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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6.11.11.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고린도전서 14장)

* 11월 부터는 음성파일을 올리지 않습니다. 새벽예배 설교준비는 하지만 새벽예배에 참석하시는 분들이 없을 때가 많아서 설교를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설교일 : 2016년 11월 11일 금요일





‘은사’라는 말을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참 특별하게 와 닿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은사가 항상 성령님과 연결되어 있고, 또 일반적이지 않은, 특별한 현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은사라는 말은 은혜라는 말과도 같은 말이고 또 선물이라는 말과도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 바로 은사라는 말이 가지는 원래 의미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 은사라는 말을 원래대로 선물로 바꿔서 부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은사를 뭔가 아주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는 생각이 조금 누그러질테니까요. 


성령님께서 은사를 주시는 이유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몸답게 역할을 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시는 선물이 은사입니다. 그래서 이 은사는 사실 두 가지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그리고 교회의 덕을 세우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이 두 가지 목적으로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은사라는 것이 워낙 특별한 것이다 보니 사람들은 이것을 자신의 자랑거리로 내세울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또 그렇게 대접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저는 특별한 은사가 있다는 사람치고 이렇게 되지 않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은사가 있다고 하면 자기도 모르게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려고 하고, 또 은연 중에 자신이 남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듯한 행동을 합니다. 수많은 이단들이 바로 이 은사와 관련해서 생겨났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은사가 사람을 얼마나 잘못되게 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은사들 사이에도 레벨을 정하려고 합니다. 모든 자랑거리들을 그렇게 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 레벨을 정하는 일 자체가 참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설사 은사들 사이에 레벨이 존재해서 어떤 은사는 더 수준 높은 은사이고 다른 은사는 그런 은사가 아니라고 한다면, 과연 어떤 은사가 가장 수준 높은 은사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이 은사가 왜 교회에, 그리고 성도에게 주어졌는지를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은사라는 것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고, 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주어진 것이니 이런 목적에 더 부합하는 것일수록 더 좋은, 그리고 수준높은 은사가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뭔가 신비하고, 뭔가 눈에 팍 띄고 그런 것을 더 좋은 은사, 더 수준 높은 은사로 취급하고, 그런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더 높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 생겨났던 이상한 현상이 바로 방언으로 인한 무질서 였습니다. 방언은 어떤 사람이 갑자기 다른 나라 말로 기도를 하거나 무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그 나라 말을 모르는 사람들만 있을 때에는, 방언을 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교회 전체가 그 사람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게 워낙 특별한 은사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데 그 사람이 평생 접해 보지도 못한 다른 나라 말로 이야기 한다면 그것을 옆에서 지켜 보는 사람들은 그 일을 얼마나 특별한 일로 여기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방언으로 주시는 메세지는 결국 교회를 위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번역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방언으로 들려오는 메세지에서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저 방언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방언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믿는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런 유익도 없습니다. 


반면에 예언의 은사는 일반적인 언어, 그러니까 교회 안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이루어 집니다. 그래서 그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방언보다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언보다 방언을 더 높여 쳐 주었고, 예언에는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은 반면에 알아듣지도 못하는 방언에는 큰 관심을 보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옳지 못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방언보다 예언이 훨씬 더 좋은 은사라고 말합니다. 성도들을 격려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고 성도들에게 위로를 주는 예언은 교회와 성도들을 유익하게 할 뿐만 아니라 처음 예수를 믿기 시작한 사람들의 믿음을 돕는 역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은사를 사모하려면 방언의 은사가 아니라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했습니다. 심지어는 천마디의 방언보다 다섯마디의 예언, 그러니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성도들과 교회의 신앙을 돕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까지 말하면서 말이지요.


우리는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난 이런 일들을 보고 또 이 일에 대한 사도 바울을 가르침을 들으면서 우리가 신앙 안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무엇을 가장 가치있는 일로 보고 또 추구해야 하는지 그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가치있는 일, 그리고 신앙적으로 가장 가치있는 일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한 일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일들을 가장 가치있게 생각하면서 교회 안에서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애써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성도는 영광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나를 드러내고 나를 자랑하고 나에게 유익한 일은 크게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가 훨씬 더 가치있는 은사가 되는 것입니다. 굳이 평가를 하자면 말이지요. 교회 안에서 그리고 개인적으로 내가 성도로서 어떻게 살며 무슨 일을 선택해야 할까 고민되실 때마다 이 원리를 잘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신앙은 항상 내가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고 다른 사람들이 중심이라는 이 원리를 기억하시면서 거기에 맞는 일들을 선택한다면 교회도 우리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훨씬 더 아름답게 세워져 갈 것입니다. 항상 이 귀한 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