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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설교 32. 내가 참으로 깨달았도다


날짜 : 2011-09-11

본문 : 사도행전 10장 34-48절


서론 : 한 사람이 필요하다

제가 역사에 조애가 깊은 것도 아니고 솔직히 그렇게 많은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것을 역사의 법칙이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만, 제 나름대로 세상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니 이 세상은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마다 그 분수령을 넘게 하는 한 사람 혹은 소수의 사람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따지고 보면 그 사람 혼자서 훌륭하고 탁월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고, 환경이나 분위기가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만 역사가 꼭 넘어야 할 고개를 넘어가려고 할 때, 그 일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한 사람이나 혹은 소수의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복음의 역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복음은 애초부터 모든 사람들을 위한 ‘평화의 소식’이었습니다.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처음부터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전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처음 복음을 들은 사람, 그리고 그 복음을 전해야 하는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분명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어찌보면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았으면서도 여전히 유대인이라는 껍데기를 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수천년을 이 땅에 존재하는 유일하게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았던 이들에게 그 껍데기를 깨고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었고 또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복음은 비록 지역을 가리지 않고 퍼져나가기는 했지만 단지 다른 나라에 사는 유대인을 대상으로만 전해졌을 뿐입니다. 

이방선교에 있어서의 고넬료의 역할

하나님께서는 이 틀을 깨기 위해서 한 사람을 세우셨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고넬료였습니다. 고넬료 이방인으로서 유대교를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이방인은 유대교를 믿는다고 해도 정식 유대교인은 될 수 없었습니다. 항상 2류 유대교인에 머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보면 고넬료도 2류 유대교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내용적으로 볼 때는 그 어떤 유대인들보다도 더 유대교인다운 사람이었습니다. 10장 1, 2절을 보면 그에 대해서 “가이사랴에 고넬료라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식민지 군대의 백부장이라면 굉장한 재력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넬료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섬기는 자리에 있었고 게다가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의 어려움까지 힘닿는 대로 도울 줄 아는 아주 깊이있고 균형잡혀 있으며 겸손한 신앙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넬료가 복음을 듣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아주 독특하고 특별합니다. 일반적인 경우에 한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스스로 가거나 혹은 개인적으로 전도하는 사람의 전도를 통해 믿음을 가지게 되는데, 고넬료는 이렇게 복음을 들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넬료는 전혀 복음을 들을만한 상황이 아니었는데 하나님께서 직접 그에게 ‘이러 저러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그로부터 그가 전하는 복음을 들어라’라고, 어떻게 보면 아무 생각도 없는 그를 하나님께서 직접 챙겨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 속에서 베드로가 이런 고넬료를 만나게 되고,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그 자리에서 부어졌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이 두 사람을 만나게 하시기 위해서 양쪽 모두를 준비시키셨습니다. 만약 한쪽이라도 준비가 덜 되어 있었더라면 이 만남은 본문과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나타나지 않으셨다면 고넬료는 결코 베드로를 찾지 않았을 것이고, 미리 베드로를 설득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밝히지 않으셨다면 베드로는 결코 이방인인 고넬료를 만나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서로 자신에게 나타나셔서 미리 준비시켜 주신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결과 베드로는 일차적으로 이방인에 대한 반감을 벗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베드로는 아마도 이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평생 사울 왕과 다윗 왕의 이야기를 들어왔을 테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그저 머리에만 머무는 지식이었을 뿐, 그게 베드로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는 이것이 유대인 뿐만 아니라 온 세상 사람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대원칙이라는 사실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한 순간에 이런 모든 장벽을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그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고넬료였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에게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 그러니까 겉으로 갖춘 신분이나 인종, 혹은 조건 같은 것으로 판단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눈으로 보게하고 가슴에 새겨지게 해 준 너무나 명확한 증거였던 것입니다. 이 때부터 베드로는 신분이나 인종을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고넬료가 필요하다

우리는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한 이야기를 곰곰히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를 향해서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라고 말합니다. 고넬료가 베드로의 닫힌 마음과 눈을 여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한 마디로 “경건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를 통해서 이방인들 중에서도 내용적으로는 유대인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더 온전히 섬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진짜로 귀하게 여기시며 차별없이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온전히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평생 쌓아올려온 편견의 탑을 허문다는 것, 고정관념의 단단한 껍데기를 부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 그것은 어찌보면 죽음보다도 더 강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그게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 때 그 사람은 일종의 득도를 하게 되고 그 사람의 껍데기를 깨고 나오게 됩니다. 목숨처럼 여겼던 그 편견과 고정관념을 벗어던지게 됩니다. 

저는 오늘날 한국 교회를 바라보면서 지금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바로 고넬료 같은  역할을 해 줄 성도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요즘 한국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참 마음이 아픕니다. 어쩌다가 우리나라의 교회가 이런 형편이 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정말 부정적이고 따갑습니다. 얼마나 심한 말로 우리를 비난하며 욕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물론 그들의 그런 반응은 자신도 모르는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반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을 제외하면, 그들이 우리를 향하여 내뱉는 비난 중에는, ‘우리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자신있게 항변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 뿐만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 자신도 비슷한 상황 속에 있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교회를 보면서 욕을 하며 비난하고 있다면 그 교회 안의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실망하고 좌절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좌절은 참된 예수를 믿는 믿음의 능력 자체에 대해서 평가절하하고 오해하게 만들기가 쉽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더더욱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러한 안팎의 고정관념은 반드시 깨어져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교회 밖의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우리를 위해, 세상을 위해 고넬료 같은 역할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 말씀은 액면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게 될 때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비로소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사이의 사랑이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는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증거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조금 큰 틀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우리 자신에 어울리는 선한 평가를 받고 또 존중을 받으려면 그럴만한 삶의 증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 증거가 없다면 절대로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기도 하겠지요. 교회 외부와의 관계에서만 이런 것이 아닙니다. 이런 필요는 우리 안에도, 우리를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존재합니다. 아니 더 절실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보면서,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보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 아니구나. 교회와 기독교에 대한 내 생각이 틀렸었고, 내 판단이 어긋났었구나”하고 하고 바른 깨달음을 갖게 해 줄 사람, “아, 아직은 실망하고 좌절할 때가 아니구나. 저 사람을 보니 신앙이란 것이 그렇게 허약한 것이 아니구나.”하고 그 동안의 절망과 실망을 털어버리고 소망을 회복하게 해 줄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늘날의 고넬료가 되는 법 : ‘...답게 존재하라’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우리는 본문의 고넬료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사람이 되는 일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것과 나아가서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도 배우게 됩니다. 함께 생각해 보며 은혜를 나눌 때, 우리 속에 또 다른 고넬료가 되고 싶다는 그래서 누군가에게 고넬료의 역할을 하고 싶다는 소망과 결단이 되살아 나서 그렇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늘어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대상이나 목표가 구체적이지 못하면 아무리 고상한 표어를 내세운다고 해도 그 일을 실천할 수가 없다는 말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아, 그렇구나. 내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구나.”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아주 바람직합니다. 그런데, 이럴 때 생겨날 수 있는 한 가지 부작용은 우리의 마음이 성급하게 세상 전체로 향하게 되고 “그래,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을 바꾸자.”라고 나서게 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요구하시거나 혹은 “너희가 이 세상을 바꿔라”라고 요구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나를 믿는 너희는 내 안에서 이미 그렇다. 이미 소금과 빛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저 이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 뒤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언제나 맛을 잃어버릴 수 있고 빛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역할을 하지 못해서라기 보다는 변질되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들입니다. 주님께서 믿음 안에서 은혜로 바꿔주신 우리 속사람을 잘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안타까운 일들입니다. 

소금과 빛은 사실 무엇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세상에 소금으로 있고 빛으로 있습니다. 그저 자신의 짠 맛을 잃어버리지 않고 자신의 밝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는데 그게 세상을 위한 놀라운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으로 인해 세상은 새로워지고 회복됩니다. 그러나, 소금이 소금이 되려고 하거나 빛이 빛이 되려고 하고, 심지어는 그렇게 해서 세상을 바꾸려 하기 때문에 세상이 새롭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새롭게 해 주신 자기 자신의 자신됨을 지키려고 하고 그런 자리를 떠나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것이 세상이 새롭게 하고 더 밝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라는 존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하시는 것입니다. 

고넬료도 그랬습니다. 여러분, 그가 자기 힘으로 뭔가 이루어 보려고 끙끙거린 사람이었을까요? 자기 힘으로 세상을 바꿔보려고 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그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자기 삶의 자리에 있었던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가운데 거하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습으로 자기 삶에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은혜에 의지해서 살고 또 자신에게 주신 것을 최선을 다해서 그저 나누고... 그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의 삶을 통해서 베드로의 깨지지 않는 고정관념을 부수셨고 그것을 통해서 복음이 유대인뿐만이 아닌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전파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두보를 마련하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큰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세상을 새롭게 해 보겠다고 헌신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세상을 바꾸고 새롭게 하는데 훨씬 더 효과적이고 빠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그렇게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부족해서 바뀌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개혁해 보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부족해서 교회가 새로워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 교회를 바꿔보겠다고 이야기하고 또 나서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만 자신이 온전히 사람다운 사람으로, 그리고 성도다운 성도로 존재하기 위해 하는 애쓰는 사람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빛과 소금됨을 지키기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 한 번도 너희가 사는 세상을 책임지라고, 너희 힘으로 그 세상을 바꿔내라고 요구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것은 애초부터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저 너는 너 자신답게, 내 자녀답게 네 삶의 자리에 있으라”고 하십니다. “내가 맡긴 일의 결과를 책임지려 하지 말고 과정에만 최선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세상은 내가 내가 알아서 할테니 너는 네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바꾸는 일에 간여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 중심이 될 수도 있구요. 만약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런 역할을 하게 하시면 나는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때라도 그것이 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건 그저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답게 살아가는 삶 속에서 나에게 맡겨진 하나의 역할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문제와 부작용은 우리가 목적과 역할을 혼동할 때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목적과 역할을 혼동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이 세상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상처와 흔적을 남겨놓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답게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방해물 중의 하나가 “나 혼자 이렇게 해 봤자 이 세상이 달라지나?”라는 비관적인 생각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습니다. 회원 여러분, 그런다고 세상이 당장 눈에 보이게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내가 세상을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결코 나에게 맡겨진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얘 그런 생각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소명은 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자기 삶의 자리에 존재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우리는 내가 이런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단정지을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우리의 삶의 한 자락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실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내 가족은, 내 주변 사람들은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만약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을 위한 고넬료처럼 사용될 수 있다면 나를 통해서 언젠가 이 세상에 내가 기대치 못할 큰 변화가 일어날지도 모를 일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런 삶을 통해서 내 자녀들이라도 새롭게 될 수 있다면 그 또한 하나님 앞에서는 무엇보다도 가치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결론 : 오늘의 고넬료로 “존재하자”

고넬료는 그저 가이사랴 한 구석에서 식민지 군대의 지휘관으로 살면서,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을 섬겼던 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최선을 다해 존재했을 때, 그는 자신도 예상치 못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계획을 보게 했으며 복음이 본격적으로 유대인이 아닌 온 세상 사람들에게로 퍼져나가게 하는데 있어서 장애물을 치우고 그 문을 활짝 여는 역할을 하게 되었된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여러분 한 사람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한 사람의 가치와 역할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지만, 그런 우리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세상을 책임지는 것은 우리가 하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더 이상 온 세상을 책임지려 하지 마시고, 그저 나 자신답게 살아가는 일에 집중하십시오. 성도로서 그저 성도답게 살아가면서 그 때 그 때 부르시는 부르심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순종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 언젠가 그 누구에겐가 또 한 명의 크고 작은 고넬료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충분히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을 산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충분히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간 것이 될 것입니다. 언제나 누군가에게 고넬료가 될 수 있다는 이 기대를 품고 이 소망을 포기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한 사람의 성도로서 길을 갈 때, 나를 통해 이 세상은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고, 교회와 성도는 소망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이 일에 가치있게 쓰임받는 평범하지만 위대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