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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절기

2014.01.01. 송구영신 - 우선순위가 분명한 삶



마0625to34 - 우선순위가 분명한 삶(2013년 송구영신예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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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태복음 6장 25-34절



지금 우리는 송구영신 예배의 자리에 모였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며 정리하는 마지막 시간과 새롭게 다가오는 또 한 해를 맞이하는 시간이 겹치는 뜻깊은 시간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사실 어찌보면 지난 해와 새해의 차이는 그저 1초가 더 흐른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이 1초가 일년을 단위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참 의미가 깊습니다. 우리가 또 한 해를 맞이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백지 한 장을 새롭게 선물 받는 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 그림이 잘 그린 그림이건 그렇지 않은 그림이건 지난 한 해 동안 열심히 그렸던 그림은 이제 과거라는 서랍 속에 넣어 놓고 새로 받아든 백지에 2014년이라는 그림을 새롭게 그려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삶은 과거와는 완전히 단절될 수 없습니다. 새롭게 받아 든 백지도 우리의 인생이라는 큰 그림의 일부분이며 또 그 백지에 그림을 그려야 할 사람도 여전히 우리 자신이니까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꼭 과거를 닮은 삶이 되어야만 하거나 혹은 과거의 죄나 실수에 붙들려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는 우리들은 날마나 날마다 더 새로운 피조물로 지어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일, 매순간 순간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외치는 것은 억지이지만 우리가 외치는 것은 그저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매순간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전혀 과거에 얽메이지 않고서 말입니다. 이 자유, 이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대단한 것입니까? 오늘 예배를 드리시면서 꼭 이 자유와 능력을 챙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만 주신 이 놀라운 은혜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2013년 한 해를 살면서 얻은 교훈과 깨달음, 은혜를 가지고 2014년의 첫 걸음을 믿음 가운데 힘차게 내딛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처음 우리 교회에 부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오후예배시간에 여러분에게 “정말 믿음으로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정말 근심과 걱정이 없는 삶이 가능할까요?”라고 질문드린 적이 있는데 기억이 나십니까? 그 때 거의 여러분들 중의 대부분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드셨습니다. 그건 불가능하다고, 그런 삶은 현실 속에는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서 이제 1년쯤 흘렀습니다. 오늘 똑같은 질문을 다시 한 번 드려 보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예수 믿는 사람들은 믿음으로만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근심과 걱정이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여전히 그런 삶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또 이제는 그런 삶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물론 단 한 순간도 완전히 걱정과 근심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은 분명히 불가능 합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근심과 걱정이 찾아올 때 충분히 싸워서 이길 수 있으며 그래서 남은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은 근심과 걱정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참된 믿음 안에서는 그런 삶이 이미 허락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절대로 근심과 걱정을 평생의 억지 동반자나 껄끄러운 친구로 여기며 동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온 유대인들에게 오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바로 근심과 걱정, 두려움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예수님을 따라다닐 정도의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들은 근심과 걱정, 그리고 두려움이라는 문제 앞에서는 아무런 대책 없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또 신앙적인 열심이 있다고 해도 근심과 걱정의 문제에서만큼은 전혀 자유롭지 못한 성도들이 대다수 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시대를 초월한 성도들의 비극인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진실로 근심과 걱정을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놓으신 평안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2014년을 그런 한 해로 살아가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완전히 예수님의 이 말씀에 설득당하셔서 이 말씀의 사람이 되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주님이 예수님의 첫번째 말씀인데요. 예수님은 이 말씀을 삼대가 먹을 것을 쌓아 놓고 그것도 부족해서 보험까지 들어 놓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에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은 거의 가 다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옷이라고는 한 벌 밖에 없어서 그 옷 떨어지면 또 어떤 옷 입어야 할까를 걱정해야만 하는 사람들, 하루 벌어서 하루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항상 무엇을 먹을까를 걱정해야만 하는 일용직 노무자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잘못 들으면 뭘 모르고 하는참 철 없는 소리, 그리고 현실성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종종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목사가 믿음에 있어서 성장해 갈수록 이상하게도 성도들하고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목사이면서도 근심과 걱정에 사로 잡혀 살아가는 분들과 똑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었을 때는 그런 분들과 얼마나 쉽게 공감대가 잘 형성되고 또 그 분들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잘 해 주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믿음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그런 분들과는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하세요.”라는 말이 제가 그런 분들에게 해 드릴 수 있는 최상의 조언이 되었으니까요. 말이야 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좋은 조언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당장 어려움을 당하고 있거나 또 근심과 걱정에 빠져 있는 분들에게는 그런 이야기들이 그저 목사 스럽기만한 너무 식상한 조언으로 들려지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제가 경험해 보니 그게 정답이고 그것이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이야기를 들려 드리기도 힘든 일이니 둘 사이에서 머뭇 거릴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 먹고 살기 참 힘들죠. 사는 게 다 그런 거랍니다. 어디 고통없고 근심없는 삶이 있답디까? 그래도 꾹 참고 열심히 살다보면 좋은 날도 오겠지요. 힘 내세요. 화이팅!”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려운 시절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의 일화를 들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마치 심한 위장병 환자에게 치료약은 주지 않고 진통제만 처방해 주는 것과 같은 것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주님은 먼저 “먹고 살고 입고 사는 문제로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방법만 있다면 근심하고 두려워 하는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근심하고 두려워 하는 일 자체를 그만두는 것보다 확실한 것은 없으니까요. 


그 다음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사람들을 염려하게 하고 두려워 하게 하는 것이 뭐 대단히 고차원적인 것 같아도 사실은 먹고 마시고 입고 하는 것이 다 입니다. 이것이 부족해지거나 아얘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사람들을 근심하게 하고 두려워하게 만들고 거기 붙들려서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꾸 욕심을 부리는 것 또한 따지고 보면 그런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구요. 그런데, 사실 이런 것들은 진짜로 걱정할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짜로 중요한 것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목숨과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걱정을 해야만 한다면 우리 목숨을 놓고 걱정해야 하며, 몸을 놓고 염려해야 합니다. 그게 그거 같지만 완전히 다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한 염려를 더 확실히 해결하기 위해서 앞뒤 보지 않고서 살아가다가 정작 건강을 잃어버리고 또 때로는 갑작스런 죽음을 당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가장 먼저 지적하셨던 것은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이 진짜 걱정거리가 아니라 생명과 몸이 진짜 걱정거리라는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목숨과 몸을 위해서 걱정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27절을 보시면 양식과 옷에 대한 말씀 중간에 갑자기 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염려해서 키가 자랄 수 있다면, 누군가 이런 방법을 개발해 낸다면 그 사람은 정말 때돈을 벌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들 키가 3미터는 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그 어떤 사람도 걱정해서 키를 크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키가 크지 않는다고 걱정하면 그게 스트레스가 되어서 키가 크질 않습니다. 머리 빠진다고 걱정하면 머리가 더 많이 빠지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그것 뿐만이 아니죠. 이 세상에 걱정한다고 해서 걱정하는 것이 갑자기 내 손에 들어오거나 해결되는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걱정하는 동안 마음만 상하고 시간만 흐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갑자기 키 이야기를 꺼내신 이유는 키라는 것이 몸과 생명에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염려가 키를 자라게 할 수 없다면 무슨 이야기가 됩니까? 염려는 그게 몸이든 혹은 생명이든 간에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생명과 몸 때문에 하는 것이 염려인데 염려가 이 두 가지에 전혀 도움이 되질 않는다면 염려는 그야말로 무용지물 백해무익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염려는 전혀 할 필요도 없고 또 해서도 안됩니다. 일단 이것이 예수님의 중간결론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여기까지 잘 설득이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한 번 따라해 볼까요? “근심은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 다시 한 번 “염려는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 이것이 근심과 염려에 대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생각입니다. 근심과 염려가 여러분을 찾아오면 이것부터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셨습니다. 그 다음 단계는 실물교육이었습니다. 주님은 하늘에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태어나서 먹고 살 일이 걱정되어서 농사짓고 창고 만들고 저장하는 새를 보신 적이 있는 사람 손 들어 봐요. 그렇다면 새가 날아가다가 배고 고파서 뚝 떨어지는 것을 보신 분은 신고하세요. 왜 그런 새가 없죠? 모두 하늘 아버지께서 먹여 주시니까요. 그런데, 여러분은 저 새들보다 하나님께 훨씬 더 귀한 존재들이 아닙니까?” 그리고 나서 들판에 아무렇게나 피어 있는 백합 한 송이를 가리키면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백합 중에서 옷감 공장 사장이 있나요? 저 백합 중에서 패션 디자이너나 옷 만드는 백합이 있나요? 그런데, 왜 백합 중에서 벌거벗은 백합이 없죠? 왜 그런 백합 한 송이가 솔로몬이 입었던 가장 옷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죠? 하나님께서 그렇게 입히시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하루살이 풀들도 저렇게 입히시는데 여러분은 헐벗게 하실까요?”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실 때, “하늘 아버지”라고 말씀하신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펜이 있으시면 거기에 동그라미를 해 놓으시기 바랍니다. 하늘 아버지! 정말 어마 어마한 이야기 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니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만드신 분이시고, 모든 하늘들의 주인이시며, 모든 하늘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온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다 그 분의 다스리심 아래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짜로 그 분이 가장 사랑하시고 아끼는 그 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 아버지께서 새들은 먹이시고 들풀은 입히시면서 우리들을 굶기시고 또 헐벗게 하실까요?


이 말씀 속에는 우리가 놓치면 안되는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 말 성경으로 보면 마치 하나님께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는 일이 새들을 먹이시고 들풀을 입히시는 일보다 훨씬 더 힘드는 일처럼 되어 있는데, 원래의 의미는 그 반대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하기는 우리들이 새나 들풀보다 훨씬 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합니다. 그런데, 먹이고 입히는 것은 우리들보다 새와 들풀을 먹이고 입히시는 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하늘의 모든 새들이나 온 땅을 덮고 있는 풀들의 숫자보다 훨씬 더 작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덜 중요하지만 먹히고 입히는 것이 더 힘든 새들과 들풀들은 먹이고 입히시면서, 훨씬 더 중요하면서도 먹이고 입히는 것은 훨씬 더 쉬운 우리들을 먹이고 입히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런 말도 안되는 아버지이시겠습니까? 누구나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하늘의 새와 들의 풀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 또한 먹이시고 입히실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근심과 걱정, 그리고 두려움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가슴을 치시며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근심과 두려움의 문제가 현실적인 조건이나 환경에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렇지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 작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슨 믿음이 작기 때문인가요? 하나님이 우리를 입히시고 먹이시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라는 믿음이 너무 작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기는 있지만 붙들고 살아갈만큼 강한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근심과 걱정, 그리고 두려움의 이유에 대한 우리 하나님의 진단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만드신 분의 진단이니까 이것은 틀릴래야 틀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대개 근심과 걱정, 두려움과 직접 싸워서 그런 것들을 몰아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백전백패입니다. 되는 듯 해도 금새 제 자리로 돌아가고 맙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니까 성도들까지도 근심과 두려움은 어쩔 수 없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필요를 채우시는 나의 아버지시라는 믿음이 작아서 근심과 걱정이 생겨난다면, 그 해결책은 너무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나를 먹이시고 입히시는 나의 아버지로 정말 믿으면 됩니다. 그걸 붙들고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믿으면 됩니다. 그러면, 그 믿음이 우리의 근심과 걱정을 몰아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건 너무나 당연한 결론입니다. 다른 결론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완전한 공급자가 되어주실 것이 분명한데,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으면서도 여전히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를 걱정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니까요.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다 아시느니라” 오늘 우리는 예배당에 모여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집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간에 전혀 다른 장소에서 우리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디에 있는 누구일까요? 저기 팔공산 갓바위에서 손에 지문이 없어져라 빌고 또 비는 사람들입니다. 갓바위집 아이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 입을 것을 구해야만 합니다. 그게 그 아이들의 주된 관심사일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면 누구한테 그래야 합니까? 즈그들이 섬기는 잡신한테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 조차도 준다는 보장이 없으니 정성으로라도 감동시켜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 추운 날 거기까지 올라가서 ‘비나이다, 비나이다.’를 수없이 반복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 신앙의 이유로 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갓바위집 애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무엇이 필요하고 또 언제 무엇을 주셔야 할지 너무나 잘 알고 계시고 또 주실 능력이 충분히 되시는 우리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하나님을 진짜 아버지로 모시고 살게 되면서부터는 먹고 사는 문제, 미래의 생활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걱정을 하려고 해도 걱정이 되지 않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자유로운지, 얼마나 당당해 졌는지 모릅니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습니다. 한 4년쯤 그러고 있으니 계속 그럴 것입니다. 그 이후로 저는 저희 집 아이들 걱정도 많이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이전보다 화도 덜 내게 되고 말입니다. 자기들 삶은 자기들이 하나님과 알아서 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것은 저기 갓 바위집 아이들의 관심사입니다. 그 집 아이들은 그것을 구하면서 살아가야만 하기 때문에 그걸 주된 관심사로 추구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는 하늘 아버지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주된 관심사가 달라질 수 있고 또 달라져야 합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것이 바로 새롭게 우리 관심사의 자리를 차지해야 할 것들입니다. 우리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과 같은 우리의 생활의 필요가 아니라 이런 것들을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면서 살아갈까? 내 힘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를 힘입어 살아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까? 이것을 고민하며 그 답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친절한 분이신지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그래도 의심하고 또 두려워 할까봐 그 뒤에 아주 놀라운 약속을 덧붙여 주셨습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구절에서 ‘이 모든 것’이 무엇입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들 그러니까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같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입니다. 우리를 걱정하게 할 수도 있고 두려워하게 만들 수도 있는 모든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서 살면 그런 것들을 알아서 덧붙여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우리에게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의 우선순위를 정해주셨습니다. 그것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그 이전에는 신경쓰고 근심하고 걱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나머지 모든 것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우리가 그것을 따라다닐 필요 없이 하나님께서 다 더해주시니까요. 저는 이미 이것이 그대로 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2014년도에도 한 번 더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새해에는 여러분 스스로 근심하고 걱정하며 두려워 하는 삶을 살지 마시고, 하늘 아버지를 믿는 믿음으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진짜 되나 안되나, 정말 더해 주시나 더해 주지 않으시나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분명히 되리라고 믿습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이나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이나 같은 하늘 아버지이시니까요. 


만약 우리가 먹는 것, 입는 것 같은 생활의 필요들을 근심하고 걱정하면서 그것을 구하기 위해서 살아가면 그 모든 필요들이 채워지고 동시에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 진다면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여러분. 그런 것들을 따라다니며 살면 그 모든 것들이 풍성하게 더해집니까? 그렇게 살면 근심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서 정말로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던가요? 우리의 과거의 삶은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에게 어떤 진실을 들려주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그 진실로 부터 얻어야 할 새해를 위한 교훈은 무엇입니까?


이미 새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새해가 우리의 삶을 저절로 새롭게 해 주지 못합니다. 새해가 참으로 새로운 새해가 되려면 우리가 새로운 방법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전에 걱정하던 것 그대로 다 걱정하고, 두려워 하던 것 다 두려워 하고, 예전에 따라다니던 것 계속 따라다니며 산다면 새해가 우리의 삶을 달라지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새해에는 하늘 아버지의 자녀로서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잡아 보시기 바랍니다. 근심과 걱정은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늘 아버지께 모두 맡겨 버리고, 먼저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며 그 분의 은혜에 힘입어 사는 일에 여러분의 최우선의 관심사를 할당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일에 여러분의 가장 큰 열정을 쏟아부어 보시기 바랍니다. 내년은 한 번 믿음으로 살아보십시오. 하늘 아버지를 믿는 믿음으로 우선순위가 땅에서 하늘로 바뀐 삶을 살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가 근심하고 걱정하는 모든 것을 알아서 더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염려와 두려움을 몰아내 주실 것입니다. 새해에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서 더하시고 채워주시는 은혜 가운데 근심과 두려움을 벗어던지고 믿음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해에는 나의 아버지를 믿는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새해에는 근심과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위해서 살겠습니다. 

새해에는 스스로 더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더해 주시는 삶을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