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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6.11.27. 주일오전 - 하나님의 전신갑주 ; 복음의 신(에베소서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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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16년 11월 27일 일요일 

본문 : 에베소서 6장 13-17절



  1. 서론 


오늘은 하나님의 전신갑주 중에서 세번째 부분인 신발부분을 함께 공부해 볼텐데요. 그 전에 잠시 지난번까지 공부한 것을 정리해 볼까요? 하나님의 전신갑주 중에서 첫번째 부분이 무엇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진리의 허리띠였습니다. 로마병사의 갑옷에서 허리띠는 두 가지 역할을 했습니다. 첫째, 병사들의 허리 부분을 든든하게 받쳐 주어서 계속 싸울 수 있는 힘을 주고, 둘째, 갑옷과 무기들을 하나로 연결되게 해주어서 그 전체가 더 효과적으로 제역할을 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진리가 성도들의 허리띠라는 것은 우리가 영적인 전쟁을 끝까지 싸우고 승리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 또 신앙생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과 신앙의 모든 부분 부분이 말씀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고 묶여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말씀대로 살 때,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성도는 신앙 따로 사는 것 따로 그렇게 서로 분리되어 있으면 안됩니다. 말씀 안에서 한 덩어리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님께서 주신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두 번째 부분은 ‘의의 호심경’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우리에게 덧입혀져 있는 그리스도의 의가 생명이자 그 생명을 보호해 주는 호심경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 영혼과 믿음의 심장에 그리스도의 의가 덧입혀져 있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성도는 거룩하고 의로운 삶으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을 따라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가다 보면 자꾸 자기 의에 빠집니다. 당연한 일을 하면서도 자꾸 자기를 자랑하게 되고 교만해 지게 되지요. 그러면 우리가 진짜로 의롭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자기 의에 빠지는 것일까요? 실은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자기 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자기 의와 자기 만족은 죄라는 질병의 가장 대표적인 증상이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자기 의에 빠지고 자기 만족을 찾는 자신을 볼 때마다 다시 깨닫고 또 깨달아야 합니다. “아. 내가 죄인이구나. 나는 나의 의로움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구나.”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를 자랑하는 자리에서 다시 예수님의 의를 의지하는 자리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영혼과 신앙의 생명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II. 복음의 전투화


오늘  살펴볼 부분은 병사의 신발인데요. 그 당시 전쟁에 있어서 신발은 지금 병사들의 신발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요즘 전쟁은 철저히 물량전이고 정보전입니다. 누가 센 무기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느냐, 누가 상대방의 약점을 더 잘 알고 있느냐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이 되었습니다. 물론 고대의 전쟁도 그런 점은 똑같았습니다. 무기가 좋고 정보가 더 많으면 전쟁에서 이길 확률이 그만큼 컸지요. 그렇지만 한 가지 지금과는 확연하게 다른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고대의 전쟁은 결국에는 병사와 병사가 맞붙어서 싸우는 백병전이 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육지에서 전쟁에 벌어질 경우, 모든 병사들은 발로 걸어서 전장까지 이동하고 발로 움직이며 전투를 했으며, 발로 걸어서 전진하고 적지를 점령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병사의 발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는 로마병사의 발을 생각하면 샌들을 신고 있는 발을 떠올리기가 쉽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평상시의 모습이고, 전쟁터의 병사는 같은 로마병사라도 그런 신을 신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로마 병사가 전투할 때 신었던 전투화는 발 전체를 가죽으로 감싸게 되어 있었고, 그 밑바닥에는 독특하게도 못이 박혀 있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병사의 신발이 이런 모양이었던 것은 로마 병사가 전투를 벌일 때, 그 신발이 두 가지 중요한 역할을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첫번째, 로마 병사의 신발모양은 병사가 전투에서 끝까지 버티고 서 있기 위해서 가장 효율적인 모양이었습니다. 그 못이 없다면 서로 밀고 밀리는 백병전에서 로마 병사는 쉽게 뒤로 밀릴 것입니다. 그러나, 신발 밑창에 박혀 있는 못 덕분에 밀고 밀리는 전쟁에서 훨씬 더 유리하게 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의 신발이라는 것은 복음이 영적인 전투를 벌이는 우리에게 이런 역할을 해 준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병사라면 우리는 복음의 기초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복음에 관한 한, 그리고 복음의 확신에 관한 한 절대로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습은 못이 달린 신발을 땅에 박고 굳게 서 있는 로마병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위에 그렇게 자신을 단단히 세워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밀리지 않고 끝까지 버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삶과 신앙이 복음의 기초 위에 세워져 있는지, 나는 복음을 믿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내 발에 복음이라는 전투화가 제대로 신겨져 있는지 잘 점검해야 합니다. 사탄은 항상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우리를 죄로 유혹합니다. 그리고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것을 빌미로 우리 양심을 찌릅니다. 그러고도 네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냐고, 그러고도 네가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느냐고 우리를 비난합니다. 이럴 때 복음의 은혜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우리는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계속 버티고 서 있기 힘들어 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 자신을 위해서 복음의 신을 신고 있어야 합니다. 죄 용서의 은총은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것입니다. 이 말은 그 은혜는 사라질 수도 취소될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지요? 예수믿는 우리는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의인입니다. 죄인이라는 실존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신분만큼은 의인입니다. 왜 그렇지요? 십자가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죄 값을 그리스도께서 대신해서 이미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조금 뻔뻔할 정도로 이 확신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죄를 함부로 지어서는 안됩니다. 죄를 멀리하고 죄와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지을 수 밖에 없는 죄에 대해서는 복음의 은혜에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에 대한 확신에 있어서 만큼은 절대로 흔들리면 안됩니다. 


두번째로 로마 병사의 신은 전진하면서 적의 영토를 점령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병사의 발은 직접 적의 땅을 밟아 점령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병사인 우리가 전진하며 나아가는 곳마다 복음의 발자국이 찍혀질 때, 그 곳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영적인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낙오되거나, 영적으로 치명상을 입지 않고 온전하게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단순히 살아남는 것이 전쟁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어느 전쟁이든지 전쟁은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요. 영적인 전쟁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도 이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싸우는 진짜 목적입니다. 우리가 가고 또 머무는 곳마다 복음이 전해져야 하며, 그래서 어둠 속에 거하던 그 땅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와 빛 가운데 거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바로 이 일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영적인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복음의 신은 먼저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끝까지 밀리지 않고 버텨 내려면 이 신이 발에 신겨져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전진해 가기 위해서 이 신을 꼭 신어야 합니다. 사탄의 영토를 밟을 수 있는 신은 복음의 신 밖에 없으니까요. 우리는 복음의 신만 신어야 합니다. 우리의 오른 발에는 예수님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시라는 것을 믿는 확신의 신발이 신겨져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왼 발에는 그 예수님이 우리와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온 세상의 왕이시라는 믿음과 그 왕께 드리는 순종의 신발이 신겨져 있어야 합니다. 이 신이 우리 발에 잘 신겨져 있을 때, 우리는 끝까지 이 싸움에서 쓰러지지 않고 견딜 수 있고 이 세상을 복음으로 점령해 갈 수 있습니다. 


III. 평화의 복음


복음이 우리가 신어야 할 신발이라는 것을 살펴 보았으니 이제는 그렇다면 그 복음의 신이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특징을 좀 살펴 보겠습니다. 다시 16절로 가 볼까요? 거기 보면 복음을 무슨 복음이라고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16절에서는 복음을 ‘평안의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복음이 하는 역할과 복음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데요. 복음은 평화를 위한 것입니다. 평화를 전하고 평화를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복음의 가장 중요한 역할입니다. 복음은 최고로 복된 소식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그렇게 복된 소식일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복음이 전하고 선포하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평화와 화평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과 화평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은 이미 하나님이 싫다고 하나님을 떠났고 그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탄의 편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고, 사실 이것이 인간의 모든 문제와 불행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선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떠나 악하고 불완전한 사탄의 종이 되었으니 그 삶이 행복하고 온전할 수가 없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복음은 놀랍게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평을 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화평이 되었다고, 그 불가능한 화평을 만드셨다고 선포합니다. 복음 덕분에 사람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게 되었고, 드디어 제대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이 얼마나 복된 소식입니까? 그래서 사람이 이 복음을 정말로 믿으면, 그리고 복음 위에 삶을 세우면 그 사람의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람에게 허락된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되고, 그 행복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애초에 인간의 모든 문제와 불행은 하나님과의 불화로부터 시작된 것이니까요. 복음은 평화의 소식입니다. 그런데, 16절은 우리가 이 복음의 신을 신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우리들 또한 하나님과의 화평을 세상에 전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이제까지 심방을 해 보면 남편이 예수를 믿지 않고 교회에 가려고 하지 않아서 고민을 토로하시는 분들이 참 많았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면 그런 분들 중에서는 그것 때문에 남편을 미워하고 원망하거나 남편과 심각한 갈등 중에 있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그 심정이야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만 과연 그래서 남편이 교회에 나가고 예수를 믿을까 하는 것은 우리가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물론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과 그 복을 믿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할 사이에서 내가 지켜야 할 선을 지킨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화평의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그 복음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갈등하고 불화한다면, 과연 우리는 화평의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분명히 기회가 생기는 대로 복음을 전하고 권면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지나쳐서 미움이 되고 원망이 되면 안됩니다. 그것 때문에 화평을 깨뜨리면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화평케 하는 소식으로 전해질 수 없습니다.  


제가 복음 전하는 것만을 예로 들었습니다만,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가든지, 교회 안에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복음을 믿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들도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요. 이것은 우리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우리가 믿는 것을 드러내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면서 평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부딛히고 싸우려고 들고, 꼭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또 너무 까다롭고 까칠해서 다가가기 힘든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과연 우리는 평화의 복음을 담아내는 그릇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그런 내가 복음을 전했을 때, 듣는 사람은 복음이 평화의 소식이라는 것을 알아차릴까요? 


저는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너무 까다롭고 거칠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예수님 덕분에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이렇게 복되고 평안한 삶을 살고 있는데, 어떻게 계속해서 그렇게 까다롭고 거칠게 다른 사람들을 대할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 예수를 믿었을 때는 그럴 수 있습니다. 여전히 거칠고 날카로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부딛히고 불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모습들은 예수를 믿으면서 점점 더 깎여나가고 다듬어 져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렇게 화평하며 또 화평을 만드는 사람으로 변해가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화평의 복음을 믿고, 그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롭게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평화롭게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모습도, 또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모습도 화평의 복음과 어울리는 모습이 될 때, 우리가 믿는 복음은 모든 이들에게 화평을 전하는 아름다운 소식으로 들려지게 될 것입니다. 

두번째로 성경은 우리의 전투화가 복음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복음이 준비한 것” 혹은 “복음의 준비된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정해진 복음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도 되고, 또 복음을 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도 됩니다. 복음은 모호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그 내용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저렇게 마음대로 그 내용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복음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준비된 복음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잘 준비된 군인은 자다가도 관등성명을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들도 툭 치면 복음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복음을 잘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흔들림 없이 복음을 믿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있으니까요. 


요즘 이단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요. 저는 한국교회에 이렇게 이단이 기승을 부리는 이유가 우리들이 복음과 성경에 대해서 너무 무관심해지고 무지해 진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단을 만날 준비가 되어 계십니까? 여러분이 알고 계신 복음을 가지고 그 이단들과 논쟁을 벌여서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알려 줄만큼 복음을 잘 알고 계시고, 이단을 떠나려고 하는 사람을 복음으로 설득해서 예수님께로 돌아오도록 도와줄 수 있을 만큼 복음을 잘 준비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초신자라면 몰라도 적어도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했다고 한다면, 또 정말로 복음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을 믿는 나의 믿음을 지킬 수 있고, 그 믿음을 제대로 전할 수 있을테니까요. 모르는 것을 확신할 수가 없고, 모르는 것을 믿으라고 권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성도들은 복음을 반복해서 듣고, 배워야 합니다. 이미 알고 있다고 해도 다시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더 확실하게 알고 더 풍성하게 알아가야 합니다. 성도들은 복음에 있어서 만큼은 확실히 준비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IV. 결론


오늘은 하나님의 전신갑주 중에서 ‘복음의 신발’에 대해서 함께 공부해 보았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전투화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적인 전투에서 뒤로 밀리지 않고 전진하면서 사탄의 땅을 점령하려면 이 전투화가 잘 준비된 모습으로 항상 우리 발에 신겨져 있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복음을 믿는 확신이 흔들리면 안됩니다. 항상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십시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그 화평을 전하는 평화의 삶을 사십시오. 항상 주님께서 주신 ‘평화의 복음의 준비된 신발’을 신고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복음의 확신을 주소서. 복음을 믿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주소서. 
  2. 평화의 소식을 전하며 또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3. 복음을 알고 믿는데 열심을 주소서. 복음으로 준비되고, 복음을 준비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