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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6.04.20.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다니엘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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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6년 4월 20일 수요일





다니엘서는 아마도 성경에서 가장 사랑받는 책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성도들에게 굉장히 익숙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너무 익숙해지면 별로 새로울 것도 감동스러울 것도 없어집니다. 그래 그렇구나 하고 그냥 슥 보고 지나가는 정도로 끝나지요. 그런데, 다니엘서의 앞부분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읽고 읽고 또 읽을 때마다 성도들을 흥분시키곤 합니다. 마치 굉장한 이야기를 처음 만나는 것처럼 말이지요. 특히 신앙이 느슨해지고 시험에 들 때, 다니엘서를 읽으면 정말 정신이 번쩍 들면서 참 신앙이 얼마나 놀라운 힘과 능력을 지니는 것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어제도 말씀 드렸지만 다니엘서는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포함되어 있던 네 명의 소년에게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참 좋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신앙적으로 가장 큰 시험이 될 수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약관의 나이였던 네 소년이 홀홀단신 바벨론의 관료들과 왕 앞에서 벌인 신앙의 무용담은 성경의 그 어떤 곳에 나오는 신앙의 위인들의 이야기보다 훨씬 더 당당하고 감동적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이 이야기들 속에서 결말 부분, 그러니까 이 소년들이 어떻게 했더니 하나님이 어떻게 해 주셨다는 이야기가 빠져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럼 이 이야기는 실패한 이야기가 될까 하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이 네 소년들이 신앙적인 결단을 내린 후에 오히려 이 소년들에게 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이야기는 가장 큰 승리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장 많이 닮은 이야기가 될테니까요. 신앙적이고 영적인 승리는 우리가 신앙과 하나님을 위한 결단을 내린 후에 찾아오는 해피엔딩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영적인 승리는 이미 우리가 내린 신앙적인 결단과 그 결단을 따른 행동에 있습니다. 그 뒤의 이야기는 승리를 결정하는 요소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다니엘을 제외한 세 사람,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에게 일어났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옛날의 많은 왕들이 그랬듯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자기 힘이 강해지자 자신의 힘을 더 확실하게 과시하기 위해서 자신의 커다란 동상을 세웁니다. 그리고는 거기 절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풀무불에 던져 넣어버리겠다고 공포했습니다. 너나 할 것이 없이 좋으나 싫으나 목숨은 하나니까 그까짓 절 한 번 하는 일에 낭비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시간에 맞춰서 왕의 동상을 향해서 절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러지 않아도 이들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던 갈데아 사람들이 고발을 했습니다. 왕은 유대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마음대로 우상숭배를 하는 다른 민족들과는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그래서 세 사람을 달랬습니다. 그러지 말고 절 한 번 하고 목숨을 건지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나오는 왕에게 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이건 정말 충격적인 말입니다. 설명이나 양해를 구하는 말이 아니라 아예 통보였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원래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어떤 모양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이 세 사람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은 이미 절대적인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께서 풀무불 속에서도 건져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거기 들어가겠다고 말합니다. 세 사람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습니까? 풀무불 속에 들어가도 건져 주실 수 있는 능력있는 분으로 믿고 있습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불 가운데 들어가서 살아 나오다니요. 그런데,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정말 하나님답게 믿고 있다는 뜻입니다. 저 자신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그렇게 믿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웠지만 또 기도제목도 얻었습니다. 그 동안 분명히 믿음에 많은 성장이 있었지만 이제는 이렇게 믿는 믿음을 위해서 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엄청나지만 두번째 부분이 더 엄청납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상에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참된 믿음이란 이런 것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절대적으로 신뢰합니다. 용광로에 들어가도 살려 주실 수 있는 분, 살려주실 분으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닙니다. 그러지 않아도 뜻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선 하나님을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이겠지만 나를 죽게 내버려 두시더라도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고 내가 그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 사람은 그것을 자기 목숨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대개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분이시고 나에게 어떻게 해 주시는 분이신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것만 확실히 믿어도 상당히 좋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개는 그 하나님도 확실히 믿지 못하니까요. 그렇지만 이런 믿음은 아무리 믿어도 ‘나’라는 틀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당연한 것이 하나님도 ‘나’를 위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도 교회도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갈 때만 기분 좋아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항상 얼굴이 불편해 집니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다 알아도 좀처럼 그리로 움직여 가지 않고 고집을 부립니다. 


우리가 우리 목숨까지 내놓을 수는 없을지 몰라도,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해 주시든지 내가 하나님 앞에서 보여야 할 태도와 모습은 소중히 여기며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바른 길에서 벗어나면 빨리 제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입술과 삶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참 쉽지 않습니다. 저에게도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말씀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우리 믿음이 거기까지 가야 진짜 믿는 것 답게 믿는 믿음이고, 그저 하나님을 이용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이 된다고 말입니다. 물론 우리 믿음이 항상 100퍼센트 그런 믿음으로만 순수하게 유지될 수는 없을지라도 매일 매일, 크고 작은 일 속에서 내 마음대로 안 되도, 내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시는 대로 움직이지 않으셔도 그래도 마음과 얼굴이 달라지지 않고 평안함과 담대함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그런 믿음, 그런 자리로 되돌아가려고 끊임 없이 자신과 싸우는 그런 믿음이 바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여기에 이르면,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왕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하늘의 왕을 섬기는 사람들 답게 담대하고 당당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말이지요. 


항상 적당한 믿음이 아니라 이렇게 영광스럽고, 이렇게 자유로운 믿음, 이렇게 대단한 믿음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 믿음을 맛보아 알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이 세상 전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귀한 믿음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