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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07.18.새벽예배 -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창세기 20)



창0406to15 -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창2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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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 창세기 4장 06-15절


하나님께서 자기 제물을 받지 않고 동생인 아벨의 제물만 받았다고 해서 분노로 얼굴이 벌개진 가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하나님은 우선 가인의 그런 감정과 태도 자체가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 처럼 되어서 선악을 구분하려고 했던 인간은 자신에게 생겨나는 감정이 정당한 것인지 아닌지 조차 구분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무언가를 판단할 때 생겨나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무언가를 판단하려고 하면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그 일이 옳은지 그른지 조차 제대로 구별할 수가 없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다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선을 행하는 사람은 얼굴을 땅으로 향하고 분노로 얼굴을 붉히지 않습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고 환하게 미소짓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땅을 향해서 얼굴을 향하고 그 얼굴의 안색이 변한다면 그것 자체가 그 사람이 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살다보면 종종 가인과 같은 상태가 될 때가 있습니다. 얼굴이 하늘이 아니라 땅을 향하고 얼굴은 분노로 굳어지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내가 지금 선을 행하는 쪽이 아니라 이미 반대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화가 났을 때는 화난 감정을 정당화하고 그 분노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그래서는 선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선을 행하지 못하게 되면 그만큼 죄악쪽으로 가까워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으려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문 앞에서 웅크리고 앉아서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사자처럼 죄가 그렇게 우리를 집어 삼키려고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죄라는 맹수는 항상 우리 문 앞에서 웅크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를 집어 삼키려고 말입니다. 우리가 감정에 휠씁려서 그 문을 나서는 순간 우리는 그 맹수의 먹잇감이 됩니다. 이 일을 막으려면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죄가 원하는 대로 우리 자신을 내어주지 말고 우리가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그 방법은 우리 속에 생겨나는 부정적인 감정, 특히 분노를 잘 다스리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분노가 차 오를 때, 내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일단 그 분노를 가라앉힌 상태에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문을 열고 앞뒤돌아보지 않고서 문 밖으로 나가는 일을 막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감정이 요구하는 대로 문을 열고 뛰쳐 나가면 바로 죄라는 맹수의 먹잇감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할 때, 그것이 얼마나 더 심각한 죄로 이어질 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가인에게 충고하시고 또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죄는 항상 너를 원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충고와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부정적인 감정은 품고 있으면 품고 있을수록 더 커져만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우리에게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분을 품은 채로 잠자리에 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는 분노가 나를 집어 삼켜서 나는 분노가 요구하는 대로 할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우리의 생각으로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면, 그 다음에는 분노가 우리 생각을 다스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분노와 동생에 대한 시기로 꽉 차 있었던 가인은 동생을 들로 꼬셔냈습니다. 단 둘이서 아무도 없는 들판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동생을 죽였습니다. 자기보다 하나님께 더 인정받고 사랑받는 사람을 없애면 그 인정과 사랑이 자기차지가 될 줄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동생을 죽인 가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지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있느냐?” 그랬더니 가인은 짜증을 내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내가 뭐 아우를 지키는 사람이라도 됩니까?” 하나님께서는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다 아시면서 물으신 것입니다. 다 아시면서 그래도 자기 입으로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시치미를 뗍니다. 거짓말을 합니다. 


죄는 항상 다른 죄를 가져옵니다. 죄가 가져오는 다른 죄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거짓입니다. 죄지은 사람치고 죄를 인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무엇인가 핑계를 대고 거짓말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 잘못한 일이 있을 때, 우리 마음 속에는 크고 작은 가책이나 불편한 감정이 생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때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때입니다. 이럴 때 마음이 불편하다고 해서 모른 척 하거나 혹은 핑계를 대거나 합리화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또 한 번의 죄를 짓는 것이 되고, 우리 입장에서는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슬프고 노한 마음으로 마지막 기회를 저버린 가인에게 선고를 내리십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첫째로 가인은 땅에서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전보다도 더 척박해진 땅에서 더 많은 수고를 해야만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땅이 우리들의 죄와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알려줍니다. 인간이 짓는 죄는 땅을 더럽힙니다. 땅을 더럽힌다는 말은 땅이 그 죄 때문에 더 거칠어지고 척박해 진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죄라도 지어서 자신의 삶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풍요롭게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서 죄를 지으면 그 죄는 세상을 더럽힙니다. 그리고 그렇게 더럽혀진 세상은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 거칠고 쓴 열매를 고스란히 사람들에게 되돌려 줍니다. 둘째로 가인은 이제 한 곳에 정착해서 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땅에서 피하여 유리방황하며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죄는 인간에게서 평안과 안정감을 빼앗아 갑니다. 항상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며 살아가게 합니다. 죄란 결국 누군가에게는 손해와 상처를 입히게 되어 있고, 그래서 그것이 되돌아 올 때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사람은 불안해 하며, 무언가에 쫓기듯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가인은 이 벌이 자신에게 너무 과하다고 말합니다. 질투와 분노로 동생을 죽이고, 하나님께 거짓말까지 했던 가인의 성품은 지금 얼마나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습니까? 더 많이 수고해야 살아갈 수 있고, 땅에서 유리방황하는 삶을 사는 것과 동생을 죽인 일 중에서 어떤 쪽이 더 무겁습니까? 비교해 볼 필요도 없습니다. 땅에서 고생하며 유리방황하는 벌은 동생을 죽이고 게다가 하나님까지 속이려고 들었던 죄에 비하면 가벼워도 너무 가볍습니다. 그런데도 가인은 그 벌이 자신에게 너무 과하다고, 그러다가 누구 손에 죽게될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반복되는 죄는 인간의 양심을 마비시키고 생각하는 능력을 없애버립니다. 남은 죽여도 자신은 상처입고 고생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죄가 가장 심하게 망가뜨리고 해를 입히는 것은 바로 죄를 행하는 사람 자신입니다. 죄 때문에 가장 심각하게 망가진 사람은 바로 가인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인간됨을 잃어버리고 본능대로만 판단하는 한 마리의 맹수가 되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불만을 받아들여 주십니다. 그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서 그 표를 보는 사람이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안전장치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가인을 죽이면 그 벌을 일곱 배나 더할 것이라는 단서까지 붙여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이미 저질러진 죄 때문에 더 많은 죄가 이 세상에, 그리고 사람들에게 더해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가족 중의 누군가가 가인을 보고 아벨을 죽인 원수를 갚고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고 가인을 죽이게 된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 또 한 번의 살인을 더하는 셈이 됩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의 형상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셈이 됩니다. 하나님의 조치는 그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 모든 인간은 그냥 내버려 두면 선보다는 악쪽으로 기울기 쉬운 쉬운 그런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세상과 우리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항상 이 세상에 더 많은 죄가 더해지는 것을 막으려고 하십니다. 우리 양심에 말씀해 오시고, 또 이 도덕과 윤리를 통해서, 그리고 이미 세워져 있는 법을 통해서 더 이상의 죄가 마음대로 이 세상에 더해지는 것을 막고 계십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주셔서 죄된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니다.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인 동시에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과 세상을 망가뜨리는 주범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죄는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우리가 죄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그 죄는 맹수가 되어서 우리를 집어삼킵니다. 죄는 항상 우리 마음 속의 충동의 상태로 있을 때 다스려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우리의 감정과 생각을 맞춰가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죄가 너를 원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죄 쪽으로 기우는 우리 자신을 다시 바로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평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고, 그만큼이라도 더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항상 마음 속에 이는 불같은 감정들과 죄로 기우는 성향을 잘 다스리셔서 삶에 죄가 아니라 선이 더해지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