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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09.26. 금요 기도회 -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사도행전 77)


행1301to12 -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사도행전7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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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3장 1–12절




우리는 계속해서 안디옥 교회와 그 교회의 지도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교회가 내부적으로 그리고 교회 바깥을 향해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선 안디옥 교회는 교회 안의 성도들을 향해서나 교회 바깥을 향해서나 활짝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진실로 ‘큰 교회’였습니다. 이것은 그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교회가 교회다워지는데 얼마나 중요한지 살펴 보았습니다. 그 열린 마음이야 말로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의 마음이니까요. 우리 교회가 점점 더 서로를 향해 그리고 교회 바깥을 향해서 더 커다랗게 열려가는 마음을 지는 성도들의 교회로 세워져 가고 변화되어져 가기를 진실로 소망하며 축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냥 내버려 두면 닫혀지고 좁아지기가 더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나의 마음이 과연 교회의 성도들을 이해하고 용납하는데 활짝 열려 있으며, 나아가서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활짝 열려져 있는지를 점검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 일에 우리 교회의 규모나 가진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해서 열려 있기만 하다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우리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하실테니까요. 가난한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돕고 이방인 선교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우리가 이어서 살펴보며 교훈과 은혜를 나누고 있는 것이 바로 안디옥 교회가 하나님의 요청을 받고 이방인 선교의 시작점이자 본부 역할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본문의 뒷 부분은 바나바와 바울이 파송을 받아 실제로 구브로 섬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면, 본문의 앞 부분은 그 과정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별로 길지 않은 기록이지만 이 부분을 깊이 묵상하는 일만으로도 우리는 우리가 교회와 성도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가장 중요한 원리를 살펴 보았습니다. 다 기억하시지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하나님의 일이다’라는 원리입니다. 따라해 보세요. “하나님의 일은 / 언제나 하나님의 일이다.” 앞으로 살펴 볼 다른 원리들도 그렇지만 성도에게 있어서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또 지켜내며 살고 또 일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자꾸 이것을 잊어버리고 이 원리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일이든, 아니면 우리 인생 전체이든 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소중한 것들을 망가뜨리고 스스로도 그 안에서 제 자리를 이탈해 망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끝까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인정하고 그렇게 지켜내려고 힘쓸 때, 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렇지 않을 때, 겉으로 보기에 어떤지 몰라도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교회 안팎에서 하는 모든 일들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지요? 항상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불쑥 불쑥 ‘나’라는 단어가 튀어 오를 때마다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하나님의 일이다’라는 이 중요한 삶과 섬김의 원리를 기억하면서 항상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로서 자기 자리를 지켜내시기 바랍니다. 


 다섯 명의 안디옥 교회 지도자들이 함께 주님을 섬기며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님께서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메세지를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섯 명의 지도자들은 거기에 순종했습니다. 그 때부터 그 일을 위해서 다시 금식하며 기도하기 시작했고 충분한 준비가 되었다고 여겨졌을 때, 두 사람에게 안수를 하고서 구브로 섬으로 파송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격적으로 이방인 선교가 시작되는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4절을 보시면 성경은 이 일에 대해서 다시 이렇게 설명합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3절을 보면 두 사람을 보낸 것이 안디옥 교회로 되어 있는데요. 4절은 다시 두 사람이 성령님의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바나바와 바울 두 사람을 이방인 선교에 부르시고 보내시는 일을 하실 때, 분명한 주도권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셨지만, 실제로 그들에게 그 일을 위임하고 파송하는 일은 안디옥 교회가 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이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일을 맡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은 이미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들이었고 복음 전도자들이었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브로 선교라는 특별한 일을 위해서 두 사람을 다시 부르셨고, 교회가 그들에게 그 일을 위임하여 파송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 교회에게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가 마치 모든 힘과 권한을 잃어버린 가장과 같아져 버린 그런 분위기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의 평등과 공동체적인 분위기를 강조하고 또 요구하고 있지만 교회의 정당한 권위를 이야기하고 거기에 순종하려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완전히 잘못된 것이 분명한 교회의 권위나 혹은 목회자 개인의 권위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성도 개인에게 가지고 있는 권위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직접 바나바와 바울을 부르시고 그저 능력을 주어서 파송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그 계획을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알리고 그렇게 해서 교회 전체의 일이 되게 하셨으며, 또 두 사람이 안디옥 교회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축복과 권위 아래에서 파송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탁월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교회에 속한 성도라면 그는 교회의 권위 아래 놓여져야 하며, 교회의 위임을 받고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 이유는 그가 평신도이든 교회의 지도자이든 그는 몸된 교회의 지체이고 그렇게 몸된 교회를 통해서만 머리되신 예수님과 연결될 수 있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독일 신학교에는 제가 보기에는 아주 바람직한 전통이 하나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신학교에 들어가면 입학할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계속해서 신학교 교수들과 상담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기록과 평가는 계속해서 남겨져 있구요. 그러다가 그 학생이 졸업을 할 때쯤에 교수들이 모두 모여 과연 이 학생이 졸업을 해서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에 적합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평가한다고 합니다. 아주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여러가지를 모두 고려해서 결론을 내리고 그 결론은 곧바로 그 학생에게 통보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때 우리로서는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고 합니다. 그 학생이 목회자로서 부적합하다는 결론이 내려지면 그것이 그대로 전달되는데요. 그러면 그 학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목회자가 되기를 포기한다고 합니다. 


아마 우리 나라 신학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아마 난리가 날 겁니다. 나를 부르신 분은 하나님인데, 왜 인간인 당신들이 나에게 목회를 해라 말아라 하느냐하고 멱살이라도 잡고 싸우려고 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독일에서는 그런 일들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지고 또 받아들여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교수들이나 학생이나 자신들이 교회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인정하고 있고, 자신이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것은 반드시 교회의 권위 아래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존중하는 일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교회를 존중하고 교회에 순복하는 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고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하면서 교회 앞에서 겸손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구브로로 떠날 때, 그들은 성령님의 선택과 임명을 받았으면서도 또 다시 교회의 안수를 받고 교회의 파송을 받고 구브로로 갔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들이었으면서도 교회의 권위 아래에 자신을 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교회와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이 권위를 내세우면서 그 일을 했던 것이 아닙니다. 3절을 보면 성령님의 지시를 받은 다른 지도자들은 그 때부터 다시 금식하고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구하는 가장 낮은 행동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생명도 없음을 고백하는 행동이니까요. 기도는 구체적으로 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두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주의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구브로의 선교사로, 그리고 앞으로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 택한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안디옥 교회의 가장 중요한 두 명의 지도자였다는 것입니다. 11장에서 이미 그 내용을 살펴 보았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성도들이 너무 많아지자 예루살렘 교회는 그들을 위한 목회자로 바나바를 파송했고 바나바는 사울을 불러서 함께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 덕분에 안디옥 교회는 성숙한 교회로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이 두 사람을 선택하셨고 이 두 사람을 구브로 섬으로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이런 경우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교회에 다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던 목회자가 하나님께서 나를 다른 교회로 부르셨다고 그러니 보내 달라고 한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도 안된다고 만류하는 분들도 나오겠지요. 허락해 줄 수 없다고 화를 내는 사람들도 생길 것이구요. 안디옥 교회 성도들도 어떤 지도자가 좋은 지도자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자신들을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에 정말 제대로 헌신해서 자신들을 그리스도인 답게 세워지도록 도와준 그런 목회자들이었으니 교회의 성도들은 두 사람을 그렇게 보내주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했고 두 사람을 구브로로 보내주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가장 보내기 싫고 나누기 싫은 것을 양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한국 교회를 보면서 교회가 너무나도 세상을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러면서도 그런 줄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된 데에는 목회자와 성도 모두에게 똑같이 책임이 있습니다. 제가 질문을 하나 드릴테니 한 번 스스로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큰 교회에 더 훌륭한 목회자가 가야 할까요 아니면 작은  교회에 더 훌륭한 목회자가 가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아마 거의 모든 목회자와 성도들은 큰 교회에 아무래도 할 일도 많고 사람도 많으니까 큰 교회에 더 훌륭한 목회자가 가야 한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는 그럴지 몰라도 성경적으로 보면 그 반대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는 작고 부족한 교회일수록 더욱 더 훌륭한 목회자, 더 많이 준비된 목회자가 그 교회를 돌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교회도 아름답고 건강하게 세워져 갈테니까요. 빈익빈 부익부가 하나님의 법칙이 아니라 평균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라면 이것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철없고 비현실적인 생각인지 몰라도 저는 이것이 분명히 기독교 신앙과 더 어울리는 생각이라고 믿습니다. 


교회는 자신이 가진 좋은 것을, 그것을 가지지 못한  교회와 나누어야 합니다. 물질 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성도들이나 심지어는 목회자라고 하더라도 부족한 곳을 채우기 위해서 더 좋은 것을 기쁘게 나눠주고 양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다움이고 성도다움입니다. 우리는 모든 선한 것이 우리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혜로 얻은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러나 오늘날 정말 많은 교회들은 그렇게 할 줄 모릅니다. 좋은 것은 자기 교회가 다 가지려고 합니다. 이미 충분한데도 계속해서 가지고 또 가지려고 합니다. 이미 큰데도 불구하고 더 크게 만들려고만 합니다. 도대체 주변의 작은 교회들은 그것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 하고 아파하는지 관심조차 없습니다. 어떤 교회는 스무 명이 없어서 쩔쩔 매는데, 그 옆에 있는 다른 교회는 너무도 당연하게 2만 명을 모으겠다고, 그것을 비전이라고 선포합니다. 그 교회가 정말 교회다운 교회라면 2만 명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2만 명을 전도해서 그들을 작은 교회로 파송해서 부족한 교회들을 세우겠다는 비전을 세우는 것이 더 합당할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는 바나바와 바울을 구브로로 기꺼이 파송했던 안디옥 교회로 부터 배워야 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좋은 것을 나 혼자만 가지려고 해서는 안되고, 더 많이 더 많이를 외치는 외침을 그쳐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처럼,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처럼 연약한 곳을 세우고 채우기 위해서 기꺼이 손을 뻗을 수 있는 그런 성도들과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변화가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또 이 나라의 교회들이 변화되게 해 달라고 계속해서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려는 성도는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자신은 몸된 교회의 지체이며 그래서 그 권위 아래 있음을 인정하며, 하나님께서는 나를 몸된 교회의 권위 아래 두셨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거기 겸손하게 순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의 말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이 우리를 교회 안에 두신 중요한 이유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교회도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위임받은 권위를 사용할 때도 겸손하게 기도하며 은혜를 구하며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교회와 성도들은 항상 더 좋은 것을 더 약하고 부족한 곳과 나누고 양보하려는 마음을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이 마음이 없으면 우리의 사역과 신앙의 동기는 탐욕이 되고 이기심이 될 수 밖에 없으니까요. 


 성도들은 교회 앞에 겸손히 순복하고 교회는 또한 겸손히 성도들을 섬기는 교회, 그리고, 힘들고 고민이 되더라도 좋은 것이 있으면 내가 아니라 남을 생각하며 남과 나눌 줄 아는 교회, 우리 광현 교회가 그런 교회로 세워져 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것과 나는 항상 몸된 교회에 속한 지체임을 잊지 않고서 겸손하게 순종하려고 애쓴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 교회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위에, 그리고 우리 교회 위에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