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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에베소서 5장 18절-21절
설교주제 : 성령충만한 성도가 시대를 구속한다.
- 들어가는 말
오늘 말씀을 살피기 전에 잠시 지난 주일에 배웠던 내용을 되짚어 볼까요? 우리가 지난 주일에 배웠던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대속하는 일을 맡기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자신의 삶을 잘 살피는 태도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구요. 오늘 함께 살필 말씀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살피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이 악한 시대를 구속해서 하나님께 되돌려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야 악한 시대로 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낼 수 있고 바른 방법으로 이 시대를 구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충만해야만 이 시대를 구속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전제 : 성도는 술 취하지 말고 성령충만해야 한다.
그래서 오늘 바울이 본문에서 전제로 삼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는 술 취하면 안되고 성령충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성도가 술에 취하면 안된다고 말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술 취하는 것은 방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방탕한 것이 무엇일까요? 방탕한 것은 바르지 않고 무분별한 방법으로 기쁨과 만족을 찾는 행동을 말합니다. 술에 취하는 것은 바로 그런 행동들 중에서 대표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사려 깊고 지혜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살피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성도들이라면 그런 사람들에게 방탕함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술에 취해서도 안되고 술에 취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지만, 그 다음에는 술이 술을 마시고 결국에는 술이 사람을 마신다고 말이지요. 마지막 삼단계가 되면 이제 그 사람은 완전히 술독에 빠진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상태가 이렇게 되면 사람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그 때부터는 술의 통제와 지배를 받게 됩니다. 자기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15분이면 끝날 이야기를 3시간 동안 계속하구요. 자기가 잘 가고 있는데 갑자기 땅이 벌떡 일어나서 덤벼들었다고 소리를 지르지 않나, 전봇대에 넥타이 걸어놓고, 그 아래 신발 벗어 가지런히 놓고 누워서 얌전히 잠을 청하지 않나, 울다가 웃다가, 착해졌다 못되졌다… 그렇게 점잖던 양반이 술만 먹으면 갑자기 동네 견공들과 비슷한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모두 다 술에 취하게 되면, 술이 사람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렇게 보면 성령으로 충만해 지는 것은 술에 취하는 것과 비슷한 점이 참 많습니다. 술에 취하면 술로 가득 차게 됩니다. 술 안에 들어가게 되지요. 그렇게 해서 술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 지는 것도 비슷합니다. 성령충만해지면 성령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성령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그 때부터 성령의 지배와 통제를 받게 됩니다. 기꺼이 성령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됩니다. 마치 술 취한 사람이 술에게 순종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성령충만의 진짜 의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령충만함이란 성령님의 지배와 통제를 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저 술 하나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술에 취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성령충만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우리들을 취하게 만드는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돈, 명예, 성공, 사람들의 칭찬이나 인정, 편안함과 안락함 그리고 심지어는 우리의 자녀나 우리 자신의 자아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이 세상에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이 우리를 취하게 만듭니다. 우리를 자기 손안에 넣고 자기 마음대로 휘두릅니다. 물론 이런 것들 중에는 악하지 않은 것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 취해 살아도 괜찮을 것같아 보이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에 취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 삶의 방향이 없어지게 되고, 우리의 삶은 마치 술 취한 사람의 걸음걸이처럼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방향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분명한 방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디를 향해 가는 사람들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요?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대속해서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것에 취하면 안됩니다. 이 시대에 취하고, 이 세상에 취하면 안됩니다. 그대신 우리는 성령님으로 충만해 져야 합니다. 성령님께 취해야 합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해 져서, 성령님께서 다스리시는 삶을 살 때, 우리 개인의 삶은 방향이 분명해 질 수 있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그 귀한 일을 감당해 낼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해야 이 시대에 취하지 않고 이 시대를 대속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 그러니 꼭 성령충만해라!’ 이것이 오늘 본문말씀의 핵심입니다. 이 핵심을 꼭 붙들고서 다음 구절들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바울이 그 다음부터 6장 마지막까지 이야기 하는 것은 바로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들의 모습이고, 그들이 시대를 구속하며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18절부터 이 이야기를 풀어갈 때, 그 이야기를 교회 안에서의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구속하려면 성령충해야 한다고 말하다가 갑자기 성도들의 교회생활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이 조금 이상할 수도 있는데요. 사실 성경은 항상 이런 차례로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무엇을 이야기하든지 교회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 개인의 삶으로, 그리고 사회생활로… 그렇게 넘어갑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바깥에서도 샌다는 말이 있는데요. 똑같은 이치입니다. 교회에서 누리지 못하면 교회 바깥에서도 누리지 못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지 못하면, 교회 바깥에서도 하지 못합니다. 교회 안에서 훈련되지 않으면 교회 바깥에서 행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삶을 바라보는 성경의 시각입니다. 성경은 성도의 삶에 있어서 교회의 위치를 거의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를 수 있는데요. 어쩌면 그래서 우리가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힘있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우리가 교회를 바라보는 눈부터 성경적으로 바꿔야 할지도 모릅니다.
3. 성령충만한 성도는 서로 화답하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렇다면 성령충만한 성도, 성령충만함을 바라는 성도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어떤 삶을 살까요? 첫째로, 그런 성도들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바울은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는 모두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배 때마다 함께 불렀던 찬송의 종류들입니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노래들로 가득 찬 찬양의 잔치였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바울은 그런 찬양들로 서로 화답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찬양을 주고 받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쪽에서 노래하면 저 쪽에서 노래하고, 또 저 쪽에서 찬양하면 이 쪽에서 받아서 찬양하고…. 돌림노래를 부르라는 이야기 같지만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찬양을 단순히 모여서 부르기는 하지만 혼자 부르는 노래가 되게 하지 말고, 서로 서로 하나님을 중심으로 교제하고 나누는 도구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성도들, 세상에서 자신들이 사는 시대를 대속하기 위해서 분투하며 사는 성도들에게는 함께 공감하고 나눌 수 있는 경험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에 대한 경험입니다. 자신은 그 일에 성공했을 수도 있고, 실패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과정 중에서 항상 일하고 계시지요. 성령충만한 성도들은 그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해서 할 이야기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곳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이 넘쳐 납니다. 그런데,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하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데 사용합니다. 굳이 곡조에 실려 있지 않더라도 이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을 높이면, 저 사람은 그 이야기를 받아 또 다른 이야기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는 이런 찬양들이 풍성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것에서 기쁨을 찾습니다.
사실 혼자서 성령충만하고 혼자서 자신의 시대를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기 위해서 분투하며 산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금새 지치고 금새 낙심하게 됩니다. 그럴 때, 옆에 있는 성도가 자신의 삶 속에서 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다시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다시 성령충만해 지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은 다분히 각개전투입니다. 그저 각자가 알아서 합니다. 교회에 와서도 예배는 함께 드리지만 자신의 삶 속에서 있었던 신앙적인 분투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습니다. 그 안에서 함께 하시고 일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찬양도 거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잘잘못을 떠나 너무나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만약 이런 모습 때문에 우리에게서 찬양이 사라지고, 그래서 성령충만함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이라도 빼앗기게 된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손해입니까?
사실 저는 제 마음 속에 항상 그런 교회를 꿈꿔 왔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올 때, 한 주간 그렇게 살았던 삶의 이야기와 자신의 삶 속에서 일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는 성도들의 교회, 그래서 함께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화답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그런 기쁨이 넘치는 교회, 그래서 다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갈 힘을 얻고, 힘차게 삶의 자리로 되돌아 가는 그런 성도들의 교회를 꿈꿔 왔고 지금도 그 꿈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많이 듣고 싶습니다. ‘목사님, 저 다음 주에 이런 저런 일이 있는데, 제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선택을 하도록 기도해 주세요.’라고 하는 이야기, ‘목사님, 기뻐해 주세요. 제가 주간에 힘들 것을 각오하고 하나님께 순종했더니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주셨네요.’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끼리도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 모습을 자주 보고 싶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 기도해 주고, 서로 화답하는 그런 모습을 정말 많이 보고 싶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서 제 이야기에 조금이라도 마음이 움직이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용기를 좀 내 주십시오. 한 주간 여러분 삶을 살피시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통해 하신 일들을 하나만 기억해 놓으셨다가 주일에 오셔서 다른 한 분과 나눠보시기 바랍니다. 또 다음 주간에 여러분이 신앙적으로 결단을 내려야 할 일이나, 혹은 특별히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을 때, 저나 그 누구나 한 분 붙들고 기도를 부탁해 주십시오. 그리고, 혹시 여러분 중에서 누구라도 그런 이야기를 들으시거든 미국사람이 영어로 말 걸어온 것처럼 당황하지 마시고 그러냐고 맞장구 쳐 주시고,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높여 드리십시오. 기도를 부탁받으면 진지하게 들으시고 꼭 기도해 주시구요. 매주 사람을 바꾸시기 힘드시면 한 사람을 택하셔서 그 사람과 한 달이면 한 달, 두 달이면 두 달 그런 교제를 나눠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 마시고, 조금이라도 마음이 동하시면 꼭 그렇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한 사람 두 사람, 교회에 올 때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 교회는 그만큼 더 풍성한 성령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을 다시 새롭게 성령충만해 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감동시켜 주셔서 우리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용기와 소원을 주시고 우리 안에 그런 나눔과 찬양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4. 성령충만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감사한다.
성령충만한 성도의 두번째 특징은 감사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가 성경을 보면 바울은 항상 성도들에게 감사하라는 이야기를 빼먹지 않고 합니다. 감사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냥 감사하는 삶을 살아라, 감사할 것이 있을 때는 놓치지 말고 감사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거의 언제나 감사라는 말을 ‘범사에’라는 단어와 ‘항상’이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합니다. 마치 삼종세트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실은 이것이 참 우리에게는 이해하기도 어렵고, 그대로 순종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말씀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모든 일에 그리고 항상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에 얼마나 좋지 못한 일들이 많은데말이죠. 정상적이라면 그런 일들로는 절대로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감사는 감사할 꺼리가 있어야만 감사하는 그런 일반적인 감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찬양이 하나 있습니다. 꽤 오래된 찬양이지만 여전히 부를 때마다 마음이 기뻐지고 힘이 납니다. 바로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이라는 찬양인데요. 가사가 이렇습니다.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행하신 모든 것 완전하시니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하나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지를 다시 생각나게 해 주는 찬양입니다. 행하신 모든 것 완전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또 실수가 전혀 없으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우리가 이 찬양을 부를 때, 대개는 과거를 돌아보며 노래하는 것 같습니다. 그 때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 때도 하나님은 완전하셨고, 그래서 전혀 실수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그 일이 꼭 필요한 일이었고 은혜였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 찬양을 부를 때마다 그렇게 기뻐하고 힘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이 찬양을 과거 뿐만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서 부를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요? 그럴 때 우리는 무엇을 믿는 사람이 될까요? 과거에도 그러셨던 것처럼 미래에도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 되어주실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하나님은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실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이것을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일에 항상 감사하라는 말씀에 정말로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다 우리 예수님께서 언제나 나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께 중보해 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은 예수님의 기도를 거절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항상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일은 더 쉬워질 것입니다.
제가 지난 번 섬기던 교회에서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가정에 심방을 갔습니다. 방에 들어가면서 부터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천정 한 켠 구석은 벽지가 다 떨어져 내려 앉은 채로 곰팡이로 가득 차 있었고, 방안은 불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죄송스럽게도 어떻게 이런 데서 사시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지요. 그런데, 그 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저는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오래 전에 홀로 되신 집사님은 두 아들을 키웠는데, 아들 둘 다 40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은 수년 전에 집을 나가서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이고, 둘째 아들은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신병에 걸려서 아무 일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집사님의 얼굴에는 미소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사시는 데도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은 제가 아무리 넉넉하고 근심 없는 집을 심방 했을 때에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 심방은 정말 즐겁고 힘찼습니다. 심방을 갔던 제가 오히려 예수 믿는 믿음의 능력에 대한 큰 확신을 얻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올 때마다, 교회 안에서 이런 사람들을 만난다면, 그런 미소를 보고, 그런 감사의 고백을 듣는다면 우리는 교회에 올 때마다 다시 성령충만해 질 것이고, 다시 우리가 사는 시대를 하나님의 시간으로 되돌려 드릴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는 이런 교제가 있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이런 교제를 나누기를 즐거워 합니다. 성도 여러분, 나의 믿음은 나의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아도 내가 모든 일에 항상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이 사람으로 커 갈 때, 그리고 감사의 고백을 서로 나눌 수 있을 때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믿음을 세우고 회복시켜주는 사람들이 될 것이고, 우리 교회는 그런 은혜가 충만한 능력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결론 :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시대를 대속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래! 그렇게 살아야 겠다!’하고 다시 힘을 내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 일이 나에게는 너무 엄청나게 커 보여서 애써 무관심해 지려고 하거나 절망감부터 느끼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실은 이 일은 우리 개인에게 맡겨진 일이 아니라 교회에 맡겨진 일입니다. 성도들이 나누는 찬양과 감사의 교제를 통해 회복되고 다시 힘을 얻은 성도들이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인 여러분 개인이 강하고 담대해 지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 안에 우리가 나누는 찬양과 감사의 교제가 풍성하게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시대에 취하지 않고 이 시대를 구속하라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나누는 찬양과 감사의 교제 가운데 임재하셔서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가 되게 하시고, 이 시대를 구속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넉넉히 이루어 가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