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0418to24 -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창23).pdf
본 문 : 창세기 4장 18-24절
서양의 윤리와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서양의 도덕과 윤리가 갑자기 쇄락하게 된 시점을 서양이 하나님을 세상의 기준으로 여기던 생각을 버리고 인간을 세상의 중심으로 이해하게 되면서 부터라고 말합니다. 요즘은 진리가 없다는 것이 유일한 진리가 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참 우스운 일입니다. 정말 진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진리가 없다는 주장까지도 주장할 수 없어지는데 말입니다.
이것이 별것 아닌 것 같아도 결국 이렇게 되면 옳고 그름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할 수 없어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이미 타락해서 악해져 버린 인간은 선하고 옳은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더 악해져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밧줄이 풀려버린 작은 배 위에서 아무리 제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고 해도 계속해서 항구에서 멀어져만 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 스스로 하나님 노릇을 하고 싶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하려고 했을 때부터 어찌보면 인간이 가게 될 길은 정해져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 때부터 마치 하류로 떠내려가는 작은 배처럼 계속해서 더 악해져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먼저 가인의 자손을 칠 대에 걸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별로 특별히 기록할 것이 없던 가인의 가문은 7대가 되는 라멕 대에 이르러 비약적인 발전을 합니다. 라멕은 아다와 씰라라는 두 여인을 아내를 맞이합니다. 이미 한 여자가 한 남자가 한 몸을 이루라고 하신 하나님의 창조섭리가 깨지고 있습니다. 많은 여인을 아내로 두는 이유는 많은 자녀를 두려는 것입니다. 자기 세상을 더 크게 늘려가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절부터 22절까지는 그 두 여자에게서 나온 라멕의 자손들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는데, 이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먼저 아다가 낳은 장남 야발은 목축업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 동생인 유발은 악기를 만들고 연주하는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씰라가 낳은 아들은 두발가인인데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로 여러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문화와 산업이 발전한 과정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것은 사실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확장시키는 과정을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손은 하나님의 손을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손에는 무언가를 창조하는 힘과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용될 때는 참 좋은 것이지만 그 힘으로 하나님처럼 되려고 할 때, 그것은 죄가 되고 사람들과 이 세상에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요즘에는 이 영역이 인간의 생명까지 스스로 만들어 보려는 시도로 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세포 하나를 사용해서 그 사람과 똑같은 사람 하나를 더 만들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쪽에서 보면 과학의 발전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것은 인간이 그 영역에서 하나님처럼 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해서 더 교만하고 가증스러운 주장을 하는 것을 보면 다는 아니지만 과학을 발전시키려는 저변에는 바로 이런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과학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런 점에서는 과학이 너무 발전하는 것이 오히려 인류에게 오히려 재앙과 혼란을 가져오게 될까 걱정스럽습니다. 인간이 발전시킨 과학이 바벨탑처럼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징벌하시는 이유가 될까 걱정스럽습니다. 분명히 도를 넘는다면, 그래서 인간이 스스로를 하나님처럼 생각하게 된다면 그렇게 될 것같습니다.
인간의 능력은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커지고 세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고삐풀린 망아지나 황소처럼 그냥 방치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겸손함 안에서 조련되고 제어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꾸 그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미 라멕의 시대에 그런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아들들도 자기 분야에서 아주 탁월한 능력을 갖추었지만 라멕 자신도 그런 분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싸움입니다. 요즘 말로 전쟁의 달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전쟁과 싸움에서 승리한 라멕은 자기 자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만 찬양하게 되어 있었는데, 라멕은 이미 자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지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 노래가 참 충격적입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 이것이 라멕이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지은 노래입니다. 이 노래에서 높이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라멕의 힘이고 또 잔인함입니다. 물론 전쟁과 같은 상황이었겠지만 라멕은 자신이 입은 작은 상처때문에 사람을 죽였고, 또 소년을 죽였다고 노래합니다. 라멕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비함과 흉폭함을 자랑하며 노래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노래를 누구에게 주어서 부르게 하느냐 하면 바로 자신의 아내들입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아들들에게 가르치라는 것이며, 또 자손들에게 전해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대로 기억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정말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전쟁을 하고 승리를 했다는 것을 노래의 내용으로 삼았다면 모릅니다. 그러나 이건 개인적인 무자비함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걸 자손대대로 마치 유산처럼 물려주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자신이 악해지는 것을 통제하지 않으니 몇 대가 지나지 못해서 이만큼 악해지고 만 것입니다.
특히 이 노래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데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가인을 죽이는 사람은 칠 배의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비록 가인이 동생인 아벨을 죽이기는 했지만 그 죽음이 또 다른 죽음을 부르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안전장치였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후손인 라멕은 그 안전장치를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그 칠 자 앞에 칠을 하나 더 붙여서 자신을 해치는 자는 벌을 칠십칠 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벌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라멕 자신이, 혹은 라멕의 노래를 부르며 자란 무자비한 자신의 자녀들이 그 벌을 내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라멕의 모습은 다른 이들의 복수를 두려워 하나님께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간청했던 가인과는 전혀 딴판입니다. 그는 이미 복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는 더 이상 복수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요. 또한 그가 칠십칠 배의 벌을 호언장담한 것은 더 이상 원수를 갚는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작은 악이라도 피하고 또 다스려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여 끌어들여진 악은 절대로 작은 악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악은 자꾸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두고 보아도 그렇지만 한 사람의 인생 속에서도 그렇습니다. 무관심하고 조심하지 않으면 그 죄와 악은 뿌리를 내리고 큰 나무로 자라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 사람 속의 하나님의 형상을 망가뜨리고 그의 가족, 그리고 그가 속해 있는 사회 전체의 모습을 일그러 뜨리고 맙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가인 가족의 역사를 여기 기록해 놓으신 이유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가인 가족의 역사는 그 누구의 삶 속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는 것과 그래서 믿는 우리가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라고 믿습니다. 이미 타락한 인간은 그냥 내버려 두면 가인의 자손들처럼 점점 더 빠르게 하류로 떠내려가는 배처럼 점점 더 악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것을 알아차리고 스스로 파수꾼이 되려고 하지 않으면 우리 삶도, 우리의 가정도,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사회도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지고 또 점점 더 악해져 가는 그런 모습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선 자기 자신을 위한 파수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스스로를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와 권면으로 가정을 지키시고 또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시는데 기쁘게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깨어 기도하며 겸손하게 살 때, 그리고 스스로 원수 갚으려는 마음들을 다스려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몸짓들을 떠밀려 가는 우리들과 우리 자녀들, 그리고 우리 속해있는 그 곳을 안전하게 멈춰서게 하는 닻이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로 인해서 이 세상에 가인의 자손들이 부르는 라멕의 노래가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