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요한복음 17장 02-03절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불리는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를 드리실 때,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때보다도 행복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막 닥쳐올 십자가를 눈 앞에 놓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꼭 하셔야할 일들을 거의 완수하신 후에 이 기도를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실 때,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권위를 그 손에 쥐어 주시고 나서 보내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 엄청난 능력을 다 어디 쓰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기적을 베풀라고 그랬을까요? 사람들을 고치고 돕고 놀라운 일을 행하라고 그러셨을까요? 물론 예수님의 능력,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손에 맡기신 하나님의 모든 능력은 그런데도 사용되었지만 사실 그 모든 일들을 행하신 것도 실은 단 한가지 이유 때문에 행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맡기신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 그러니까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일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총동원 되셔서 이루신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 일을 이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것은 예수님이셨지만 그 일을 이루는데는 세 분이 함께 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예수님은 그 계획을 순종으로 이루시고, 성령님은 그 구원과 영생을 우리 영혼에 적용하시는 일과 또 계속해서 그 구원을 더 견고하게 해 주시는 일을 행하십니다. 제가 이런 설명을 드리는 것은 우리도 주님처럼 우리의 구원과 영생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저는 성도들의 신앙에서 기쁨과 생명력이 사라져 가는 이유들이 많이 있겠지만 실제로 우리에게서 영생에 대해서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사라져 가는 것이야 말로 우리에게서 신앙의 기쁨과 생명력이 사라져 가는 가장 큰 이유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삼위 하나님 전체가 그 어떤 일보다도 소중하게 여기시고 최선을 다하셨는데, 우리가 그 영생을 그다지 소중히 여기고 있지 못하고 우리의 영생에 대해서 무덤덤하다면 그건 뭔가 앞뒤가 바뀐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우리의 상태가 이렇다면 우리는 꼭 영생을 진실로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회복해야 하고, 그래서 기쁨과 신앙의 생명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이제 희미하게 나마 제자들이 영생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셨기 때문에 느끼신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모든 능력을 쏟아부어 드디어 열매다운 열매가 맺혀지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 영생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니 아마도 영생에 대한 가장 정확한 말씀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영생이라고 하면 나중에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가는 것을 생각하지만 사실 성경의 영생은 이 땅에서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도 점점 더 풍성하고 온전하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영생에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이 하늘의 일일 뿐만 아니라 땅의 일인 이유, 그리고 땅에서 점점 더 온전해지고 풍성해 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안다는 것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더 깊어지고 풍성해 질 수 있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영생을 받는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사실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참으로 예수님을 알게 되고 또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게 되기 시작한다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때 얻는 영생은 완전한 것도 풍성한 것도 아니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생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더 확실해지고 더 풍성하게 누려지게 되어야 한다는 뜻이 될 것이구요.
주님께서는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더 잘 알고, 더 깊고 풍성하게 알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는 영생도 더 온전해 지고 풍성해질 것이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두 분을 점점 더 많이 그리고 풍성하게 알아가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하는 ‘안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단순히 ‘머리로 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안다는 말을 자꾸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성경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서양식의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서양식의 앎은 1+1은 2라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은 지식을 뜻합니다. 아주 객관적이고 비인격적인 지식이죠. 그러나 성경의 앎은 항상 경험하여 안다는 것, 인격적으로 안다는 것을 뜻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안다, 예수님을 안다고 했을 때는 항상 이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님을 더 많이 알아야 한다고 했을 때, 그 말은 두 분을 알되 경험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더 많이 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하고 만난지가 벌써 7개월이 다 되어 가는데요. 이제 좀 저를 아시겠습니까? 시간이 흐를 수록 조금씩 조금씩 더 알아가고 계시죠. 그런데, 그 앎이라는 게 단순히 저에 대한 수치적인 자료들을 아는 것은 아니죠? 제가 어떤 인간인지, 성격은 어떤지, 또 장점은 뭐고 단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신뢰할만한지 그렇지 않은지 그런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 하나님과 예수님을 더 많이 그리고 깊이있게 알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더욱 더 많이 알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간은 사실 알면 알수록 별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알면 알수록 매력적입니다. 알면알수록 사랑스럽습니다. 게다가 두 분은 알면 알수록 실제적으로도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하고 더 만족스럽게 합니다. 왜냐하면 두 분을 아는 것은 결국 두 분을 향한 믿음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고 그러면 그 믿음을 통해 두 분의 은혜와 능력이 우리 삶으로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이것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이 주는 진짜 복은 바로 영적인 풍성함입니다. 영적인 만족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 영혼에 직접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를 진짜로 만족하게 하고 풍성하게 해 줍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부어주시는 그 은혜는 끝도 없고 결코 질리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생이 날마다 더 풍성해져 가고, 날마다 더 온전해져 갈 수 있는 이유는 그 영생이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이 끝이 없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면서 살 수 있는 영생의 풍성함과 깊이도 결코 끝이 없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똑같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다 다른 풍성함과 견고함을 누리게 되는 이유, 그리고 기쁨과 만족도 다 다른 이유는 바로 그 사람이 지금 이 땅에서 누리는 영생의 풍성함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님을 알아가고 또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과 경험을 통해서, 또 믿음을 통해서, 그리고 영적으로도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그래서 우리가 두 분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며 보는 것처럼 온전히 알게 될 때까지 이 땅에서도 두 분 하나님을 더 온전히 알아가야 하며, 그래서 더 풍성한 영생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영생의 기쁨과 자유 그리고 풍성함과 만족함, 그리고 능력을 점점 더 온전하게 누리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항상 이 일에 있어서 자라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고 믿고, 성경을 묵상하고, 또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이 땅에서 누리는 여러분의 영생이 여러분의 기쁨과 만족, 그리고 능력의 이유가 되게 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 일에는 끝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일도 하나님을 아는 일도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영생을 이 땅에서도 가장 풍성하게 누리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