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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6.11.25.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갈라디아서 4-5)




설교일 : 2016년 11월 25일 금요일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복음과 율법의 관계입니다. 정확하게는 복음과 율법이 어떻게 다른지를 분명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 갈라디아서이고, 왜 복음을 믿은 사람이 율법으로 되돌아 가면 안되는지 그 이야기를 분명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원래 유대인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복음을 믿었다고 해서 지키던 모든 율법을 다 떠나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진 상태에서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지키는 일을 구원에 필수적인 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아무튼 예수를 믿은 유대인들은 계속 유대인으로 살면서 지키던 율법을 계속해서 지켜도 괜찮습니다. 율법을 예전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의로워지는 방법으로 생각하거나 구원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으로 여기지만 않는다면 말이지요. 


반면에 이방인들은 그런 율법들을 지키면 안됩니다. 원래부터 이 사람들은 할례나 절기, 정결예법 같은 것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살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들이 율법을 지키는 일을 자기 힘으로 의로워지는 방법으로 여기거나 구원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어, 그런 삶을 살게 된다면 바울의 5장 2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아무런 유익이 없어지고 맙니다. 이 말씀은 정말 무시무시한 말씀인데요. 이 말은 예수 믿는 일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얻은 것이 무효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복음은 이렇게 율법과 상극의 관계에 있을까요? 물론 이 율법은 그냥 율법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의로워지고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는 수단으로 오해되고 악용되는 율법을 의미합니다. 바울의 말대로 율법이 그저 우리를 복음의 은혜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면 그 범위 안에서의 율법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너무 선하고 너무 은혜로운 것입니다. 항상 율법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자꾸 자기 의의 수단으로 오해될 때인데, 율법은 이렇게 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그 율법 혹은 율법을 닮은 것들을 지켜야 할 사람이 자기 의를 너무나 좋아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녀의 자유를 주시려고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반면에 자기 의의 수단으로 오해된 율법은 우리를 다시 종되게 하는 원리입니다. 그런 율법 아래 있을 때, 우리는 우리가 한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잘 보이고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과 율법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이 함께 아브라함의 집에 있을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원래는 복음이 오면 율법은 자리를 내주어야 합니다. 이삭이 태어나면 이스마엘은 그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현실 속에서는 마치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혔던 것처럼 율법이 복음을 학대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이 모두 예수를 믿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성경은 100번 읽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한 번도 읽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누가 누구에게 압력을 가하게 될까요? 누가 누구에게 너도 나처럼 해야 한다고 말할까요? 당연히 성경을 100번 읽은 사람입니다. 한 번도 성경을 읽지 않은 사람은 뭔가 자신이 모자란 그리스도인 같고, 자기도 성경을 읽어야 버젓한 성도가 될 수 있을 것 같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도 성경을 읽기 시작합니다. 한 번 두 번… 횟수가 거듭될수록 자신도 버젓한 성도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읽지 않았을 때보다 점점 더 당당해 집니다. 


물론 성도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가까이 해야 성도다운 성도로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읽는 일 자체가 더 자격있는 성도가 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당당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의 이름으로 하는 일이 이런 종류의 일이 되면 그 때부터 그것은 우리의 ‘율법’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를 종처럼 속박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녀됨과 자유는 서서히 상실되고 맙니다. 


율법은 참 매력적입니다. 율법은 언제나 네가 무언가를 해서 자격을 갖추고 내세울 꺼리를 준비하라고 말하니까요. 그러나 그 율법을 따르는 순간 나와 복음은 상관이 없어지고 맙니다. 나는 자녀가 아니라 다시 종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그 은혜와 사랑의 관계는 깨어지고 종과 주인이라는 비인격적인 관계만 남습니다. 


율법은 우리와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통해 일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것. 그것 하나만 의미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종, 율법의 종에서 우리를 풀어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믿음 안에서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 무엇도 우리의 율법이 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냥 예수 믿으면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앙생활 안에는  항상 이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우리 영혼을 파고 들어오는 율법과 싸우고 복음을 지켜내는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으로 끝나야 합니다. 율법으로 돌아가면 안됩니다. 항상 복음의 복음 됨, 복음의 은혜 됨을 지키셔서 자녀의 자유를 잃지 않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