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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08.08. 금요기도회 - 이제야 내가 참으로 알겠노라(사도행전 73)


행1211to19 - 이제야 내가 참으로 알겠노라(사도행전7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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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2장 11–19절




기독교는 기도의 종교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또한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믿는 기독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그 중심에 기도가 놓여질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기도가 유일한 신앙의 중심은 아니죠. 예배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 또한 빠지면 안되는 신앙의 중심이고 또한 가장 중요한 은혜의 통로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고서 살아가는 것은 스스로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풍성한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두 가지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우리 삶으로 흘러 들어오는 가장 중요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를 믿는 성도들 중에서는 하나님의 진짜 은혜와 그 은혜의 풍성함을 모르는 채, 그저 약간의 평안과 잠시의 위로로 만족하며 사는 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인데요. 일이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인 것이 분명합니다. 교회마다 새벽기도는 점점 약해져 가고 있고, 이미 작은 교회들 중에서 금요기도회를 포기한 교회가 굉장히 많습니다. 다 기도하려는 성도들이 없으니 나타날 수 밖에 없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이것과 더불어 성도가 신앙의 풍성함을 경험하지 못하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드릴 때, 큰 기대와 믿음이 없이 기도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저 기도하는 행동 자체에 집중하거나 또한 ‘나는 기도하는 사람이다’라는 만족을 얻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런 기도는 기독교가 말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기도는 믿음과 인격적인 관계가 기초가 되는 겸손의 표현입니다. 이 말은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자신의 기도가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들려지고 있으며, 그래서 반드시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되게 되어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기도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이것을 가장 확실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데요. 다 아시는 구절이지만 제가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제대로 들려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바로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과 그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반드시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이 믿음이 있을 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믿음의 행위가 될 수 있고 그래야 우리의 기도는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상달될 수 있습니다. 물론 때로는 넋두리도 기도가 될 수 있고, 하소연도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믿음이 없으니 믿음을 허락해 달라는 기도도 가장 훌륭한 기도가 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참 성도의 기도는 시작이 그럴지라도 결국에는 참 믿음의 고백이 되는 그런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런 믿음의 기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이것이 베드로가 처형되기 전날 기적적으로 풀려나기 직전까지의 상황입니다.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해서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을까요? 베드로가 꼭 믿음을 지키고 순교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까요? 아니면 고통 없이 죽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까요? 아니면 어떻게 되든 하나님의 뜻대로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까요? 그럴 리가 없지요. 절대로 그렇게 기도했을 리가 없습니다. 교회는 분명히 베드로를 살려 달라고, 어떻게든 죽음을 면하게 해 달라고 말 그렇게 기도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가 잡히던 날 부터 함께 모여서 베드로를 풀어 달라고, 베드로를 살려 달라고, 교회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놀랍게도 하나님은 정말로 그 기도대로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기적적으로 건져 주셨습니다. 그렇게 풀려난 베드로는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는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향합니다. 그리고는 그 문을 두드렸습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입구로 나온 사람은 로데라는 이름의 여자아이였습니다. 여자아이는 당연히 물었겠죠? “누구시죠?” 그러자 뜻 밖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 베드로야. 문 열어라.” 아이는 너무 기쁘고 또 너무 놀라서 문을 열어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거기 모여 기도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소리를 높여 외쳐 댔습니다. “베드로 아저씨가 문 밖에 있어요. 베드로 아저씨가 돌아왔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셨어요.” 상황이 이렇다면 누구 한 사람이라도 현관으로 뛰어나가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들 그 자리에 앉아서 로데를 쏘아 보기만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 미쳤냐? 어떻게 베드로가 지금 여기에 와 있을 수 있니?” 그렇지만 아이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아니예요. 베드로 아저씨가 틀림 없어요.” 그러자, 사람들은 이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아마도 베드로가 아니라 베드로의 천사일꺼야.” 여러분, 참 재미있죠? 어떻게 천사가 베드로의 모습으로 나타나 문을 두드리고, 또 베드로의 음성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믿으면서도 베드로가 풀려나서 거기 와 있다는 것을 그렇게 믿기 어려워 하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에도 문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급한 마음에 점점 더 세게 문을 두드렸을 것입니다. 이러다가 또 잡혀가지 싶어서 말이죠. 그제서야 사람들 몇이 대문으로 가서 문을 열었습니다. 그들은 기절할 듯이 놀랐습니다. 정말로 거기 베드로가 떡하니 서 있었으니까요. 베드로는 웅성대는 성도들을 진정시킨 후에 지금까지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의 다른 사도들에게 자신이 풀려난 이야기를 전해 달라고 하고는 다른 곳으로 가 버렸습니다. 아마도 다시 잡히는 것과 자기 때문에 교회가 힘들어 질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였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투옥과 탈출 이야기는 이렇게 큰 은혜로 끝이 나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우리 신앙 속에도 있음직한 모순 한가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순이 바로 이 이야기를 조금은 의아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열심히, 그리고 간절하게 베드로를 살려 달라고 기도했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베드로를 다시 살려서 되돌려 보내주셨는데도, 오히려 그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어린 아이를 제 정신이 아닌 사람 취급을 하면서 베드로가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얘 기도를 하지 않았다면 모릅니다. 그냥 넋 놓고 앞으로 어떻게 하나, 우리 베드로 불쌍해서 어떻게 하나 하고 앉아 있었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기도했습니다. 모여서 간절히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도 막상 베드로가 눈 앞에 나타나자 그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아닐 가능성만 이야기 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불신앙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어떤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하나님이라고 할지라도 그 일은 하실 수 없다고 믿는 불신앙입니다. 예를 든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나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 그리고 물 위를 걸으신 기적 같은 것들은 절대로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고 물으면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참 이상하지요? 어떻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으면서도 그런 일들은 일어날 수 없다고 믿을 수 없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진짜로 있습니다. 두번째는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믿어도 어떤 방식으로는 일어날 수 없다고 믿는 불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의 집에서 모여 기도했던 성도들 속에는 이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모두 섞여 있었을 것 입니다. 첫째, 기도는 합니다. 간절히 부르짖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듣고 계시며,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그런 믿음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기도합니다. 답답한 마음을 하소연 하듯이 말입니다. 둘째, 믿음은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도 있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이루어 주신다는 확신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 주시는 방식을 자신이 정합니다. 오늘 본문을 예를 들어 설명하면 베드로가 풀려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서도 그것이 절대로 갑자기 자신들이 기도하는 곳으로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며 자신들을 불러내는 그런 방식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 자리에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섞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똑같았습니다. 모두들 베드로가 그렇게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믿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천사가 나타나 문을 두드린다고는 생각하면서도 베드로가 돌아왔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기도드리는 이 사람들의 믿음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란 바로 진실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내 생각 안에 가두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하나님 위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것은 하실 수 있지만 저것은 하실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이런 방식으로 이 일을 하실 수는 있지만 저런 방식으로는 하실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드릴 때 확실히 믿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각 속에 갇혀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불가능과 가능이 아무런 의미가 없고, 우리가 정해 놓은 방식이 그 분께는 아무런 한계가 되지 못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성품을 어겨가면서 까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망가뜨리면서까지 무슨 일이든지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지만 않다면 그 분은 그 어떤 방법으로, 그 어떤 일이라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고 할 때, 흔들림 없이 붙들어야 할 하나님께 대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매주 금요일마다 이렇게 모여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아뢰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기도의 시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기도드릴 때, 우리는 과연 어떤 기대와 어떤 믿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까? 우리는 매주 금요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든 하나님이 행하려고 하시기만 하시면 그 어떤 일도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믿는 믿음 안에서 벅찬 기대를 가지고 기도드리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는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과 하실 수 없는 일을 정해 놓고, 또 그 일을 하실 방식도 정해놓고 그 안에서 움직이시는 그런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그저 넋두리나 하소연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자녀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드릴 때, 가정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드릴 때, 성도들의 건강과 경제문제를 위해서 기도드릴 때,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드릴 때 하나님이 무슨 일이든 행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서 그 믿음 안에서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기도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그런 믿과 기대의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런 기도가 될 수 있고, 우리들 또한 그 기도가 응답 되었을 때, 하나님께 더 큰 믿음의 반응을 보여드릴 수 있는 그런 사람들로 성숙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음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우리가 신음하며 하소연 하며 믿음 없이 기도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믿음을 기뻐하신다고 하셨고,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니까요. 오늘은 곰곰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나 자신을 한 번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기대하면서 기도드리는 그런 믿음으로 기도드리고 있는지, 나의 기도는 점점 더 그렇게 변화되어져 가고 있는지 잘 살펴 보시고 또 챙겨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날마더 더 큰 확신과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런 기도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