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분문 : 시편 15편 1-5절
[도입]
미국 사회는 정말 자유분방한 사회입니다. 남에게 직접적인 피해만 주지 않으면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의 삶에 거의 간섭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옷을 입는데도 아주 자유롭지요. 옷을 뒤집어서 입고 다니든, 앞뒤를 바꿔 입고 다니든 그것 가지고 뭐라고 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옷을 뒤집어 입는 것이 유행이 된 적이 있었고, 아얘 그렇게 입는 옷이 생산되기도 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이들도 격식을 지켜야 할 때는 깍뜻이 격식을 지킵니다. 제대로 된 공연장에서 공연되는 교향악단 공연 같은 곳에 가려면 남자든 여자든 정장을 입고 가야 합니다. 특히 남자는 넥타이와 양복 수트는 꼭 갖춰 입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표가 있고 극장 앞까지 갔어도 극장에 들어가서 공연을 관람하지 못합니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가 성경에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혼인잔치 비유입니다. 왕이 아들의 혼인잔치를 열었습니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사람들은 이 핑계 저 핑계대며 잔치에 오지 않았다가 왕을 모욕한 죄로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살던 마을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구요. 왕은 두 번째로 가난하고 병든 자들, 별 볼 일 없는 자들을 잔치에 초청했고, 그 사람들은 모두 초청에 응해 잔치에 참석하러 왔습니다. 왕이 그들을 영접하러 나갔지요. 그런데 왕이 눈에 들어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복을 입지 않고서 그 자리에 나타난 사람이었습니다. 왕은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을 예복도 입지 않고 잔치에 나타났다고 혼을 내고 밖으로 내쫓아 버렸습니다.
두번째 초청받은 사람들은 왕의 잔치에 참여할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순전히 왕의 은혜로 거기 오게 된 사람들이지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잔치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복을 입지 않고 왔던 사람은 거기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왕이 은혜로 사람들을 자격 없는 사람들을 초청했다고 해도 그 자리는 왕이 마련한 잔치자리였기 때문입니다.
- 다윗의 질문
다윗은 하나님과 가장 친밀했던 사람들 중의 하나 입니다. 시편 23편을 보면 그가 하나님과 얼마나 친밀한 관계에 있었는지 아주 생생하게 볼 수 있는데요. 그는 평생을 하나님이 기르시는 어린 양처럼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하나님을 아무렇게나 다가가고 또 마음대로 만나 교제할 수 있는 그런 분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너무 너무 사랑했고 하나님도 그를 특별대우해 주셨지만 그래도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늘 조심스러웠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려면 거기에 걸맞는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도 왕이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신하들이나 백성들이 초청을 받아 자신을 만나러 올 때, 그들은 언제나 격식에 맞는 예복을 갖춰 입고 나왔습니다. 좋은 옷은 아니어도 자기에게 있는 제일 좋은 옷을 깨끗하게 손질해서 입고서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도 들지 못 한 채로 나와 있곤 했지요. 그들이 다윗을 싫어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무서워했기 때문도 아니었지요. 그들은 모두 다윗을 사랑했고 또 다윗과 더 가까이 하고 싶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다윗이 자신들을 기뻐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를 갖추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는 다윗의 마음도 항상 그랬습니다. 다윗의 머리 속은 온통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기쁘게 받아주실까, 어떻게 하면 그 하나님과 함께 머물면서 충분한 교제를 나눌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라고 질문을 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답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또 확인하고 또 확인해서 혹시라도 자신이 하나님께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쁘게 받아주시는 일에 그 어떤 장애물도 만들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언제나 제사에 대한 열정과 사모함이 있었습니다. 제사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하나님과 나눌 수 있는 가장 기쁘고 풍성한 교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그에게 너무나 중요한 질문이었고 어떻게든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통해 제사자로서의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며 다시 하나님께 나아갈 날을 준비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삶을 자신의 왕이신 하나님을 만나러 갈 때 입고 갈 예복을 준비하는 날들로 지냈을 것입니다. 즐겁고 기대에 찬 마음으로 말이지요.
우리는 구약의 제사를 생각할 때, 그 제사가 형식적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 까다롭고 번거로운 절차를 생각해 본다면 그런 제사가 기쁘고 즐거운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가 어려우니까요. 그렇지만 사실 제사는 제사라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가 의미가 있는 것은 제사가 가져오는 결과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은 그 제사를 드리는 사람을 기쁘게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이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고 곧 그런 교제가 시작된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참된 제사는 그 제사가 아무리 까다롭고 번거로운 절차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언제나 기쁨이 충만한 교제의 자리였습니다. 만약 제사가 그저 형식에 불과했고, 또 절차에 불과했다면 다윗은 굳이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라고 하나님께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대충 옷을 준비하지 않고서 왕의 연회장에 나갔던 그 사람처럼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저는 다윗은 그가 제사를 드리는 시간이나 혹은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이나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모습이 그렇게 많이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나중에 탈선해서 잘못된 길을 가기 전까지는 언제나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기뻐하면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충만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제사가 일상생활과 똑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시간은 다윗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특별한 시간이었습니다. 가장 행복하고 기쁜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제사를 통해 값없이 죄를 용서받는 사람의 행복을 맛보았을 뿐 아니라, 제사 자체가 그 어떤 다른 시간, 다른 일들을 통해서 맛 볼 수 없는 하나님과의 기쁘고 즐거운 교제였기 때문입니다.
2. 예배의 특별한 기쁨을 생각한다.
로마서 12장을 보면 우리가 드려야 할 참 예배에 대한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아마 성경에 나오는 예배에 대한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 12장 1절과 2절인데요. 앞의 화면을 보시고 천천히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드릴 영적인 예배는 몸으로 드리는 예배, 그러니까 삶으로 드리는 예배인데 우리가 우리의 삶으로 예배를 드리려면 이 세상을 흉내내고 본 받으면서 살아가서는 안되며,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으로부터 새롭게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인 예배는 영혼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고 거기에 맞춰서 몸으로 살아내는 삶이 바로 영적인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런 예배를 기뻐하시고 우리가 이렇게 몸으로 살아가면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모여서 드리는 예전으로서의 예배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 예배에서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그 예배의 자리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나누는 그 특별하고 풍성한 사귐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사귐 속에 있을 때 우리 영혼과 삶을 가득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집중적이고 또 직접적으로 받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교회가 처음 세워졌을 때, 성령님께서는 성도들을 매일같이 모이게 하셨고 모여서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임 중에 거하기를 좋아하시는 하나님이시고 그 예배중에 임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와 그 안에서 누리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특별하고 큰 복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경험하고 또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예배의 은혜가 최고 아닙니까?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해 온 시간들을 이렇게 떠올려 보시면, 아마 분명히 여러분이 온전한 예배자로 살면서 예배의 은혜와 복을 누렸을 때가 성도로서 가장 기쁘고 충만한 삶을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서는 일에 실패했을 때는 여지 없이 일상생활 속에서도 풍성한 기쁨과 만족을 누리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3.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언제나 그저 그런 예배를 드리다 보면 그저 그런 것이 예배라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 주님의 깊은 은혜와 하나님의 임재가 주는 기쁨과 만족을 경험하지 못해도 아무런 안타까움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예배를 통해서 그런 복과 은혜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성도들도 있다는 것인데 이런 경우에는 아얘 예배에 대해서 거의 아무런 기대도 갖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의 예배를 예배가 되지 못하게 만드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의 예배를 방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구요.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예배가 방해받을 때마다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예배, 우리의 예배가 필연적으로 실패해야만 하는가, 그 이유가 내가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해도 될만큼 소중한 이유인가 하고 말입니다. 답은 분명합니다. 세상에 그런 이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유가 어떤 것이라도 할지랃 뛰어 넘어 참된 예배자의 자리로 가서 참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그런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다시 받아주심을 얻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과 깊이 사귀는 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니까요.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성도 여러분, 예배자인 우리는 항상 이 질문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질문을 통해 준비된 예배자로, 예배를 방해하는 모든 이유들과 싸워 이긴 그런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참 예배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과 온전히 사귀는 복을 아는 그런 예배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이런 복되고 특별한 예배자가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