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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08.01. 금요기도회 -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사도행전 72)



행1205to10 -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사도행전7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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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2장 05–10절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변화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갑자기 사람이 아닌 어떤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변해도 사람은 여전히 사람입니다. 부족함도 있고 결함도 있고, 오류도 있고 연약함도 있고…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 가질 수 밖에 없는 불완전함은 여전히 가지고 있게 되지요. 그러나 그런 불완전함이 있고 때로는 그것이 또 다시 문제를 일으킨다고 해서 그 변화를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자신의 변화이든 혹은 다른 사람들의 변화이든 변화는 변화로 인정되어야 하고 귀한 것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지난 금요일에 이어서 오늘도 베드로에 대해서 함께 살펴 보겠는데요.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 보았듯이 베드로는 한 10년 남짓한 세월 동안에 정말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진중하지 못하고 두려움이 많았던 그가 그 세월 동안 정말 주님을 위해서라면 죽는 일도 아무렇지 않게 여길 수 있을 정도로 무게있고 담대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정말 대단하고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가 모든 면에서 완전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니고, 그래서 앞으로도 어떤 면에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가 믿음 안에서 변해가는 방향 만큼은 정말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믿음 안에서 점점 더 확고하게 자기 자신이 아닌 예수님 중심이 되어가고 있으니까요. 


제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의 구출 이야기를 묵상할 때, 이상하게도 이 이야기가 베드로가 옷을 입는 과정을 굉장히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천사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우면서 빨리 일어나라고 하자 손을 묶고 있던 쇠사슬이 벗겨 졌습니다. 이제 천사는 베드로가 옷을 입는 과정을 하나씩 하나씩 지시합니다. 먼저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대로 했지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겉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그것도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베드로는 세 살난 아이가 아닙니다. 다 큰 어른입니다. 그런데 천사들은 이상하게도 옷 입는 과정 하나 하나를 지시하고 베드로는 그대로 따라 합니다. 사실 아이라고 해도 성경이 한 사람이 옷 입는 일에 천사가 시시콜콜히 참견했다는 것을 이렇게 세세하게 단계별로 기록해 놓았다는 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중요한 사건을 기록하면서 그 안에 베드로가 옷 입는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기록해 놓은 것은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시간을 한 참 거슬러 올라가 요한복음 마지막 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낙심하여 다시 갈릴리로 가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가셨던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 보면 베드로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이야기가 하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처음 베드로를 부르실 때처럼 예수님은 물고기를 하나도 잡지 못했던 그들에게 많은 물고기를 건져 올리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손수 조반을 마련하셔서 제자들을 먹여 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세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질문을 하시고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곧이어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그리고 그 다음 구절은 “이 말씀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라고 이 말씀의 의미를 설명해 주고 있는데요.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시고는 처음 베드로를 부르셨을 때처럼 베드로를 향해서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그 때까지의 인생은 스스로 띠띠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만 다녔던 삶이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인생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을 따라 살았던 삶이라기 보다는 자기 욕망을 따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았던 그런 삶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이런 삶이 완전히 정반대로 변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까지의 너의 삶이 그러했다면 언젠가는 남이 너에게 띠를 띠우고 네가 원치 않는 곳으로 너를 데리고 가면 그들을 따라 가 거기서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는 그런 모습으로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제자들도 그렇지만 특히 베드로가 만약에 자기 스스로 띠띠고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만 다녔던 그 삶을 내려놓고 남이 자신에게 띠 띠우고 자기가 원치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갈 때, 그 길로 따라가는 그런 삶을 살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이 신앙 안에서 성숙해 간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할까요? 믿음이 견고해 지는 것, 그리고 인격이 성숙해져 가는 것,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 이 모든 것이 전부 다 신앙 안에서 성숙하게 되는 일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들이지만, 한 사람의 신앙이 성숙해져 가는 것을 판단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 사람이 자기의 계획과 의지, 그리고 욕망대로 살아가는 삶을 내려놓고 얼마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따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진전되고 점점 더 자연스러운 일이 되는 그 만큼 그 사람의 신앙은 성숙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결국 자기 인생의 주인을 자기 자신에서 하나님으로 온전히 바꾸어 내는 과정이니까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다시 부르실 때, 베드로가 지금까지는 자기 스스로 띠띠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다니는 삶을 살았지만 늙어서는 오히려 베드로가 남에게 팔을 벌리고 띠를 띠워주며 자신이 원하는 곳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데려가도록 내버려 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까지도 그렇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남’은 과연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 사람은 일차적으로는 베드로를 잡아가는 사람이 되겠지요. 그렇지만 그 사람들만 베드로에게 ‘남’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남, 결정적인 남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베드로에게 띠를 띠워 데리고 가도록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의 말씀 속에서 ‘남’이라는 단어가 여러사람을 말하는 복수가 아니라 한 사람인 단수로 되어 있다는 것 또한 우리에게 그 ‘남’이 사람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후 10년이 지나고 베드로가 처형당하기 전 날 그가 갇혀있던 감옥으로 천사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베드로를 깨우고는 그에게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겉옷을 입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따라오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천사가 시키는 대로 모두 다 합니다. 여기에 베드로의 계획이나 의지, 그리고 적극적인 행동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렇게 해서 처형 전날 밤에 베드로는 감옥에서 빠져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베드로가 남에게 팔을 벌리고 남이 띠 띠우게 하고 남이 이끄는 대로 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요한복음은 그 말씀이 베드로의 죽음을 예언하신 말씀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후에 베드로가 정말 그런 모양의 죽음을 당했는지는 정확하게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물론 그랬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비록 그것이 죽음을 향해 가는 길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 팔 벌리고 하나님께서 띠 띠워 주시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데리고 가도록 순종하는 그런 영광스러운 마지막을 맞이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내일이면 처형당할 베드로가 감옥 속에서 곯아 떨어져 있는 모습은 이미 베드로가 충분히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베드로가 ‘남’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움직이게 하셔서 생명을 얻게 하시는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베드로를 죽게 하시는 대신에 오늘 본문에서는 베드로를 살려 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사는 원리나 죽는 원리나 똑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는 일과 죽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띠띠워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그의 삶의 원리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설명해 주면서 “이 말씀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요. 베드로의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던 이유는 그가 교회를 위해서 위대한 일을 했거나 아니면 열 두 사도 중에서 수석 사도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그 죽음을 당하기 이전에 팔을 벌려 남이 자신에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갈 때, 순순히 그것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죽음뿐만이 아니라 그 죽음으로 가는 길 또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삶이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그 죽음을 닮은 베드로의 인생의 자연스러운 결론이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원리와 우리가 죽을 때에 그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원리는 다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죽음은 결국 그 사람의 삶의 결론이며, 삶의 길 끝에 있는 종착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죽는 날 우리의 죽음이 주님 앞에서 영광스러운 것이 되려면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 또한 그래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는 젊었을 때는 스스로 띠 띠고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다녔습니다. 신앙의 철이 없었을 때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일에도 자기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항상 실패와 절망 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도 빈 그물이었던 그는 결국 나중에도 빈 그물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또다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그는 더 이상 그런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점점 더 ‘남’이신 하나님께 팔을 벌리고 그 분이 띠 띠게 하고, 자기가 원치 않는 곳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 길을 걸어간 결과가 바로 감옥에서 단 잠을 자는 베드로의 모습,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아도 개의치 않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된 베드로의 모습이었습니다. 


믿음의 성숙은 곧 태도의 변화를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어떤 태도로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 달라질 때, 그 때 그 사람은 진실로 변화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젊은 베드로는 늙은 베드로가 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띠 띠던 우리는 하나님께서 띠 띠워주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만 살았던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삶을 기쁘게 껴안아야 합니다. 점점 더 이런 사람으로 빚어져 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성숙이고 또한 영적인 성숙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성숙함 속에 베드로가 누렸던 자유와 능력이 있습니다. 감옥에서도 단 잠을 청할 수 있는 그 평안함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향해 기쁘게 팔 벌려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삶을 기쁨으로 감당해 내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참 능력과 기쁨을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