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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1.18.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장 1-25절입니다. 


     복음은 ‘어영부영한 것’이 아니다. 대충 은혜나 주려고 감동적으로 기록한 창작물과는 전혀 다르다. 누가는 누가복음을 쓰면서 ‘사실’이라고 말하며 ‘목격자들이 전해 준 그대로’ 쓰는 것이 누가복음을 쓰는 목적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누가는 그 모든 일을 면밀히 검토했다고 말한다. 누가의 목적은 바로 이것을 전하는 것이었다. 우리도 누가복음을 읽을 때, 누가복음이 사실의 기록임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할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은 진짜 있었던 일들이다. 복음은 그 사실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객관적인 것이다.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없이 행하더라”(6절)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 이들은 ‘당대의 의인’이었다. 주의 모든 계명과 규래대로 흠없이 행했다는 것이 이 두 사람에 대한 성경의 평가다. 우리는 의인을 믿음으로만 되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되기도 하지만 믿음으로 살기도 한다. 믿음으로 사는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의 당연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7절)

의인에게 태의 열매가 없다. 성경에는 이런 경우가 수없이 기록되고 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고 하셨는데, 이상하게도 의인에게 자식이 없다. 당연히 있어야 하고 더 많아야 하는 사람에게 자식이 없다. 그러면 약속은 깨어진 것인가? 그렇지 않다. 상황은 절망적이다.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나중에 가브리엘이 언급하듯이 생물학적으로, 상식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그러한 절망적이고 가능성 없어 보이는 상황에 대한 언급은 단지 그렇다는 것이지 그래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상황 속에는 인간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개입해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물어야 한다. “So what?”, “그래서 어쨌는데? 그게 뭐 어떻다고?” 이렇게 물으면 성경은 항상 대답해 준다.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13절)

“네 아내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이것이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전한 소식이었다. 우리는 성경이 이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사가랴에게 아들이 생기는 것은 정말 기대못할 은혜이다. 하나님은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사가랴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사가랴에게 아들을 주시기로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간구는 어떤 간구였을까? 아들에 대한 기도가 아니었을까? 그러니 그 기도를 들으시고 아들을 주셨고 말이다. 사가랴는 그 기도를 끊임없이 드려왔었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듣고 계셨다. 그리고 이제 그 기도가 응답되고 있다.  의인은 소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기도한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요한은 그런 기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 온 메시야를 위한 예비자였다. 기도는 응답될 때까지 해야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게 드리는 기도는 기도 드리는 대로 응답될 수도 있고, 전혀 다른 것으로 응답될 때도 있지만 그렇게 기도드려온 사람은 하나님의 응답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순종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까지 얼마나 많은 의인들의 간구가 있었을까? 다 끝나버린 것같은 역사 속에서, 500년이 넘는 침묵 속에서, 그 긴 불임의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의인들이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렸고,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을 갈망했을까? 물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오셨다. 그러나, 그 분의 오심은 이런 의인들의 포기를 모르는 간절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아니었을까? 의인이여, 절망하지 말자. 절망스러울수록 절망하지 말자. 하나님이 계신다면 상황은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결정적이시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18절)

사가랴는 지금껏 아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그 결과 아들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데, 사가랴는 그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기도할 때는 견고했던 신앙이 그 기도가 응답되는 순간에 연약해 진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저 사가랴 또한 한 명의 불완전한 인간임을 말해주는 일화일 뿐이다. 소망을 품고 믿음을 가지고 어찌보면 불가능한 일을 놓고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기도하던 일이 눈앞에 펼쳐지면 그것을 못 미더워한다. 이것은 불신앙이 아니다. 그저 인간의 신앙이 그럴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믿음에 대해서 겸손해야 한다. 우리 믿음에는 항시 우리 경험과 이성의 한계 내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려는 인간적인 요소가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 믿음조차도 온전치 못하고 흔들리게 마련인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그들의 믿음을 회복시키고 견고케 하셔서 흔들리지 않게 해 주시려고 오셨다. 믿음에 있어서도 현재 상황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 속에는 항상 불순물들이 섞여 있고 그것 때문에 이렇게도 저렇게도 움직일 수 있다. 우리가 겸손히 부족함을 인정하고 믿음을 위한 싸움을 싸워나갈 때, 그리고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실 때 그 흔들림이 줄어들 수 있을 뿐이다.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20절)

이것은 사가랴가 가브리엘의 말을 흔쾌히 믿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받게된 일종의 ‘징계’였다. 설교자요 교사로서 느껴지는 것이 있다. 믿지 못했기 때문에 말을 못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금지당했다는 것이다. 때로는 목사이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도 말해야하고 가르쳐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 원리에서 보면 그건 정상이 아니다. 어쩌면 그러한 나의 모습이 다른 이들을 위한 걸림돌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사람은 그것을 믿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야 그 뜻이 오해되지 않고 걸림돌 없이 전해질 수 있다. “때가 이루면 내 말이 이루리라” 그렇지만 내가 믿든 믿지 않든 상관이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게 해서 스스로가 진리임을 증명해 낼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스스로 증거할 것이다. 너무 다행이다. 내가 믿지 못해도 하나님의 뜻은 결국 이루어질 것이니 너무나 다행이다. 물론 이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전하는 자에게만 묶여있지 않을 것이니까. 믿는 자가 말해야 하지만, 믿지 않더라도 성취된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이 가지는 양면성이며, 역설이다. 묶인 듯하지만 묶여있지 않은 그런 성격 말이다. 그러나 믿는 자가 말한다면 그것은 가장 바람직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럴 때 전하는 자는 그 말씀을 위해서 온전히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이 이야기하는 복음도 마찬가지이다. 복음이 말하는 바는 복음 스스로, 하나님 스스로 이루실 것이다. 그러나 그 복음은 그 복음을 온전히 믿고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전해질 때 더 능력있고 온전하게 전해질 수 있으며 또 일할 수 있다. 

“이 후에 그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가로되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24-25절)

엘리사벳의 수태는 마리아의 수태를 향해 있다. 엘리사벳의 수태는 마리아의 수태가 거짓이 아니라 충분히 가능한 일임을 증거하는 증거다. 나이 많은 노인이나 처녀나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둘 더 어느 것이 더 불가능하다고 할 수 없다.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 태어났다면,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위해 길을 닦아 준 것이다. 또 동정녀 잉태를 향한 우리의 믿음을 돕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길이기도 했다.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이것은 엘리사벳 개인의 고백이기도 하지만 복음을 듣고 믿는 우리 모두의 고백이기도 하다. 복음은 우리의 부끄러움을 제거해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들려지는 것이다. 인간 앞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말이다. 우리 힘으로 그 부끄러움을 없애는 것은 엘리사벳이 요한을 잉태하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도 소망을 잉태할 수 없었고 회복을 출산할 수 없었다. 그러나 복음이 들려졌고 그 불가능하던 ‘불임’이 해결되었다. 이제 부끄러움은 없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이킨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하나님, 의인이 되었으니 의인으로 살게 하소서. 이 땅에서 하늘의 뜻을 행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그리고 믿음을 주소서. 믿음 없음을 도와 주소서. 복음을 온전히 믿게 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로 신뢰하게 하셔서 그것을 전할 수 있는 더 좋은 통로가 되게 하소서. 그러나 내가 부족할 때에라도 하나님의 뜻은 스스로 이루어짐을 믿게 해 주소서. 그래서 자신의 부족함을 보며 결코 좌절하지 않게 하소서. 또 복음이 나를 해방하였음을 믿게 하소서.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나의 부끄러움이 제거되었음을 믿게 하시고, 다시는 그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지 않게 하소서. 내 인생의 ‘불임’이 해결되었음을 알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