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일 : 2016년 10월 21일 금요일
설교분문 : 시편 19편 7-10절
자연을 감상하고 묵상하기 참 좋은 계절인데요. 자연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솜씨를 알게 해 주는 아주 좋은 스승이 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치료해 주는 좋은 치료제도 되어 주었지요. 그렇지만, 자연은 그 차체로 하나님을 알려 주기에는 부족함이 많습니다. 물론 이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자연이 하나님을 더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게 만들어 주고 하나님을 더 가깝고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주지만,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자연은 그저 어떤 신과 조물주가 있다는 것 정도, 그리고 그 앞에서 감탄하며 감정과 생각을 순화시킬 수 있게 만들어 줄 정도만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이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갖게 해 주거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는 못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자연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르쳐 주는 훌륭한 스승임에 분명하지만 자연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자연보다 그 역할을 더 온전히 해 낼 수 있는 다른 것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19편 1절부터 6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을 보고 묵상하면서 받은 감동과 은혜를 적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자연은 하나님을 노래하는 오케스트라였고 합창단이었습니다. 심지어 다윗은 하늘이라는 공간과 흘러가는 시간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노래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서 온 세상 구석 구석으로 퍼져가는 것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묵상이 얼마나 깊고 오묘한지 모릅니다. 말 아닌 말, 소리 없는 소리로 전해주는 시간과 공간의 메세지까지 들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 소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었고 또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말씀이었는지 잘 모릅니다. 그저 굉장히 영광스러운 말씀이었을 것이라는 것 밖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고 있다보니 다윗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은혜와 하나님께서 그 말씀들을 통해 주셨던 은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가려고 발버둥쳤던 자신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아주 특별한 은혜들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여섯 가지로 적어 내려갔습니다. 다윗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말씀의 은혜는 주로 그 말씀이 자신의 마음과 생각에 미쳤던 선한 영향에 대한 것들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아주 실제적이거나 현실적인 것들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이 모든 이야기를 마치면서 10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 보다도 더 달다”고 고백합니다. 세상에 가장 값진 것보다 더 값지고, 가장 맛있는 음식보다도 더 맛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니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며 세상에서 가장 만족스럽다고 말이지요.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다시 한 번 되돌아 보게 하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귀하고 이렇게 기쁘게 여기는 것은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분명한 것은 이 은혜는 우리에게도 허락된 은혜이고, 우리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여겨야 하는데, 우리는 이 은혜에서 너무 멀고,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마음은 이와는 너무 많이 다른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다윗의 고백을 살피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귀하고 기쁘게 여기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첫번째,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법으로서의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법이 완전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완전하기 때문에 영혼을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인간이 만든 법을 생각하면서 좌절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그 법을 잘 지키지 않고, 또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 법이 가지고 있는 분명한 한계를 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만든 법에는 구멍이 있습니다. 아무리 만드느라고 만들어도, 그리고 다른 대안이 없어도, 실제 세상에서는 그 법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법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법만 놓고 본다면 얼마든지 편법을 만들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법들도 참 많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만든 법은 사람의 악한 행동은 억제할 수 있어도 그 마음까지 바꾸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법은 인간을 위한 것인데, 그 법에는 인격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법이 오히려 피해자를 해치는 경우도 생겨납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법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법은 완전합니다. 일단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부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해석은 할 수 있어도 그것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더하거나 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부족하고 죄 많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참된 가치와 완전함을 아는 사람들은 말씀의 완전함을 맛보는 것만으도 자기 영혼이 회복되는 것을 느낍니다. 물론 법으로 치면 하나님의 말씀도 완전하게 지킬 수 없는 법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그 법을 모두 제대로 지켜낼 수가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 법을 어겼다고 사람을 정죄하고 벌 주는 일로 끝내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법이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법은 인격이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는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법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런 하나님의 성품을 보고 마음을 읽어냅니다. 그래서 법을 어기면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마음이 상하고 가슴 아파합니다. 슬퍼합니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면 어떤 기적이 일어날까요? 저절로 사람이 변합니다. 마음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고, 또 행동도 변합니다. 이리가 양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합니다. 법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 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우리가 얼마나 죄악된 존재인지,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해 줍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들려준 하나님의 말씀처럼,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외쳤던 하나님의 말씀처럼 말이지요. 이렇게 여호와이 율법은 완전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합니다.
다윗이 두번째로 경험한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와의 증거”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해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성경은 도무지 사람이 만들어 낸 종교의 경전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자체로 그것이 하나님이 계시며 성경은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냅니다. 제가 성경을 알면 알아갈수록 저는 제 믿음이 더 견고해지고 분명해 지는 것을 느낍니다. 성경이 얼마나 완벽하게 쓰여졌는지, 수천년 동안 쓰여진 책이 어떻게 그렇게 일관성있게 한 가지 이야기를 서로 어긋나지 않게 들려주고 있는지 그런 것들을 하나 하나 발견할 때마다 저는 말 그대로 소름이 돋곤 합니다.
또 하나 성경은 전혀 인간중심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불편해 하는 이야기들을 피하지 않고, 껄끄러워 하는 이야기들을 거침 없이 해 댑니다. 사람의 타락한 본성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요구들만 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성경이 인간의 마음과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면 절대로 그런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종교의 경전을 보면, 마치 그들이 섬기는 신 중심인 것 같지만 결국은 다 인간중심입니다. 네 힘으로 신이 되라고 하고, 네 힘으로 운명을 극복하라고 하며, 네가 선하게 살고, 공로를 세워 구원을 얻으라고 말합니다. 너희들이 선하게 살아서 이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그 반대의 이야기만 합니다. 자기를 죽여라, 하나님 앞에 공로는 없다, 너는 죄인이다, 너는 피조물이다, 하나님이 전부다 등등….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들으면 오히려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만 가득합니다. 그렇지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 자체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확실하고 분명하게 선포하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는 사람은 그가 비록 우둔한 자이고 어리석은 자라고 하더라도 하나님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는 증거 덕분에 지혜로워 집니다. 우둔한 자의 삶은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왜 살고 있는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선이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둔한 자는 단지 머리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사람도 하나님을 깨닫게 하고 영원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해서 우둔한 사람을 지혜롭게 만들어 줍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니까요.
오늘은 여섯 가지 중에서 두 가지만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법’입니다. 그 완전함 앞에 우리의 부족함과 불완전함이 드러나게 해서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시려고 주신 은혜의 선물이고, 우리의 행동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달라지게 하는 완전한 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마다 이런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첫번째 말씀의 복이고 은혜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문자만 보면 안됩니다. 그 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 말씀의 변화시키는 능력 앞에 내 생각, 내 감정, 그리고 내 행동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지혜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를 불분명한 신앙과 모호한 삶으로 끌어들이려는 세상의 유혹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터에서 이웃이나 친구를 만났을 때 우리 귀에 들려오는 그들의 주장들, 수많은 ‘카더라’들, 그리고 대담하게 내가 진리라고 외치는 헛된 이야기들… 이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우리 마음과 생각은 불분명해지고 정해 놓은 삶의 길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또 나와 다르게 사는 사람들, 이 세상이 전부인 줄로 알고 세상만 보면서 살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반면에 내가 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믿지만 그런 그들 앞에서 내세울 것이 없는 나를 볼 때, 우리의 믿음은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지혜는 우둔함으로 변해 갑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바라보고 붙들어야 할 것은 우리를 다시 지혜롭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네가 가는 길이 맞다고,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확실하고 분명하다고 말해 주는 하나님의 증거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영혼을 생각하고 영원한 나라를 생각하면서 지혜롭게 사는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말씀이 없는 사람은 돌아가야 할 고향이 있지만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입원할 병원이 없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말씀이 없는 사람은 점점 더 우둔해져 가는 자신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그런 사람과도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듣고 믿으라고, 그 말씀으로 영혼을 다시 살리고 다시 지혜를 회복하고 말입니다.
언제나 이 귀하고 능력있는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깊은 마음과 은혜를 헤아리며 이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 안에 거하고, 말씀 위에 참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