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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7.01.13. 금요기도회 -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시편 2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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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7년 1월 13일 금요일

설교분문 : 시편 24편 7-10절




저도 종종 그렇게 되지만, 성도들이 곧잘 빠지고 성도들을 쉽게 좌절시키고 포기하게 만드는 신앙적인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완전주의’라는 함정입니다. 이 완전주의는 100퍼센트가 아니면 의미가 없고, 100퍼센트가 아니면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인데요.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살아라’라고 말합니다. 또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을 구하며 살라’고 말하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해 보려고 애를 쓰지요. 때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마음이 가득 차 있을 때, 우리는 이런 요구들을 거의 100퍼센트 순종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보면 아무리 노력하고 힘써도 언제나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믿음이 약해진 자리는 두려움과 의심이 차지하게 되고 계속 우리의 마음과 시선은 하늘이 아니라 땅을 향하게 되고, 하나님보다는 사람의 눈치를 더 많이 보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되지요. 노력이 부족할 때는 자신의 게으름에 대한 자책 때문에, 충분히 노력했을 때는 그렇게 노력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를 반복하는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믿음과 소망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 앞에서 좌절하고 무기력해 지곤 합니다. 이런 일을 그냥 놔두면 우리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100퍼센트 순종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우리 자신이 완전하지 못하니 우리의 신앙생활 또한 완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피조물이고 또 죄인이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은 그런 것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들에게 주신 것들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한 번 실패하면 완전히 끝나 버리는 그런 명령을 주실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명령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당장, 그리고 한 번 완전하게 순종해야 하는 명령이 있고, 계속해서 힘쓰고 노력하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들은 대개 두번째에 속하는 명령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100퍼센트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100번 시도해서 10번이라도 성공한다면, 100퍼센트가 아니라 10퍼센트만 이룰 수 있다면 그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계속’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는 완전주의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고, 빠지게 되더라도 금방 다시 빠져 나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을 한 번 한 번의 사건으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일평생 동안의 과정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만날 때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 24편 전반부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설 수 있고, 또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애쓴 사람들, 자신의 삶을 거룩하게 살아내려고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그런 삶을 제물로 하나님 앞에 가져올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는 참 제사자, 참 예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시편 24편 앞부분의 대답입니다. 


그런데, 이런 대답은 오히려 우리에게 더 어려운 문제를 던져줍니다. 성경의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면 ‘그러면 도대체 누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누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겠는가?’라는 비관적인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성경은 완전하지 않은 자들은 예배드릴 자격이 없다고 하나님 앞에서 그런 사람들을 몰아내는 것 같으니까요. 그렇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우리가 이미 100퍼센트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완전주의의 함정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100이 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변덕스럽고 고집스럽고 불완전한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도 삶도, 거룩하기 위한 노력들도 다 불완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헌신해야 하지만, 그 헌신과 노력만으로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6절에서 7절로 넘어가면서 시편 24편은 마치 전혀 다른 시편처럼 보입니다. 그 이전에는 예배자의 거룩한 삶에 대해서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하다가 7절로 넘어가면서  갑자기 ‘문들아 머리들어라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신다’라고 노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은 7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은 위에서 우리를 답답하고 힘들게 만들었던 문제, 그러니까 ‘그러면 과연 누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담고 있습니다. 7절부터 10절까지는 전쟁에 승리한 왕이 자신의 성으로 개선행진을 해 들어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왕이 온다는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고 끼리릭 끼리릭  소리를 내면서 육중한 성문이 들려 올려집니다. 백성들은 환호합니다. 목이 터져라 왕 만세, 우리나라 만세를 외칩니다. 그러면 이 왕은 누구일까요? 8절에 답이 있지요? 그 왕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과 영원한 언약을 맺은 하나님, 그리고 전쟁에 능하셔서 언제나 이기시는 하나님이 바로 높이 들린 문으로 행진해 들어가고 계시는 그 왕이십니다. 


그렇다면 7절은 왜 갑자기 이런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일까요? 6절까지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들, 하나님을 찾는 예배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치열하게 싸운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그런 싸움에서 모두 이겼기 때문에 하나님이 찾는 예배자가 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몇 번은 이기고 몇 번은 싸움에서 진 사람들, 그렇게 상처입고 낙심한 사람들, 그래서 왕에게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거룩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앞에서 충분히 거룩하고 충분히 순결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실 그런 삶을 살려고 노력하면 노력할 수록 우리는 더 분명하고 아프게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죄인됨을 깨닫게 됩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아가려고 온 삶을 다 바쳤던 사도 바울이 노년에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거룩하게 살아가려는 사람일수록 그 마음에는 자신의 죄인됨과 부족함 때문에 통곡할 수 밖에 없는 더 깊은 애통함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 애통함과 죄송스러운 마음을 느낄 때, 영혼의 문은 무겁게 아래로 떨구어 집니다. 마치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멀리 서서 기도조차 드리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있었던 세리의 얼굴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바로 그 때, 큰 목소리가 들려 옵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신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하신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하신 여호와시로다” 얼마나 기쁘고 위로가 됩니까? 나는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전부 이기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완전히 이기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이제 힘을 내라고 하십니다. 고개를 들고 나를 맞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거룩한 삶을 위해서 부름받았습니다. 그래서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은 성도의 할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아직은 완전히 성화되지 않은 우리의 성품과 본성이라는 높은 장벽을 넘어가야 하고, 그 다음에는 이 세상의 유혹과 반대를 또 이겨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삶은 그 삶 자체가 싸움이고 전쟁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할 때, 그렇게 자주 넘어지고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좌절하고 포기할 필요는 더더욱 없습니다. 이 싸움은 분명히 우리가 싸우는 싸움이지만 애초부터 우리에게 속한 우리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싸움입니다. 단지 우리는 그 전쟁에 참여한 병사로서 우리에게 맡겨진 싸움을 싸울 뿐입니다. 


모든 전쟁은 ‘마지막에’ 이기는 쪽이 승리하게 됩니다. 중간에 누가 이겼는가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어떤 부분에서는 완전히 패전한 것 처럼 보여도 상관 없습니다. 마지막에 이기는 쪽이 이기는 것입니다. 때로 거룩하게 살기 위해 싸움을 하다 보면요. 싸움에서 밀릴 수도 있고, 또 큰 패배와 실패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엄청난 실수와 잘못을 저지를 때도 있지요. 그러면 다 끝난 것 같습니다. 나는 완전히 실패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한 한 사람의 병사에 불과합니다. 내가 실패했다고 하나님이 실패하는 것이 아니지요. 영광의 왕, 전쟁에 능하신 여호와는 절대로 지시는 법이 없습니다. 마지막에 승리하는 것은 사탄도 아니고 이 세상도 아닙니다. 마지막에 승리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기쁨과 영광을 나눠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편에서 싸우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승리는 결국 우리의 승리가 될 것만 잊지 않으면 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고 의지하면서 우리를 포기하게 만들려는 좌절과 두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렇게 끝까지 주님 편에 서 있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면 우리들도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예배자는 거룩한 삶을 위해서 분투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실패하고 넘어질 때도 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그 동안 살아내려고 분투했던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제물로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그래도 부족하겠지요. 그래도 부끄럽겠지요. 그렇지만, 주님은 그런 우리들의 고개를 들게 하실 것입니다. 무겁게 닫힌 성문처럼 어둡게 고개를 떨군 우리에게 고개를 들라고, 내가 들어갈 것이니, 나의 승리를 너희의 승리가 될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힘을 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거룩한 싸움을 싸우는 우리들을 향해 “문들아 머리를 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겼고 또 이길 것이니 나를 의지하고 계속 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하시고 또 치유해 주시면서 말이지요. 우리는 언제나 이 은혜에 의지해서만 싸우고 이 은혜로만 이길 수 있는 예배자들입니다. 항상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기억하시고 끝까지 거룩한 삶에 힘을 내는 우리들이 뒤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기실 때, 그 승리의 기쁨과 영광을 함께 누리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