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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8.05. 새벽예배 -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출애굽기 25)


출0510to20 -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출2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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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출애굽기 5장 10-20절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하는 이야기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모세를 부르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구출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흔히 조건이 이렇다면 모든 일이 순풍에 돛 단 듯이 순조롭게 진행되어져 갈 것이라고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렇게 되지 않을 때가, 기대대로 진행되어져 갈 때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말이죠.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바로를 만나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내보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렇지만 일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로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그 요구를 엉뚱하게 곡해합니다. 숫자가 많아졌다고 반항한다고 생각했고 또 너무 편해지니까 게으름을 부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흙으로 벽돌을 굽는 일을 시킬 때, 짚을 공급해 주면서 그 일을 시켰는데, 이제는 짚을 주지 않으면서도 똑같은 양의 벽돌 수를 요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무지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숫자를 맞추지 못한다고 매질을 해대기까지 했으니까요. 그래서 바로에게 찾아가서 하소연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당신의 백성들의 잘못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하소연에 대해서 돌아온 것은 오히려 게으르다는 비난이었고 또 부과된 중노동에 대한 확인이었습니다. 


이들은 바로와 헤어져서 나오는 길에 길가에 서 있는 모세와 아론을 보자 마자 두 사람을 원망하고 비난합니다.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 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기를 원하노라” 굉장히 악한 말입니다. 우선 없는 사실을 꾸며댄 말입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까지 들먹이면서 마치 두 사람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행동한 것처럼 말했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뜻을 다 알고 있고 또 굉장히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4장 마지막 절에서 모세와 아론이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타났을 때, 두 사람에 대한 그들의 반응과 하나님께 대한 반응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4장 3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사람을 믿었고 또한 자신들의 고통을 몰라라 하지 않으시고 거기서 건지시겠다고 하신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두 사람에 대한 악한 마음을 품고 과장하여 두 사람을 비난하고 있고,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서 두 사람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태도는 왜 이렇게 하루아침에 바뀌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19절에 나오는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라는 한 마디 말 속에 다 들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두 사람을 만났을 때는 두 사람이 들려준 이야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실제적인 어려움과 손해를 만들어 내지 않았을 때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살피셨고 그래서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소식은 그들에게 유리한 이야기 밖에 없습니다. 혹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기 이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그렇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믿고 또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직접적인 고통과 손해를 당합니다. 오히려 모세가 바로를 만나기 이전보다 더욱 더 상황이 어려워 졌고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완고한 마음으로 대합니다. 너무나 과한 중노동이 부과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화가 몸에 미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들의 태도는 모세에 대해서나 하나님께 대해서나 180도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짐이나 어려움이 전혀 없는 경우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은혜를 주신다고 할 때, 그것을 기뻐하지 않고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했던 사람들이 전부 다 자신에게 구체적인 어려움과 손해가 닥쳐올 때, 그리고 은혜로 가는 과정에서 심각한 장애물을 만나게 될 때, 그 때까지 처음 같은 태도와 믿음을 유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초지일관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적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몸’이라고 불리는 현실에 굉장히 민감합니다. 현실적으로 아무런 손해나 고통이 없을 때에는 얼마나 신앙적이고 얼마나 바람직한 모습을 보이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에게 무언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이 일어나고, 자신이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게 되는 일이 생겨나면 돌연 태도나 말이 변합니다. 그렇게 신앙적이던 사람이 갑자기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 됩니다. 다 몸에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진짜 모습은, 그리고 우리의 진짜 신앙은 믿어도 손해가 나지 않을 때가 아니라 믿기 때문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고 손해를 보게 되었을 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평상시가 아니라 비상시에 그 사람의 진짜 인격과 신앙은 그대로 본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려면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우리들의 ‘몸’에 약한 사람인지 항상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그 몸과 싸우려는 의지를 가지고 기꺼이 그 몸과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부족하나마 최소한의 믿음을 가진 사람다운 모습을 보일 수 있고, 그 싸움을 통해서 더욱 더 신실해 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몸은 항상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입니다. 그것은 우리 몸은 죄와 불신앙으로 기울기 쉬운 성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몸과 싸우려 들지 않으면 우리는 믿음이 아니라 우리 몸의 지배를 받는 상태가 되어 버리고 믿는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어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반응하고 움직이는 그런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실패를 거듭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몸의 요구에 예민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 몸과 기꺼이 싸워서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져 가는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