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성경 묵상

2012.01.05.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시편 125편입니다.
     

     기초가 견고하지 않으면 결코 견고한 존재가 되고 견고한 삶이 될 수 없다. 견고하지 않은 기초 위에서는 오히려 더 견고해 지려고 노력하는 노력이 오히려 자신을 더 위험하게 하고 결국 스스로를 허무는 그런 노력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가 기초삼고 있는 것은 결코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을 지탱해 줄 견고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자신의 존재가 그리고 자신의 삶이 영원히 견고한 것이 되기를 원한다면 자신을 그렇게 될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잘 분별해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는 것에 자신을 정초시켜야 한다.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 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시온 산과도 같다. 그런데 그 시온산은 두 가지 견고함을 가지고 있다. 요동치 않는 견고함과 영원히 있는 견고함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항상 함께 있을 수 밖에 없다. 요동치 않아야 영원히 있을 수 있고, 영원히 있는 것만이 요동치 않을 수 있다. 이러한 견고함은 시온산 자체의 견고함이 아니다. 그것은 여호와께 기대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견고함이다. 참으로 여호와께 기대어 있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견고함이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기 때문에 생겨나는 견고함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견고함을 어떻게 허락하시는지를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행히도 시인은 자신의 경험 속에서 그것에 대한 귀한 진리를 가르쳐 준다. 

“악인의 권세가 의인의 업에 미치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으로 죄악에 손을 대지 않게 하심이로다” 

‘의인의 업...’ 여기서 의인이란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125:1)’이다. 우리는 스스로 의를 만들어 낼 수 없다. 하나님께 의지할 때만 의를 덧입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서 ‘의인’이라고 불릴 은혜를 얻게 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업’을 주시고 그 업에 악인이 손을 대지 못하게 하신다. 그런데, 그 방법이 독특하다. “이는 의인으로 죄악에 손을 대지 않게 하심이로다(125:3)” 하나님께서 의인들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하시는 일은 물리적으로 재산을 보호하시고, 건강을 지켜주시고, 산업이 잘 되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 분은 의인이 죄악에 손을 대지 않게 해 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의인에게 주시는 기업을 빼앗기지 않게 해 주신다. 그러니까 우리의 생명이 보호되고, 산업이 지켜지며 재산이 보호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않게 보호해 주신 일의 결과이지 의인의 삶에 곧바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자. 하나님께 의뢰하는 자는 의인이 되어 의인의 업을 얻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의인의 업을 지키셔서 요동치 않게 해 주시는 방법은 그가 악에 손을 대지 않게 하심으로써 그가 악인이 되어 의인만이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빼앗기지 않도록 해 주시는 방식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생각할 때도 항상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악을 택하고 악인이 가는 길을 갈 때는 우리의 견고함이 되어주지 못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악에 손을 대고 스스로 허물어지는 길을 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지켜주심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뢰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삶의 방식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 아니라 불신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분을 신뢰한다면 그 분이 제시하는 삶의 방향을 따르게 되어 있다. 그럴 때 그 분이 약속해 주신 복을 얻을 것을 기대하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선인에게와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선을 행하소서” 

누가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 정직하지 않은 자가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 악한 길로 가는 자가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 물론 가능은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는 그가 간구하는 복에서 자신을 제외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이다. 그래서 이 기도는 ‘선인’, 그러니까 ‘하나님께 의뢰하는 사람’, ‘죄악에 손을 대지 않는 자’, ‘마음이 정직한 자’의 기도일 수 밖에 없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완전한 개념에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이 기도와 이 기도의 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완전함이 아니라 삶의 태도이며, 끊임없는 싸움이다. 악인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뢰하려고, 죄악에 손을 대지 않으려고,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께 정직하려고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태도이다.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를 여호와께서 죄악을 짓는 자와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길이 다르면 함께 다니는 사람들도 다를 수 밖에 없고, 그들고 함께 도착하는 종착역도 다를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를 정직한 길로 가는 자와 함께 걷게 하시지 않는다. 똑같은 목적지에 도착하게 하시지 않는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로다”

이스라엘,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 비록 지렁이 같은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 져 주셔서 하나님께 이기게 된 사람들... 하나님께 항복함을 통해 하나님의 져 주심을 얻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들... 이 사람들이 평강을 누린다. 그 평강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그 분 앞에서 자신을 내려놓음으로써, 그 분께 온전히 신뢰하고 의탁함으로써 그 분을 이긴 사람들만이 누리는 ‘전리품’이다. 세상 속에서 이전투구를 벌이는 사람들은 결코 평강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하나님과 싸우는 사람만이 평강을 알 수 있다. 그 영원하신 하나님과 싸워 완전히 짐으로써 이긴 사람들만이 영원한 평화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평강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의 것이다. 그래서 평강은 이스라엘의 것이다. 그 평강이 있는 사람만이 견고하다. 요동치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 다른 곳에서는 그러한 평강을 기대할 수 없다.

    “이스라엘에게만 평강이 있을지어다”
 

- 하나님,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만이 하늘의 평강 속에서 요동ㅊ 않는 견고함을 누릴 수 있음을 알게 하소서. 그 견고함만이 소멸하시는 불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영원히 서 있게 해 줄 수 있음을 확신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