자신의 일을 상소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로마 법상으로도 아무런 죄가 없으니까 또 자기가 로마시민이니까 재판을 받게 되어도 풀려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풀려나는 순간 자신은 또 다시 유대인들의 표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석방과 관련해서 어떤 재판이나 그 비슷한 것이라도 열리게 되면 자신은 황제에게 상소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비록 죄인의 신분이 되기는 해도 무사히 로마병사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로마로 갈 수 있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신은 안전할 것이고 유대인들은 쓸데 없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로마는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알려주신 바울의 소명이 이루어지는 소명의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로 가는 일만을 생각했고 그리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소명을 한 시도 잊지 않았고, 물론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리로 보내주실 것을 믿고 있었지만, 그 자신도 그리고 가는 최선의 방법을 찾기 위해서 기도했고 또 움직였던 것입니다.  


바울을 곤경에 몰아 넣었고 2년이 넘는 세월을 죄수 아닌 죄수가 되어 갇혀 있게 만든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복음전도자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는 어디를 가나 그것만 생각하고 그 일만 했습니다. 그렇게 맡기신 하나님의 일을 버리지 못해서 그렇게나 어려운 일들을 많이 당했지요. 그렇지만 그가 그런 곤경에 처했을 때, 그를 그 자리에서 빠져나오게 해 준 것 또한 그의 소명이었습니다. 그가 그 소명을 붙들고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한 삶을 살았을 때, 그것이 길이 되고 열쇠가 되어서 그를 풀어주고 인도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소명이 가지고 있는 신비한 능력입니다. 


우리가 소명을 따라 살아도, 그렇지 않아도 우리 삶의 어려움은 있게 마련입니다. 소명을 따라서 살아간다고 해서 항상 어려운 길을 가는 것도 아니고, 소명과 상관 없이 살아간다고 해서 항상 쉬운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이래도 저래도 피할 수 없는 어려움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사탄은 마치 우리가 소명을 따라 살지 않으면 하고 싶은대로 하고 편하게만 살 수 있을 것같은 생각을 하게 하지만 그것은 속임수이지 진실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이 당하는 일이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면 그 일이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훨씬 더 쉽게 견디어 내고, 기뻐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명을 따라 살아가 어려움을 당하면 그 어려움은 이유 없이, 목적 없이 살다가 당하는 어려움보다 훨씬 더 쉽게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 소명을 따라 살다가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그것도 소명의 일부이고, 또 그저 소명을 이루는 과정에서 거쳐야 하는 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소명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소명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를 보호하시고 건져 주십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들이 달려 들어도 그 영혼을 지켜 주시고 그 길을 가게 해 주십니다.  


소명은 어쩌면 무거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소명을 중심으로 해서 살아가는 것은 참 지혜롭고 확실한 삶의 방법입니다. 내가 소명을 붙들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 소명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며, 그 소명이 이루어질 때까지 나를 지켜주시고 건져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소명이 어떤 것이든지, 혹시 힘들고 무겁게 여겨져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소명을 붙들고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소명을 이루어 가면서 그 소명이 주는 풍성한 유익도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항상 소명을 붙들고 살아감으로써 그 소명이 붙들어 주는 든든하고 은혜로운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