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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07.26.금요기도회 - 하나님 앞에서(사도행전 23)


행0413to25 - 하나님 앞에서(사도행전2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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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4장 13-25절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의 이야기를 읽다가 제가 종종 소개드리는 드와이트 무디에 대한 일화가 하나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일화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드와이트 무디는 1837년에 태어나서 40년 동안 미국과 영국의 전도자요 설교자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정말 놀라운 사실은 이 사람이 목사가 아니라 평신도였다는 점입니다. 그가 평신도였다는 말은 신학적인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40년을 사역하는 동안에 미국과 영국에서만 100만이 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그는 신학교육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실은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굉장히 가난한 직공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설교자요 전도자로서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단점은 바로 그의 영어가 엉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문법은 그가 설교문을 작성할 때와 설교를 할 때 커다란 장벽이 되었습니다. 한 번은 이런 무디가 캠브리지 대학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하는 내내 학생들은 발을 구르며 웃어댔습니다. 설교를 하는 중간 중간에 아주 여러번 문법을 틀리는 실수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설교를 마치고 단을 내려오자 한 학생이 그가 설교를 하면서 틀린 문법을 조목 조목 적어서 무디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나의 문법이 틀리는 줄 압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아는 문법으로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학생은 학생이 아는 문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그 학생은 충격을 받고 돌아갔고 다음 날 아침 학생회장이 찾아와서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계시가 되어서 캠브리지 대학에 대대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났고, 그 열매가 바로 중국선교에 목숨을 걸고 헌신했던 캠브리지의 7인이었습니다. 이 중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중국 내지선교회를 설립했던 허드슨 테일러였습니다. 


베드로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또 무디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저는 과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모든 것을 갖추고 있으면 더 좋을 것입니다. 지식도 많고 가진 것도 많고 또 개인적인 재능과 능력도 충분하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고 또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그런 것은 필요하기는 해도 충분한 조건이 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일 답게 하려면 말입니다. 


공회에 잡혀간 베드로와 요한은 정말 담대했습니다. 그리고 지혜로웠습니다.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던 공회원들이 적대감을 가지고 빙 둘러싸고 있었다면 당연히 주눅이 들었을 것이고 그래서 있던 지혜마저 사용하기 힘들었을텐데 두 사람은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그 어떤 때보다도 담대했고, 그 어떤 때보다도 지혜로웠습니다. 이것은 공회원들이 보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식한 시골 무지랭이로 알고 불러들여서 으름장 좀 놓고 겁을 주면 다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당황하고 두려워하게 된 것은 공회원들 자신이었습니다. 


공회는 베드로와 요한의 이야기를 듣다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갑자기 자기들 앞에서 말하고 있는 두 사람이 배운 것도 없고 그래서 아는 것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공회원들도 주로 말로 먹고 사는 사람들인지라 두 사람의 말이 얼마나 지혜롭고 명확한 말인지, 그 정도로 말하려면 얼마나 많이 배워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베드로와 요한의 평범함은 두 사람의 말이 가진 비범함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그래서 그렇게 놀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은 공회에 선 두 사람에게는 굉장히 불리한 조건이었습니다. 그것은 두 사람이 처형당한 죄인의 제자들이라는 명확한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들 옆에 그 죄인의 이름으로 병고침을 받은 사람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예수님이 하나님과 성전을 모독한 죄인이라면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으로 그런 병자를 고치실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고 그 증거가 눈 앞에 서 있으니 베드로와 요한을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해서 비난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갑자기 두 사람이 변해도 너무 많이, 그것도 멋있게 변했습니다. 그들의 말에도 전혀 책 잡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들의 스승인 예수님을 빌미로 두 사람을 정죄하려고 했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침받은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병자가 그들과 함께 서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의 제자라는 것을 밝히면 오히려 자기들이 불리해질 상황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왜 그런 예수를 죽였고 또 그런 예수의 제자들을 괴롭히냐고 따지면 할 말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힘으로 어떻게 해 보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안됩니다. 법정의 변론에서도 밀렸습니다. 능력 면에서도 자기들보다 한 수 위였습니다. 막상 두 사람을 자기들 가운데 세워놓고 보니 공회원들이 그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두  사람을 비난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세는 완전히 뒤집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온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사람들 전체가 갈릴리 시골 촌사람 둘을 당해내지 못해서 쩔쩔매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경우에 힘을 가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협박입니다. 가진 게 힘 밖에 없으니 다시 한 번 거기 의지해 보는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공회는 두 사람을 협박한 후에 놓아주기로 합의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게 공회가 할 일입니까? 한 나라의 정치와 종교를 책임지고 있는 최고의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들이 불리해지자 만장일치로 자신들이 이끌고 지도해야 할 백성들을 오히려 이유도 없이 협박하다니 말입니다. 이것은 지도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시정잡배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만장일치로 시정잡배가 되기로 합니다. 


그들은 두 사람을 불러서 절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고 경고 했습니다. 계속 그렇게 하면 재미 없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협박은 두 사람에게 아무런 의미도, 효과도 없었습니다. 협박하는 공회를 향해서 두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평상시 같으면 두 사람을 흠씬 두들겨서 내쫓았을 테지만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병자가 고침을 받은 것을 목격한 수많은 사람, 그리고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된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 일을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었고, 공회는 이 사람들을 무시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신분도 낮았고, 배운 것도 없었고, 사람들을 구워 삶을 돈도 없었고, 스스로 곤경을 빠져나갈 힘도 없었습니다. 의지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당하고 떳떳했습니다. 전혀 움츠러들거나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담담하고 당당하게 해야한다고 생각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반면에 공회는 두 사람이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두려움에 빠진 것은 공회원들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해결하느라고 비겁해 진 것도 공회원들이었습니다. 상황으로만 본다면 정반대가 되어야 하는데, 그 날 공회당 안에서는 그렇게 좀처럼 일어나기 힘든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사랑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사랑하고 또 무엇을 두려워 할까요? 사람은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사랑하게 되어 있고, 그것을 나에게 주는 대상을 두려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처럼 보여도 그 앞에서는 꼼짝하지 못합니다. 선거 때만 되면 정치가들이 갑자기 돌변합니다. 세상에 그런 호인이 없고, 그렇게 바른 사람이 없고, 그렇게 겸손한 사람이 없습니다.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고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허리를 90도로 굽혀가면서 인사를 하고 또 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들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한 표’가 있기 때문에 그 표가 자신을 떠날까봐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 날 공회 안에서 상식적으로 볼 때, 일어나야 할 일이 아니라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 것은 그들이 사랑하고 또 그래서 두려워 하는 대상이 달랐기 때문에 생겨난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제자들과 공회원들의 말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을 협박하는 공회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두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입니다. 그러면 두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도 하나님 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두 사람은 그 하나님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가장 두려워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공회가 두렵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공회는 서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이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리고 21절로 가 보면 성경은 이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공회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신뢰와 지지입니다. 여론입니다. 그러면 그렇기 때문에 공회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입니다. 백성들입니다. 공회가 두 사람을 어떻게 하지 못한 것은 옳고 그름에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릇되게 행동하고 싶어했습니다. 힘으로 두 사람을 처리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 자신들에게 지지와 신뢰를 보내주어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공회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두려웠고 그래서 두 사람을 곱게 풀어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사랑하는 것을 주는 대상을 두려워하게 되어 있고 결국 거기에 헌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다 사랑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결국 거기 헌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헌신의 대상에 따라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사랑하고 두려워하고 그래서 헌신하게 되는 대상은 크게 보면 둘 입니다. 하나는 사람이고 나머지 하나는 하나님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 사람의 사는 모습과 태도를 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목회자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제가 우리 교회를 담임하면서 절실하게 깨달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느 순간엔가는 정말 목회를 그만둘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바른 목회를 할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올 수도 있겠구나’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 스트레스 주시는 분도 없구요. 그런데도 계속 성도들의 눈치를 보게 되었습니다. 설교준비를 할 때도 자꾸 하나님께서 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내용을 빼 버리고 싶은 유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소명보다는 성도들이 좋아할만한 설교를 하려는 충동이 생겨났습니다. 더러는 그런 유혹과 충동에 무릎을 꿇은 적도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목회자요 또 생활인인 저에게 필요한 것을 여러분이 다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 인정, 칭찬 그리고 생활비까지 현실적으로만 보면 여러분이 그 모든 것을 저에게 주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을 두려워 했던 것입니다. 공회원들이 백성들을 두려워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한 후,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조심스럽게 결단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건 다 내려놓고 목회하겠다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 하면서 목회를 하겠다고 결단했습니다. 물론 저는 이 싸움이 평생 계속될 싸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도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 결단을 하고 난 후 저는 굉장히 자유로워 졌습니다. 그리고 너는 하나님 눈치만 보아야 한다고 자신을 계속 설득하면 설득할 수록 그 자유가 더 커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또 한가지 깨닫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어야,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하나님께만 헌신하는 사람이 되어야 여러분도 제대로 섬기고 돌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는 결코 성령충만한, 하나님의 뜻대로 목회하는 목회자가 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니까요. 


세상은 변하고 움직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 속한 모든 것들 또한 항상 변하고 움직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사랑하면, 세상에서 만족을 찾으면, 그 세상에 속한 것들을 위해서 헌신하면 우리 인생은 항상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고 사람을 두려워 하고, 그래서 거기에 헌신할 때 불안해 하고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불안함과 두려움은 우리 영혼이 우리에게 보내오는 신호입니다. 이런 것들을 사랑하고, 이런 것들을 두려워 하고, 그래서 이런 것들을 위해서 살아가면 안된다고 말입니다. 그러기에는 이 세상은 너무 약하고 사람들은 믿을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두려워 하며, 그래서 헌신하며 살아가야 할, 그래도 괜챦은 대상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담대함과 당당함, 그리고 풍성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한 내적인 평안들은 우리 영혼이 우리에게 우리가 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잘 선택했으니 그 길을 계속해서 가라고 하는 신호 말입니다. 


모든 것을 가져도 불안하고 모든 것을 누려도 두려워하며 삽니다. 충분한 힘이 있어도 비굴해 집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살아가는 한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 그 것 밖에 없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을 때, 우리를 두셨던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눈치를 보시려거든 하나님의 눈치만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세상을 두려워 하고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면 행복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은 우리의 잘못된 추측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우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나 사람들이 아니라 만유의 주인이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을 통해서 오는 것들 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 우리가 회복해야 할 믿음은 바로 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주실 것이며, 베드로와 요한에게 처럼 세상을 이기는 지혜, 담대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자유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하며 살아서 우리를 기죽이며 힘들게 하려고 하는 세상과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당당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복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