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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6.06.10.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마태복음 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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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6년 6월 10일 금요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위해서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오기로 약속되어 있던 엘리야가 되어서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려놓고 하나님의 마음을 백성들에게 돌려 놓는 역할을 했으니까요. 실제로 예수님께서 처음 외치신 하나님 나라 복음은 세례 요한이 외쳤던 메시지와 글자까지 똑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위한 다리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세례 요한을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중에서 세례 요한 보다 큰 자가 없다고 하셨을 정도로 그는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온전히 헌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일은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인생과 목숨을 온전히 드려야 하는 엄청난 헌신이 필요한 그런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옥에 갇히게 된 세례 요한은 마지막으로 무대의 뒤켠으로 사라져 가기 전에 예수님이 오시기로 되어 있던 메시야가 맞는지 확신을 얻고 싶어했습니다. 아무래도 사람의 생각과 판단을 믿을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님이 자신이 기다리던 메시야가 맞는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그렇다고 말씀하셨고, 덧붙여서 예수님 때문에 실족하지 않은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세례 요한에 대한 질문을 던지시는데요. 이것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메시야가 맞는지 확인하려고 했다고 해서 사람들이 요한을 오해하고 무시할 수 있다고 보셨기 때문에 해 주신 말씀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그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물론이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려는 사람들을 너무도 중요한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향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첫번째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갔느냐고 물으셨고, 두번째는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려고 갔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무리들은 갈대나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려고 광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 그러니까 선지자를 보려고 나갔었지요. 예수님께서도 그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선지자를 보려고 나간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시면서 스스로 그 질문들에 대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인 즉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 그러니까 선지자를 만나려고 광야로 나갔습니다. 세례 요한을 만나려고 간 것지요. 그것이 그들이 광야로 나간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고, 마지막에는 그들에게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광야에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 나라를 소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복을 움켜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처음에 광야로 나갈 때 가지고 있었던 목적에서 벗어나 길을 잃은 셈입니다. 


처음부터 이유나 목적이 없이 광야에 나가는 것도 문제이지만, 광야에 나간 후에 그 이유와 목적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선지자를 보러 나갔으면 선지자만 보면 됩니다. 그 사람의 메세지만 듣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선지자를 보러 나가서 선지자를 보지만 그의 메세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지 않습니다. 이러쿵 저러쿵 평가를 하고 말을 더했지만 말이지요. 길을 잃은 것입니다. 다른 것만 본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왜 바른 목적을 가지고 광야로 나간 사람들이 결국에는 길을 잃고 아무런 소득도 없이 마음 속에 잔뜩 불만과 교만함만을 지닌 채로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게 된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미 마음 속에 자기 자신이 가득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세대 사람들을 표현하면서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함께 울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보고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다고 귀신이 들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대였습니다. 먹고 마셨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들어오셨으니 잔치를 벌이셨던 것이지요. 그랬더니 사람들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 그러니까 세속적인 사람으로 치부해 버렸습니다. 이런 식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을 완전히 거부해 버린 것입니다. 이 사람들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기로 약속되어 있는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보려고 광야까지 나갔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그들의 마음 속에는 자기 자신 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기준, 자기 의, 자기만족….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살았던 대표적인 도시가 바로 고라신과 벳새다, 그리고 가버나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의 운명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많이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은혜는 그런 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은혜는 언제나 낮은 마음, 자기가 깨어진 마음, 그저 하나님만 바라보는 그런 마음에 임하는 것이니까요.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아무런 전제 없이 그저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하나님 나라는 그의 것이 되니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세상에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자기 기준, 자기 생각, 자기 노력, 자기 능력을 고집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짐을 대신 져줄 사람을 만났는데도 여전히 자신이 그 짐을 지고 가는 것이고, 그 짐을 점점 더 무겁게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어리석은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쉼을 얻게 해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예수를 만난 사람들, 제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점점 더 그 짐이 가벼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점점 더 가볍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광야에서 예수님을 보아야 하며, 계속해서 예수님만 보아야 합니다. 일단 믿음의 광야로 나갔으면 더 이상은 ‘나’를 고집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길을 잃고 해매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얻고 자유를 얻는 대신에 오히려 실족하게 될 수 있습니다. 


항상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라고 물으시는 우리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주님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은혜를 놓치지 않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