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에베소서 4장 7-12절
저희 어머니는 저희 형제들이 자라나는 동안 단 한 번도 삐지는 것을 보여주신 적이 없으십니다. 아버지가 무엇을 잘못해도, 저희가 무엇을 서운하게 해도 화를 낼 지언정 삐지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여전히 누가 삐지면, 특히 여자분들이 그런 모습을 보이면 익숙하지가 않은데요. 그러던 저희 어머니도 제가 결혼을 하고 나서 한 번 크게 삐지신 적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한 동안 말을 하지 않는데 제가 얼마나 당황스럽고 곤란했는지 모릅니다. 나중에 어렵게 이유를 알고 보니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저희 부부에게 분명히 어떤 중요한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저희가 그것을 고려하지 않고서 전혀 다른 결정을 내 버렸다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저를 보면서 저게 결혼하더니 엄마를 무시한다고 생각하셨고 그래서 그렇게 삐지셨던 것이지요. 그저 아들하고만 관련된 문제 같으면 저에게 화를 내고 말텐데, 갓 들어온 며느리까지 개입되었다고 생각하니 쉽게 말을 꺼내기도 힘드셨던 것 같습니다. 물론 분명히 저희 어머니는 그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결단코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끝까지 오해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시간이 흘러 기억에서 지워져서 없는 일처럼 될 수 있었지만 그 당시 갓 결혼한 저로서는 참 많이 난처했습니다.
분명히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주었다고 하는데, 나는 받은 적이 없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데, 나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정말 답답하고 난감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서도 드물지 않게 일어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미 성도들에게 주셨다고 하는 복과 은혜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가짓수만 많을 뿐만 아니라 크기도 대단합니다. 그래서 읽을 때는 참 좋습니다. 정말 은혜롭습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이지요? 하나님은 주셨다고 하는데, 내 손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모든 복과 은혜들이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게 복된 말씀들과 지금 나의 삶은 거리가 멀어도 너무나 멉니다. 이런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면 우리는 결국 성경이 말하는 은혜나 복에 대해서 별로 큰 기대를 걸지 않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성경에서 만나는 복되고 은혜로운 모든 말씀들의 전부가 모든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은 직접 그 말씀을 들었던 개인이나 혹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습니다. 그저 성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무차별적으로 그 대상이 되는 말씀들도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말씀같은 말씀들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만이 가질 수 있는 ‘권위와 능력’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게는 그런 게 없습니다. 아무리 살펴 보아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권세가 없습니다. 그냥 넘어가 보려고 하지만 뭔가 개운치가 않습니다. ‘나는 그런 권세가 없다. 그러면 혹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함도 생겨납니다. 제가 예전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참 혼란스럽고 힘이 들기도 했습니다.
성경이 이미 어떤 은혜를 주었다고 말하는데 나는 받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둘 사이에 있는 이 큰 간격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왜 이런 간격이 생겨나는가?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묵상해 보았습니다. 일단 분명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지는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주셨으니까 주셨다고 하신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문제를 풀기 위한 실마리는 그 은혜를 받은 내 쪽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말씀은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도 거짓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셨다고 하는 은혜가 있다면, 그런데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 은혜는 나도 받았다고 믿어야 합니다. 거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주셨다고 하면 그 때부터 호주머니를 뒤집니다. 이 주머니, 저 주머니 다 뒤져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없는데요? 정말 주신 거 맞나요?” 그리고는 그 은혜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도 말이지요. 그래서 심한 경우에는 평생 그 은혜와 복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들 중에 “…했다고 치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렇지 않지만 그렇다고 여기고서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는 뜻인데요. 저는 우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복과 은혜들, 적어도 성도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졌다고 분명하게 말해주는 것들에 대해서는 이런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주지 않았는데, 주셨다고 가정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셨다고 하셨으니까 비록 나는 지금 당장 그 은혜를 확인할 수 없지만 그 은혜가 이미 나에게 있다는 전제를 깔고서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손은 우리의 믿음 밖에 없으니까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라는 손이 있어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믿음의 눈이 있어야 주신 은혜를 알아볼 수 있으니까요.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한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하는 그 은혜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래서 그 은혜 아래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도 사실은 그런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7절을 한 번 함께 읽어볼까요?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은혜를 주셨다’고 말하고 ‘그래서 그 은혜가 이미 너희 손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뭉뚱그려서 도매금으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각자에게 은혜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자, 그러면 이제 우리는 확인해 봐야지요? 이미 주신 은혜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그게 확인되십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고 애매하신가요?
제가 주일 저녁에 한 번씩 교회에서 그 날 배출한 쓰레기들을 볼 때가 있는데요. 볼 때마다 깜짝 놀랍니다. 정말 저 많은 쓰레기가 우리 교회 식구들이 한 나절을 함께 보내면서 내보낸게 맞나 싶어서 말이지요.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정말 많은 것 같습니다. 버린 것만 그만큼이니 우리가 사용한 것은 얼마나 더 많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정말 엄청납니다. 게다가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 살아갑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역할이 있고, 그 역할을 해내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특별한 것들이 또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에게는 우리가 생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필요한 것과 더불어 성도와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서 특별하게 필요한 것이 모두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중의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면 이 모든 것을 채워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켜 주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의 몸이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 이 모든 필요들을 공급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들이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인생의 스토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복하게 살아온 분들도 있을 것이고, 정말 두 번 다시 돌아가서 살고 싶지 않을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운 세월을 지내오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왔든지 우리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 모두의 실제적인 필요들을 채워주셨고, 영혼까지 돌봐 주셔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으며,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이미 우리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덕분에 살아왔고 또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거꾸로 표현하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우리는 절대로 지금과 같은 그래도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었다는 뜻이 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구요. 그리고 우리가 우리 하나님이 절대로 변덕을 부리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안해서 우리의 앞날을 예측해 보면, 우리의 앞날 또한 그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도 그렇게 우리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은혜’로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믿습니까? 참 은혜롭지요? 이런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 그리고 이런 은혜를 아는 우리들은 정말 행복한 사람들이지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여기까지만 생각할 수 있어도 우리가 얼마나 복되고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는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결정되고 우리에게 주어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성도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 분은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신 분이셨는데요. 마치 자신이 하나님을 다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하나님은 상식적인 분이시잖아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상식적인 분이십니까? 사람들이 ‘상식적’이라고 말하는 그 정도의 낮은 기준에 묶여 있는 분이십니까? 사람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입니다. 아닌 것 같지만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생각할 때도 자기 수준에서 생각하고 또 이해하려고 합니다. 내가 그러니까, 사람이 그러니까 하나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정말로 신뢰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수준이 사람들과 비슷하고 또 사람들처럼 움직인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싶어도 불안해서 못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와 너무나 다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시든 그 기준에 따라 움직이십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그 때 그 때 오늘은 이만큼이다, 내일은 저만큼이다 이렇게 대충 땅콩 한 주먹 집어 주듯이 우리에게 그렇게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계시고 그 기준에 따라 은혜를 주십니다.
다시 7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은혜를 주실 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주십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라는 선물을 기준으로 삼고서’ 은혜를 주십니다. 무슨 은혜를 주시든지 그렇게 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말 많은 것들, 그리고 좋은 것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렇지요?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좋은 선물들로 채워져 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렇게 많은 선물들 중에서 가장 귀하고 좋은 선물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들 중에서 가장 귀하고 좋은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이 선물을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더 좋은 선물이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더 귀한 선물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외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의 생명을 하나님을 거역하고 믿지 않는 원수된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서 선물로 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입니다. 기준이 높으면 그만큼 행동도 수준이 높아지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물”을 기준으로 결정되는 우리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수준으로 주어질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 인색한 마음으로 은혜를 주실까요? 아까워 하면서 마지 못해 내 주시는 은혜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과 신앙을 떠 받치고 채워주기에 부족한 경우가 있을까요?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말씀은 바울이 들려주는 자신이 당한 고난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정말 한 사람의 인생이 감당해야 했던 고난치고는 너무나 크고 종류도 다양합니다. 횟수도 정말 많구요. 그런데 바울은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 냈습니다. 그의 고백대로 하면 넉넉히 이겨냈습니다. 바울이 이런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부어주신 은혜 덕분이었습니다. 그 은혜가 부족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너무 넉넉하고 충분했기 때문에 그는 살고 견디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자신의 거듭되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는 그저 부족함이 없는 정도가 아니고 모든 상황 속에서 그 모든 상황을 넉넉히 이기게 해 줄만큼 크고 풍성하다는 것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러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셨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잘 알고 있었고 또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 말씀인데요. 그는 하나님의 완전하고 풍성한 은혜를 의심하는 로마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건, 그것이 아무리 귀하고 드문 것이라고 해도, 심지어는 이 세상 전부라고 해도 그것은 예수님과 비교하면 하나님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수님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끼는 것이 있으시겠습니까? 부족하게 주시거나 인색하게 주시는 것이 있으시겠습니까? 아들을 주셨다는 것, 그것은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할 때 떠올려야 할 은혜는 바로 이런 은혜입니다.
더 은혜로운 말씀이 고린도 후서 1장 19절과 20절에도 있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이 구절의 메세지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예스”라는 것입니다. 예스는 거절이나 부정이 아니라 허락과 긍정입니다. 이 “예”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 “아멘”이라는 말인데, 이 아멘은 아주 적극적이고 강한 긍정을 표시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기도 끝에도 ‘아멘’하고, 설교를 듣다가도 ‘아멘’하는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 말로 격하게 동의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예스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백지수표 위에 찍힌 하나님의 인감도장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할렐루야! 여러분, 이 말씀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이미 백지수표 위에 하나님의 영원한 인감도장이 찍혔습니다. 이 수표는 그 어떤 것으로도 바뀔 수 있습니다. 양식이 될 수도 있고, 옷이 될 수도 있고, 돈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될 수도 있고, 위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기쁨이 될 수도 있고, 소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꼭 필요할 때는 그렇게 꼭 필요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그 위에다 우리의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도장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아멘!”입니다. 하나님의 아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 위에 우리의 아멘을 더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성경말씀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말씀이 우리 삶 속에서 경험되고 확인될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평생 그 말씀의 주인공이 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일단 성경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줄 믿고 아직은 그 은혜가 확인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 은혜가 내게 있다고 ‘치고’, 내가 그 은혜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 위에서 살아가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 말씀에 대해서 진심으로, 그리고 기쁘게 ‘아멘!’이라고 외치며 살 때, 그 복과 은혜가 우리 삶으로 흘러들어 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과 은혜가 가지고 있는 신비입니다.
분명히 우리의 믿음은 완전해 질 수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많이 흔들리고 깨질 때도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으로 계속해서 우리를 설득해 가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설득하고 또 설득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연습을 계속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안 받았다고 삐지시면 안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섭섭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 사람들 각자에게 부족함 없이 풍성한 은혜를 이미 주셨습니다. 믿습니까? 내일 부터는 내가 이미 이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믿고, 그렇다면 그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써 어떤 삶을 살며,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넉넉하고 너그러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그 생각에 따라 살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확인하며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다가오는 한 주간이 우리 각자에게 나눠주신 그 풍성하고 부족함이 없는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풍성하고 능력있는 한 주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항상 부족하다고 없다고 하지 않고, 이미 넉넉하고 풍성한 은혜를 주셨음을 믿고, 그 은혜에 어울리는 풍성하고 너그러운 인생을 살게 하소서.
- 하나님의 아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내 삶의 모든 것에 대해서 기쁘게 아멘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그 풍성함을 누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