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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6.10.06.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사도행전 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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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6년 10월 6일 목요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이라는 말을 생각할 때, 우리는 거의 항상 뭔가 특별하고 신비한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가면 뭔가 아주 특별하고 놀라운 일, 그리고 은혜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쨋든 하나님에 대해서 선한 기대를 품게 되고 또한 특별한 은혜를 기대할 수 밖에 없는데, 성령님의 직접적인 인도를 받는다는 그런 기대는 더욱 더 커지게 되니까요. 


16장을 보면 바울은 아주 특별한 성령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원래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한 후에 그 옆에 있는 아시아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성령님께서 가로 막으셨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시아 지역으로 가는 길을 원천봉쇄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복음을 전한 후에 브루기아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로질러 통과해서 무시아에 도착했습니다. 사실 바울은 무시아에서는 그 북쪽 지역인 비두니아 지역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성령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계속 서쪽으로 가서 결국 무시아 서쪽에 있는 항구인 드로아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님께서는 갈라디아에서부터 바울을 몰고 몰아서 결국 바울을 드로아로 가게 하셨고, 성령님의 인도를 민감하게 받아들일 줄 알았던 바울은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왜 그러시는 지도 모르면서 드로오까지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하셨던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 것은 드로아에 도착하고 나서 였습니다. 밤에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 주시는데 바다 건너 북쪽 지역인 마게도니아 사람 하나가 건너와서 자신들을 도와 달라고 간절하게 손짓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던 것입니다. 당연히 바울은 이것을 성령님의 인도로 받아들였고, 지체하지 않고 마게도니아로 건너 갔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처음부터 바울에게 마게도니아로 가라고 하실 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때로는 그렇게 하기도 하시지요. 그렇지만 이번에는 그런 식으로 인도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중간 중간에 바울이 가려는 길을 막아 서시고, 바울의 방향을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데려다 놓으시려고 하셨던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환상을 통해 구체적인 행선지를 밝혀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 항상 명확하고 분명한 길을 가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의 경우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인도하심을 구하지요. 정말 간절히 구합니다. 그런데, 아무런 대답이 없으십니다. 이거다, 여기다라고 대답해 주시면 좋겠는데,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제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저의 양심을 통해 이건 아니다라는 느낌만 강하게 주십니다. 참 답답하지요. 그런데, 바로 이것이 일반적인 경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도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안된다는 길 가지 않고, 모르는 길이지만 열리면 열리는 대로 그렇게 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고, 거기 이르러서야 하나님의 진짜 뜻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런 방식으로 인도하시는 것은 그 과정 자체가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훈련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인도를, 자기 고집을 내려놓고 양심과 상황이 주는 메세지에 민감하게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겸손과 믿음을 배울 수 있으니까요. 


아무튼 그렇게 해서 바울은 드로아에서 서둘러 마게도니아로 갔고, 거기서 마게도니아의 첫번째 도시인 빌립보로 갔습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그런 인도를 받아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했다면, 거기에는 뭔가 엄청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마게도니아 사람이 손까지 흔들며 간절하게 자신들을 도와 달라고 하는 환상까지 보았다면 분명히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16장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보면 거기서는 그렇게 특별한 일이 없었고, 그다지 오래 머물지도 않았습니다. 처음에 빌립보에 도착한 후 며칠 동안 아무 할 일이 없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안식일이 되어서 기도할 곳을 찾기 위해서 바울은 길을 나섰지요. 그리고는 우연히 빨래터에서 염색한 옷감을 빨고 있는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데,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던 루디아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바울은 루디아의 집으로 거처를 옮길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 이야기는 어떤 사람의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 주었다가 흠씬 두들겨 맞고 옥에 갇혔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물론 그러는 중에 다행히 감옥 간수의 가정은 구원을 얻었지요. 그리고 적어도 사도행전이 전해주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 다음에 바울은 별 다른 일 없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 지역으로 옮겨 갑니다. 그런 엄청난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그 먼 길을 돌아서 마게도니아까지 간 것 치고는 정말 별다른 것 없이, 비교적 짧은 시간만을 그 지역에서 보낸 후에 또 다시 옮겨 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삶에 대한 저마다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아마도 대부분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면 평범하지 않은 삶, 그것도 뭔가 놀라운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기대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어떤 방식으로, 어떤 길을 따라 어떻게 인도하실지 모릅니다. 성령님의 인도에 대한 고정된 생각을 가지면 안됩니다. 그러면, 막상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놓칠 수도 있고, 또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이 가장 완전한 길로 가는 것이라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은 특별할 수도 있지만, 전혀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이 정해서 가는 길보다 더 막연하고 정처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우리가 느끼는 것이지,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계획과 뜻을 가지고 계시고 그 뜻과 계획대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따르는 삶은 언제나 확실하고 분명합니다. 그리고 가장 완전합니다. 


덜 확실해 보이고 덜 특별해 보여도 항상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 분이 이끄시는 길을 따라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서 불완전한 우리의 뜻이 아니라 완전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런 은혜를 누리며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