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일0101to04 - 태초부터 있었던 생명의 말씀(요일1).pdf
본 문 : 요한일서 1장 1-4절
우리가 믿는 믿음의 탁월한 점은 우리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자신에 대해서 “내가 곧 하나 밖에 길이요 하나 밖에 없는 진리요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이라”고 선언하셨다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굉장한 유익입니다. 여러가지 길 중에서 하나를 택하기 위한 수고를 할 필요가 없으며, 스스로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 애쓸 필요도 없고 생명을 얻기 위해서 여기 저기 뒤적 거리며 찾아다닐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예수님의 삶을 흉내내고 예수님을 우리 안으로 모셔들이면 됩니다. 쉽게 말해서 무엇을 원하든지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붙들면 됩니다.
이 원리가 변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태초부터 있었던 생명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이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 생명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만 붙들면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생명의 말씀은 그저 보이지 않는 말씀, 하늘나라의 진리로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모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그 말씀은 육신이 되신 임마누엘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 말씀을 들었을 뿐아니라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생명의 말씀은 스스로를 완전히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사셨고 그들에게 똑똑히 보여주셨고 만질 수 있게 까지 해 주셨습니다.
요한은 직접 그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그렇게 보고 듣고 만졌지만 우리도 어떤 의미에서는 마찬가지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런 복은 우리가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성경을 읽을 때도 누려지게 되지만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볼 때도 예수님은 오늘도 생생하게 살아계신 분으로 느껴집니다. 그것은 오히려 육신의 눈으로 보고, 육신의 손으로 만지고, 또 육신의 귀로 듣는 것보다 훨씬 더 명확하고 구체적이며 세밀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 속에 들어오시고 그렇게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으로써 우리에게 자신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제자들에게 스스로를 나타내셨던 말씀이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날도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주시는 이유, 사도들을 통해 기록된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보게 하시고 알게 하시며, 직접 성령님을 통해 우리 속에서 예수님을 경험하게 해 주신다면 그것은 누구와 사귐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일까요? 당연히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알게 되고 또 경험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시니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마치 잘못 읽은 것 같습니다. 아니면 성경이 잘못 인쇄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성경은 ‘우리’ 그러니까 사도 요한과 같은 예수님의 목격자들이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그들 자신과 사귐이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여기 와서야 왜 사도 요한이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의문이 풀리지만 그 설명 조차가 실은 아주 굉장하고도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 와서도 계속해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그런데, 요한일서에 와서는 그 사랑의 중심이 예수님의 사랑에서 성도들 간의 사랑으로 움직여 갑니다. 움직여 갈 뿐 아니라 성도들의 사랑이 예수님의 사랑의 자리로 옮겨 갑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사귐이라는 말로 바꾸어서 좀 더 생생하게 만든 다음 성도들 간의 사랑을 예수님과의 사랑의 자리에 가져다 놓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과 누리는 사랑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라는 것이 요한일서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첫번째 진리요 교훈인 것입니다. 성경전체를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도들 사이의 사랑을 아주 중요하고 심지어는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현실 속에서 성도들 간의 사랑이란 성도들 사이에 예수님의 사랑이 있다는 증거이며, 또 가장 가깝게 예수님의 사랑을 누릴 수 있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들 사이의 사랑의 사귐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 성도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 이것은 분명히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 열매를 생각하면 성도가 성도를 사랑하는 일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사랑 속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사랑의 교제와 그 교제를 통한 풍성한 누림을 넣어두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성도를 사랑하지 않고서 주님과의 풍성한 교제를 누리려고 하는 것은 마치 씨앗을 뿌리지 않고 열매를 거두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를 사랑하는 일. 그것은 그 누구를 위한 일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저는 이런 성경본문들을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나에게 신앙의 참된 기쁨이 여전히 부족한 것은 내가 아직도 성도들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성도들과의 사랑의 사귐이 없거나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아니 분명히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랑은 성도를 사랑하는 일은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풍성한 교제를 이어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우리가 신앙의 기쁨을 누리리면 우리에게 성도를 사랑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요한일서는 앞으로도 그 이야기를 계속 들려줄 것입니다. 함께 요한일서를 묵상하시는 동안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성도들을 향한 풍성한 사랑이 회복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사귐이 회복되고, 그래서 두 분의 풍성한 사랑이 우리 영혼에, 그리고 우리 삶에 부어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