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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6.10.07. 금요기도회 - 시편 15편 2 : 주의 장막에 머물자 누구오며2(시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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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6년 10월 7일 금요일

설교분문 : 시편 15편 1-5절



  1. 도입


지난 금요일에는 다윗이 제사를 드리러 성막에 올라가면서 하나님께 드렸던 질문을 함께 묵상하고 공부해 보았는데요. 오늘은 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들어 보겠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대답에는 한 가지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전부 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입어야 할 예복이나 지켜야 할 절차, 그리고 제물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레위기의 제사법과는 너무나 많이 다릅니다. 거기서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기서는 그런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아마도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런 것들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너무나 기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죄를 용서받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위해 하나님 앞에 나가는 사람이 아무렇게나 아무 생각 이나 마음의 준비도 없이, 또 아무 제물이나 들고 하나님 앞에 가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니까요. 


2. 바른 예배자의 삶의 틀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제사의 예법이나 제물에 대한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으셨는데요. 그대신 하나님께서 바른 제사자, 바른 예배자의 조건으로 제시하신 것은 모두가 다 그 사람의 ‘삶’에 대한 것들이었습니다. 첫째, 바른 예배자는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이것은 4절, 5절 말씀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도 있지만 4절과 5절 말씀의 요약으로 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우선 참 예배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 사람은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행동에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또 이중적인 삶을 살면 안됩니다. 속 다르고 겉 다르면 안됩니다. 이랬다 저랬다 자기 입장에 따라 말을 바꿔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공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공의’란 공적인 영역에서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바른 예배자가 되려는 사람은 공적인 영역에서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성도들은 이 부분이 정말 많이 취약합니다. 그것은 개인의 삶과 신앙을 따로 떨어뜨려 놓고 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것이지 공적인 삶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죄는 공과 사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적인 죄 보다는 공적인 죄가 훨씬 더 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심각하게 망가뜨립니다. 그래서 신앙 안에서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따로일 수가 없고, 사적인 삶 속에서보다 공적인 영역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참 예배자는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마지막으로 참 예배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 마음에 참된 것만을 말해야 합니다. 자기를 속이고 자신을 합리화하면 안됩니다. 실제로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지 않은 사람, 자신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정직하거나 공의롭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자신에게 정직하지 않은 상태에서 행하는 정직과 공의는 자기 입장이나 편리에 따라서 언제든지 깨질 수 있기 약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바른 예배자가 살아가는 법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정직할 것, 사회에서 공의로울 것, 그리고 자신에게 진실만을 말할 것. 이것이 바른 예배자가 갖추어야 할 삶의 큰 틀인데요. 하나님께서는 그 다음에는 그런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물론 여기 나오는 것은 전부가 아닙니다. 그런 삶의 모습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이야기하시는 것은 바로 예배자의 ‘말’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자는 우선 남의 잘못을 꺼내어 이렇게 또 저렇게 다른 사람에게 옮기면 안됩니다. 그렇게 남을 험담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말로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인 해를 입혀서도 안됩니다. 모욕을 하고 상처를 주거나 속이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웃을 중상모략하면 안됩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밉고 나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고 해도, 그것을 통해 내가 얻을 것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거짓말을 지어내어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안됩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많이 뜨끔 했습니다. 그동안 너무 많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나쁜 말을 이렇게 또 저렇게 너무나 많이 옮기고 다녔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일은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그 당사자에게 크게 해를 입히는 행동입니다. 그 사람은 나에게 그렇게 행동한 적도 없고, 내가 보는 앞에서 그런 나쁜 일을 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사람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면 어떻게 됩니까? 갑자기 그 사람이 마음에 안 들기 시작합니다. 좋지 못한 사람으로 여겨지기 시작하고, 나중에 그 사람을 만나면 못 마땅하게 여기면서 퉁명스럽게 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두 사람이 어떤 사람에 대한 뒷담화를 나누면 다음에는 그 사람을 더 미워하고 더 싫어하게 되지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비록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그 사람에게는 큰 해를 입히게 됩니다. 그 사람에게서 사람을 빼앗아 가고 또 사람들의 사랑을 빼앗아 갑니다. 거짓으로 어떤 사람을 모함하는 일은 이것보다 훨씬 더 나쁜 일입니다. 그것은 험담보다 훨씬 더 악한 의도에서 나오는 훨씬 더 악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참 예배자는 하나님이 눈으로 사람을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바른 예배자들은 사람들을 볼 때, 그 사람의 외모나 재산, 그리고 그 사람의 능력이나 업적같은 것들을 기준으로 평가하고, 거기에 따라 그 사람을 높이거나 낮춰서는 안됩니다. 물론 그런 조건들 자체가 그 사람을 존중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이 있다고 해서 그것만 가지고 그 사람을 특별하게 대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바른 예배자는 그런 조건들을 갖추고 있지만 하나님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은 가볍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가볍게 보라고 하니까 조금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이 말은 그 사람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같은 인간으로서 충분히 존중해야 하지만 그 이상의 존경이나 다른 사람들보다 중요한 사람으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그 사람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없이 망령되게 사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얼마나 대단하고 훌륭해 보여도 바람 앞에 날리는 겨와 같이 아주 가볍게 평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 사람에게 과도한 비중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만,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누추하게 살고 있더라도 그 사람이 정말로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이라면 바른 예배자는 그런 사람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비중있는 사람으로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기뻐하시고 그런 사람을 가까이 하시며 그의 기도에 특별히 귀 기울여 들으십니다. 그러니 우리들도 그래야 합니다. 바른 예배자는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듯이 그 사람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를 기준으로 치우침 없이 사람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을 보시는 하나님의 기준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도 하나님께 헛된 약속을 하지 않고 한 번 약속한 것은 자기에게 손해가 되어도 반드시 지켜 냅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바른 예배자는 물질을 바로 사용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바른 예배자는 이자를 목적으로 해서 돈을 꾸어주면 안됩니다. 아시다시피 이 말씀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돈을 빌리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자기 재산을 불리거나 돈이 되는 곳에 투자를 하기 위해서 남의 돈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부채를 질 수 밖에 없는 생계형 채무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사람이 정말 살기가 어려워서 경제적인 도움을 청할 때에는, 이자를 받을 목적으로 돈을 빌려주거나 반대로 이자를 받을 수 없다고 그 일을 거절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이렇게 하는 것을 ‘공의’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바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바른 예배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항상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살피고 도울 일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도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많이 주신 것은 나 혼자 많이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의 부족함을 채워주라는 뜻이고 그것이 바로 공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른 예배자는 뇌물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김영란 법이 생기고 나서야 겨우 어쩔 수 없이 뇌물을 피하는 그런 수준이 되면 안됩니다. 우리는 이미 경험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뇌물이 아니라 선물을 받아도 우리 마음은 선물을 준 사람에게로 움직입니다. 그 사람을 더 각별하게 생각하게 되고 또 나중에 무슨 일이 있으면 그 사람을 편들어 주게 됩니다. 하물며 누군가에게 목적이 있는 돈이나 물건을 받는다면, 그것이 그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어서 공적인 일에서 오히려 악한 사람 편을 들게 만들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면 돈 없고 힘 없는 사람들은 당연히 피해를 입게 되겠지요. 이것은 정직과 공의를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일이 됩니다. 결국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와 공동체가 그 상처와 피해를 고스란히 입게 되구요. 그래서 바른 예배자는 뇌물을 받으면 안됩니다. 또 받지도 않습니다. 


4. 정리, 바른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 거룩한 삶의 값을 지불해야 한다. 


이렇게 하나 하나 나열하며 살펴보다 보니 정말 이래서 예배를 드리겠나 싶은데요. 원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른 예배자로 예배를 드리고, 그 예배의 은혜와 복을 누리려면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제사나 예배는 그리 긴 시간동안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한 시간이나 몇 시간이면 끝이 납니다. 그런데,  한 번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이번 예배와 다음 번 예배 사이의 긴 시간을 이렇게 거룩하고 향기로운 삶, 정직하고 바른 삶으로 채워넣어야 합니다. 그만큼의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들려준 대답의 요점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대답이기도 했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다시 되물으신 것이기도 합니다. 네가 바른 예배자가 되어서 예배의 은혜와 나와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그 기쁨을 얻기 위해서 이런 비싼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면, 너는 그래도 기꺼이 이 댓가를 지불하겠느냐고 말이지요. 우리는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내가 다음 주일에 한 번의 예배를 제대로 드리기 위해서 한 주 내내 이 모든 요구들을 만족시켜야 한다면, 이런 값비싼 댓가를 치러야 한다면 그래도 나는 그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하나님 앞에 바른 예배자로 서는 것을 택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는 원래 이렇게 값비싼 것입니다. 예배를 위해 발버둥치며 사는 거룩하고 순결한 삶이 없이는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시편 말씀을 묵상하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그리 큰 은혜와 기쁨이 없는 것은 우리가 예배를 너무 값싸게 드리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나는 안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돌아 보니 예배를 향한 기대와 소망이 너무 부족했고, 바른 예배자가 되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예배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와 기쁨을 주는지 모르는 것도 아닌데, 언제부터인가 그것을 망각하고 예배를 그저 한 시간 드리는 예배로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5. 결론, 바른 예배자는 상한 심령으로 예배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반드시 바른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른 예배자가 되려면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바른 삶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우리의 삶이 완전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 바른 예배자가 되려는 치열한 싸움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아무리 치열한 싸움을 벌여도 우리 삶은 여전히 부족할 뿐입니다. 여전히 누더기 같고, 흠많고 점많은 제물같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말로 기뻐하시는 제물은 그런 치열한 삶 끝에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아가는 우리의 찟기고 가난해진 심령입니다. 그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채우시는 은혜만을 간절하게 의지하는 우리의 심령, 누더기 같은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덧입고자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우리의 가난한 심령 말입니다. 이 가난하고 상처입은 심령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켜내기 위해서 치열한 싸움을 벌인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전리품입니다. 


항상 부족하고 연약할 뿐이지만 그래도 하나님 앞에 바른 예배자기 되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사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찟기고 상한 심령을 제물 삼아 하나님께 예배하는 진짜 예배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삶을 제물로 드리는 예배자, 그리고 찟기고 상한 가난한 심령으로 예배하는 예배자. 우리 모두가 이런 예배자들이 되어서 우리 주님의 부어 주시는 은혜 안에서 영원히 흔들림 없는 복을 얻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