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날을 기념하는 성금요일 수난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들을 하나 하나 함께 묵상하면서 그 의미를 새기며 또 함께 기도하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들을 살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시고 또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마음을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 1 언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장 34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십자가를 둘러싼 사람들의 교만과 표독스러움은 극에 달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은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는 동안 그 아래에서 계속해서 예수님을 빈정거리며 놀려댔습니다. 유대인의 관리들은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라고 빈정거렸고 군인들은 예수님께 신 포도주를 주며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놀려댔습니다. 인간의 악함과 잔인함은 죽어가는 사람을 비난하고 놀림감으로 삼을만큼 뿌리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사람들은 극악했습니다. 잔인하고 몰인정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지금 죄없이 죽어가면서 그들의 악독함 때문에 더 깊은 상처를 받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런 고통 중에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힘겹게 하신 첫 마디는 그들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저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니 하나님께서는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셔야 한다는 기도였습니다. 용서는 구원을 뜻합니다. 그러니 이 기도는 그 악한 사람들을 구원해 달라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그들도 불쌍히 여겨 주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백성이 되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이 세상에 대제사장으로 오신 목적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고통과 마음의 상처가 아무리 심해도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평화로 오셨던 자신의 소명을 잊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십자가의 제단에서 대제사장으로서 중보의 직분을 온전히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는 나중에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성취됩니다. 베드로가 성령충만하여 “여기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라고 설교하였을 때에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려 회개하였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던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그리고 수많은 범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 있는 것은 우리의 거룩하고 순결한 삶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무지와 범죄함을 불쌍히 여기시며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셨고 또 기도하고 계시는 중보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며 용서해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은혜 가운데 사는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하는 사람들의 작은 잘못이나 실수도 너그럽게 용서하지 못합니다.
이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의 첫번째 말씀을 생각하면서 무지와 고집으로 행한 죄들을 용서해 주심을 감사드리겠습니다. 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혹시 마음에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나를 용서해 주신 그 용서에 힘입어 우리도 용서하는 사람들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드리겠습니다.
제 2언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장 43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의 양 옆에는 함께 달린 죄인들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악함이 어디까지 얼마나 뿌리깊고 끈질긴지, 그 중의 하나는 자신도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향해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다행히 다른 한 사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꼭 보아야 할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는 사람을 크게 나무란 후에 예수님께 이렇게 간청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이 사람은 십자가에 달려 벌레같이 죽어가는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구원자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자신을 하늘나라로 인도해 주실 수 있는 권세를 지니신 분이시며 또 그렇게 해 주실만큼 선하신 분이심을 고백하며, 구원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실 분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하늘나라로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 덕분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왕의 보좌가 될 수 있었습니다. 재판관의 영광스러운 재판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실 수 있는 왕으로 왕다운 대접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처참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자신의 백성을 되찾았던 것입니다. 자신을 영원한 왕으로, 구원자로 믿는 믿음의 사람을 만났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죄수는 미래를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은 ‘오늘’을 말씀하십니다. 보증서까지 붙여주시며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짧은 순간 가장 영광스러운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어떤 상황, 어떤 순간이든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 예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셔서 하늘나라로 인도해 달라고 간구하는 사람의 믿음의 고백을 가장 기뻐하시며, 또 그 사람을 하늘나라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온 우주의 재판관이시며, 모든 이들의 영원한 운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영원한 낙원으로 이끌어 들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일은 심판과 멸망이 아니라 영생을 주시고 구원을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우선 우리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언제나 우리 주님이 나의 구원자이시며 마지막 재판관이심을 잊지 않게 해 달라고. 우리를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낙원으로 인도해 주소서. 또한 주변에 있는 주님을 거부하고 거절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그들도 구원받은 강도처럼 예수님께로 돌이키게 하시고 구원얻은 하늘나라 백성이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리겠습니다.
제 3언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한복음 19장 26-27절)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는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 몇 사람만이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남자로서는 유일하게 자신을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소개하는 요한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다 떠나가고 이 사람들만이 예수님 곁을 끝까지 지켜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깊고 컸던 만큼 이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도 깊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이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도 찟어지듯이 아팠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스러운 마지막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그저 내려다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프고 고통스러운 사랑, 가장 깊고 진한 사랑이 있었던 자리였는지도 모릅니다. 이들을 바라보시던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 요한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마리아의 아들로 살아가셨습니다. 그에게서 태어났고 그에게서 양육받았습니다. 이제 마리아는 혼자가 됩니다. 게다가 예수님도 떠나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아들을 만들어 주십니다. 대신해서 돌보고 또 사랑해 줄 아들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요한에게는 마리아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네 어머니다” 이것은 단지 예수님의 어머니를 요한에게 맡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했기에 가장 큰 상심과 아픔을 당할 수 밖에 없는 두 사람을 가족으로 묶어주는 일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사랑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그 극심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헤아리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으로 인해 가장 크게 슬퍼할 두 사람을 한 가족으로 묶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 속에는 한가지 더 깊은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마리아를 ‘여자’라고 부릅니다. 물론 이 여자라는 말은 존칭입니다. 하대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굉장히 공적인 의미를 가진 호칭입니다. 가족관계를 떠난 표현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왜 마리아를 그런 식으로 불렀을까요? 그것은 이제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더 이상은 아들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부르심으로써 마리아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머니, 이제부터 저는 어머니의 아들이 아닙니다. 이제 어머니는 나를 믿는 믿음으로 사셔야 합니다. 나를 당신의 구원자요 모든 것이 되는 메시야로 믿고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부터 어머니는 저를 믿는 여인으로 사셔야 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아들입니다. 네 어머니다.’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관계는 말 한마디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 한 마디로 가족을 만들고 계십니다. ‘아들입니다. 네 어머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가족이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그 때 예고되고 말씀되었던 가족이 이제야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십자가 아래서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서로 의지하며 사랑하며 하나가 되어 살아가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의 보혈을 통해 새로운 혈통을 가지게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그 때부터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시고 돌보았습니다. 아마도 요한은 마리아를 돌보는 일 때문에 제자로서의 소명을 충실히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이방으로, 다른 도시로 돌아다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요한에게 맡겨진 소명이었습니다. 한 사람, 온 세상을 위해서 아들을 내어준 한 여인을 어머니로 돌보는 일 말입니다. 요한은 사랑의 사도입니다. 그가 사랑의 사도가 된 것은 추측컨데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또 마리아를 돌보면서 배운 사랑 때문이 아니었나 합니다. 그는 마리아를 돌보면서 그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닮은 사랑을 배웠던 것입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닙니다. 사랑은 동사입니다. 아무리 사랑이 무엇인지를 정의내린다고 해도 사랑하게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게 될 때,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은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라고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없던 새로운 가족을 만드셨습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사랑도 깊어져야 합니다. 서로를 향한 사랑의 헌신도 깊어져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보라 네 어머니다.”라고 하시는 “당신의 아들입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로서 우리를 가족으로 부르시고 묶어주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먼저 한 가족이 되어서 서로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겠습니다. 한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닮은 사랑을 연습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주님께서 이 땅에 남기신 하나의 가족으로 새롭게 빚어져 가겠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큰 일 하지 못해도 요한처럼 내 곁에 나에게 맡기신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하겠습니다.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 마음을 사랑으로 채워주시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결단을 하게 하소서. 기도하겠습니다.
제 4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태복음 27장 46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엘리야를 찾는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의 도움을 받으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 속에는 십자가 때문에 감당해야 했던 예수님과 하나님의 가장 큰 고통과 담고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십자가는 형틀이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달려야할 자리에 예수님께서 달리신 것이기는 하지만 십자가는 분명 형틀이었습니다. 세상 법으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그랬습니다. 죄인들에 대한 모든 저주를 그 십자가, 그리고 그 십자가에 달리신 아들의 가냘픈 몸에 온통 쏟아부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 고생스러운 삶과 오해, 그리고 핍박을 견디어 내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계신다는 확신과 하나님께서 그런 자신과 늘 함께 하신다는 확신으로 그 모든 것을 견디어 오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했던 십자가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아들로 부터 고개를 돌려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곳에서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를 느끼실 수 없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은총의 자리가 아니라 저주의 자리였고, 죄 때문에 버림받는 자리였기 때문에, 십자가의 모든 고통과 어려움은 모두 다 예수님께서 홀로 감당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단지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쓰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만 하는, 결코 버림받을 수 없는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던 영적인 고통은 십자가의 고통 중에서도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런 고통을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들을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에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제대로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고통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들은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복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고통을 감수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자녀의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됨, 우리의 복, 우리의 기쁨은 모두가 다 예수님의 버림받으심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런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께 버림받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십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떠나버리셨고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버리실 수가 있느냐고 절규하는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은 여전히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붙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이 아무리 큰 들,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고통에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있지도 않고 세상이 알 수도 없는 그런 엄청난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순간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마다 두 가지를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우리는 우리 예수님께서 버림받은 대신에 하나님께서 도로찾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우리 주님이 버리실 리가 없습니다. 아들을 내어주시고 다시 얻은 귀한 자녀들인데 우리를 버리실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완전히 버림받은 듯이 여기지는 그 순간에도 결코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통이 십자가 위의 예수님의 영적인 고통보다 크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버림받은 것이 아닙니다. 둘째로,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버림받았을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예수님의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변함없는 진실입니다. 상황은 결코 하나님의 나의 하나님되심, 나의 아버지되심을 취소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제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 진심의 감사를 드리십시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저주받고 버림받으심으로써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저주하고 버리심으로써 우리들을 당신의 자녀로 받아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두번째로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하나님’이시며, 나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취소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삶의 어려움이나 고통이 결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고 떠나신 것의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에 버림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달라고, 상황이나 현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믿고 살아가게 해 달라고, 이 믿음이 결코 흔들리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드리겠습니다.
제 5언 : “내가 목마르다”(요한복음 19장 28절)
십자가에서 온 몸의 물과 피를 쏟으셔야 했던 예수님에게 영적인 고통 다음으로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아마도 목마름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결코 목마름을 느끼실 필요가 없으셨던 그 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채로 바싹 바싹 타들어가는 갈증을 견디어 내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 갈증은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었고, 결국 숨을 거두시기까지 온전히 예수님 자신의 몫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인생의 문제는 갈증의 문제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채울 수 없는 갈증을 해결하고자 터진 웅덩이를 파면서 살아갑니다. 돈의 웅덩이, 권력의 웅덩이, 명예와 명성의 웅덩이, 쾌락의 웅덩이를 여기 저기 파 보지만 결국 거기서는 자신의 갈증을 온전히 해결해 줄 생수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자기 힘으로 판 웅덩이는 금새 매말라 버리고 밑이 터진 웅덩이어서 물을 담아놓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물들 또한 마시면 마실수록 더 목마르게 하는, 더 깊은 갈증을 느끼게 하는 소금물과 같습니다. 더 욕심내게 하고, 더 집착하게 하고, 그래서 더 불만스럽게 만드는 그런 물들입니다. 예수님은 수전절에 예루살렘에 가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 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예수님을 믿는 것만이 우리 배에서 샘이 터져나오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갈증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그저 공짜로 된 일이 아닙니다. 이사야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목마름은 무엇을 위한 목마름이었을까요? 바로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기 위한 목마름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목마르므로 우리가 해갈을 얻었도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분을 마셔야 합니다. 우리 속에 들어와 샘근원이 되시도록, 배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되시도록 말입니다. 우리가 그 분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 분의 목마름은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되 예수님이 나의 전부가 되실 때까지, 정말 그 분이 내 안의 갈증을 모두 해결해 주실 때까지, 그 정도로 온전히 믿어야 할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그 분의 영광을 위해서 말입니다.
이제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목마름을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우리 속에 들어와 속에서 솟아나는 샘근원이 되어주시기 위해서 그 극심한 갈증을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목마르고, 여전히 불만족스러워하며, 그래서 계속해서 내 힘으로 웅덩이를 파려는 시도를 한다면 그것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목마름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 될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절실히 믿게 해 달라고. 정말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믿음으로 주님께서 나의 갈증을 대신 감당하셨음을 믿게 해 달라고 기도드리겠습니다.
제 6언 :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장 30절)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셨습니다. 율법을 다 이루셨고, 구약의 모든 약속을 다 이루셨고 우리에게 덧입혀 주실 하나님의 의를 다 이루셨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속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이루셨습니다. 지금 여기서 영생을 누리며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이루셨고, 우리가 나중에 영원한 하늘나라에 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이루셨습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을 주시려고 그 모든 것들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 주님으로 인해서 하늘영광으로 가는 길이 활짝 열렸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길도 활짝 열렸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다, 전부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심으로써 우리를 위한 구원의 문도, 우리가 항상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도,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모든 은혜의 통로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그 어떤 것도 막힘이 없이 활짝 열려졌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완전한 의가 되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내 공로는 없습니다. 내 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이루신 주님의 의요 주님의 공로입니다. 구원도, 은혜도, 복도, 삶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것도 모두가 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바로 이 은혜에 의지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나를 위한 모든 것을 이루셨음을 믿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래서 항상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되 주님의 다 이루신 은혜와 공로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다 이루신 모든 것을 믿음을 취하는 근심과 두려움이 없는 풍성한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제 7언 :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누가복음 23장 46절)
이것이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하나님께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안함에서 나온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장 견고한 신뢰로부터 나온 가장 평안한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사실 때도 항상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의지해서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와 능력을 사용하시면서 그렇게 살아가셨습니다. 이제 그렇게 모든 것을 이루신 주님은 자신의 영혼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고 있습니다. 죽음과 죽음 이후의 모든 것까지도 하나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로, 하나님께만 맡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부족함과 고난, 그리고 십자가의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참된 평안을 유지하실 수 있으셨던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철저히 의지해서 살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했고, 결국 마지막에는 가장 든든한 하나님의 손에 자신의 영혼을 맡기심으로써 이제는 영원한 평강 가운데로 들어가고 계십니다. 이제야 말로 다시 영원하고 완전한 안식으로 돌아가고 계십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단지 구원자로만 오신 것이 아닙니다. 두번째 아담이 되시는 것, 그러니까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다시 보여주고,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해 주시는 것 또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 속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의 모범답안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살아가셨던 방법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 하나님이 전부인 삶을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은 능력있고 풍성했으며, 이 땅의 수많은 고통과 고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참된 평강가운데 머물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 육신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그 순간에 아버지께 자신의 영혼까지도 의탁하는 그 신뢰가 예수님을 바위같은 분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위한 정답입니다. 반석이신 주님을 의지할 때, 흔들리지 않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이 되게 할 때, 그 때 주님은 하늘의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음까지도 우리를 위한 은혜로운 교훈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영혼까지도 아버지되신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야 말로 흔들리는 이 세상에서 흔들림 없이 평강가운데 사는 방법이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 시대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참된 믿음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에게도 주님처럼 아버지 하나님께 생명의 문제까지, 영생의 문제까지 불안해 하지 않고 담담하게 맡길 수 있을 정도의 큰 믿음을 달라고, 주님처럼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며 이 흔들리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