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11.28. 금요기도회 -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사도행전 86)





본문 : 사도행전 14장 11–18절




‘신비(神秘)’라는 단어가 있지요? 우리가 자주 듣는 말들 중의 하나인데요. 사람들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나 이치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신비’라는 말을 한자로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귀신 신(神)자에 숨길 비(秘)자를 씁니다. 그러니까 귀신이 숨겼다는 뜻이죠. 정말 신비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이것보다 더 멋지게 표현한 말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귀신이 숨겼습니다. 신이 감추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고, 그 이치를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그 앞에서 눈을 크게 뜨고 놀라는 일 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바나바와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나면서 부터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한 사람이 그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믿음을 보고서 그 사람을 고쳐 주었습니다. 그것도 “네 발로 일어서라!”라는 한 마디 말로 말이지요. 이 엄청난 광경을 루스드라 사람들도 함께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너무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공용어였던 헬라어가 아니라 원래 자기들이 사용하는 말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라고 말입니다. 그 사람들은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생각했고 바나바는 제우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두 신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인데요. 제우스는 그리스의 신들 중에서 왕이 되는 신이고 또 헤르메스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전령이 되어 제우스의 메세지를 전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날 젊은 바울은 메세지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지긋한 바나바는 그저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바울이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키는 기적을 행한 것입니다. 제우스와 헤르메스, 두 신을 주된 신으로 섬기고 있었고, 그래서 두 신을 위한 신전이 있었습니다. 또 언젠가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사람의 모양으로 자신들을 찾아올 것이라는 전설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루스드라 사람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바나바를 제우스로 그리고 바울을 헤르메스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루가오니아 방언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그런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두 사람이 머물고 있었던 집 앞이 시끌벅적 난리가 났습니다. 제우스 신전의 제사장이 제물로 쓸 소와 화환을 가지고 와서 두 사람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제사장에게 달려가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전설처럼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고, 그 제사장도 그 이야기를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경험한 일이 너무나 신비했기 때문에,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아니고는 그런 일을 할 수가 없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바울과 바나바는 상황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급하게 달려나간 두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옷을 찟으며 소리를 질러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두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품과 감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바로 이런 헛된 일들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인데, 이렇게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많이 힘들었지만 두 사람은 그렇게 해서 겨우 겨우 자기들에게 제사를 드리려는 루스드라 사람들을 말릴 수가 있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에게는 정령숭배가 아주 뿌리 깊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일본에는 일본의 전체인구보다 많은 신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에는 별의 별 신이 다 있고, 그런 신들을 위한 사당들이 세워졌는데요.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야스쿠니 신사입니다. 정말 웃기는 일이지요? 다른 나라에서는 전쟁 범죄자라고 정죄하는 사람들을 신으로 만들어 섬기기 위해서 사당을 만들다니 말입니다. 그런데, 더 우스운 것은 일본 어느 지역에 가면 작은 항아리 하나를 위한 신사도 있다고 합니다. 이 신사가 만들어진 연유는 이렇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그 지역의 어떤 집에 화재가 나서 그 집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완전히 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항아리 하나만 멀쩡하게 남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 항아리에 뭔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항아리를 신으로 섬기기 위해서 그 집이 있던 터에다 그 신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일본을 대단한 나라라고 생각하지만 일본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신비 앞에 굉장히 약합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신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해 집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 신비로운 일에 대한 경험 때문에 영혼과 삶의 방향이 아주 어긋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비를 잘못 이해하고 또 사용하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평상시의 사고방식이나 이미 익숙해져 있는 것들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들은 후에, 그 복음을 전한 사람이 행하는 신비한 일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들은 후에 그런 놀라운 일을 본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일을 무엇과 연결시켜야 할까요? 하나님입니다. 복음이구요. 그런데, 루스드라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그 신비를 그저 이미 자신들이 섬기던 신과 그 신에 대한 전설에 연결시켜 버렸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을 제우스와 헤르메스라고 믿어 버렸고 그래서 두 사람에게 제사까지 지내려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이런 비슷한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강한 자극을 정말 좋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지요. 그래서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꽤 많은 수의 성도들이 특별한 자극에 의지해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신비를 잘못 이해하고 또 잘못 사용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기도원에서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그 기도원을 반복해서 찾아갑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 은혜를 받으면 은혜를 회복할 때마다 그 사람에게 의지합니다. 물론 그 심정이야 이해가 됩니다만, 이것은 사실 전혀 성경이 말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들 중 하나가 하나님은 전적으로 자유로우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요? 하나님은 그 어떤 장소나 사람에게 묶여 계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야 말로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어떤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성도들의 고정관념입니다. 그 고정관념이 그 신비를 통해서 진짜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오히려 그 신비나 혹은 그 신비를 경험하게 한 어떤 것에 우리를 묶여 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함이라” 우리가 성경에서나 현실 속에서나 ‘기적’이라고 부르는 일들을 만날 때 꼭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적은 그저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기적은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실제로 다스리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냥 일상적인 일로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니까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통해서 그것을 증명해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전하며 이적을 행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복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왕이시라는 소식인데, 그것을 뒷바침하시기 위해서 자연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여러가지 일들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이적은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과 예수님께로 온전히 돌리기 위해서 주시는 선물인 셈입니다. 


일단 이런 생각을 가지고 우리는 두 사람이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 속에서 복음에 대한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첫째는 두 사람이 복음을 전하고 기적을 행한 것은 루스드라 사람들이 그 날 하려고 했었던 그런 헛된 일을 버리게 하고 또 떠나게 하기 위해서 였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이 가지는 가장 큰 능력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는 것입니다. 묶여 있지 말아야 할 것에서 풀려나서 자유로워지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이 우리 속에 들어와 하는 일입니다. 미신이나 우상숭배를 비롯해서 근심, 걱정, 두려움, 집착, 욕심, 자기자랑, 그리고 고질적인 죄악 등. 우리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지 못하게 가로 막는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를 풀어 놓아 자유롭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이 가지는 능력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그런 자유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이미 복음을 믿고 있으니까 이렇게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신앙은 여전히 어떤 특별한 것이나 사람, 그리고 장소에 묶여 있고, 삶은 여전히 우리를 쥐고 흔드는 근심과 걱정, 이기심과 욕심, 분노와 열등감 같은 것들에 묶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도 우리는 이런 것들에 묶여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일까요? 복음이 주는 자유는 원래부터 그렇게 제한적이고 부족한 것일까요? 복음은 과연 우리에게 그만큼의 자유만을 약속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은 사실상 우리에게 온전하고 무한한 자유를 약속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가짜가 아니라면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이런 자유를 기대할 수 있고 또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왜 우리가 실제로 누리는 복음 안에서의 자유는 그렇게 대단한 것이 못 될까요? 그것은 복음의 능력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고정관념 때문이고, 또 그 복음에 대한 우리의 반쪽 짜리 믿음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분명히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고도 눈 앞에서 일어난 기적을 하나님이 아니라 이미 자신들이 섬기던 제우스와 헤르메스와 연결시켰습니다. 참 이상한 일일 수 있지만, 사실 이것이 자기 생각에 갇혀서 복음을 듣고 듣고 또 믿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미 예수를 믿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 그리고 이것은 가능하지만 저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서 복음을 듣고 말씀을 듣습니다. 어떻게 될까요? 결국 하나님의 진리가 줄 수 있는 유익과 능력의 대부분은 놓치고 맙니다. 정말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복음 속에 이런 자유가 들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그 근거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바울의 이야기 속에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복음의 첫번째 역할은 그 복음을 믿는 자들을 풀어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묶이면 것들에 묶여서 참 자유를 모른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풀어놓는 것, 그것이 복음이 주어진 첫번째 이유입니다. 그러나, 풀어 놓는 것으로 끝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지만 풀어놓고서 그냥 내버려 두면 또다시 묶여서는 안되는 것에 묶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들려 주시고,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해 주시는 진짜 목적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묶여있는 것들로 부터 자유로워 져서 다시 하나님께 속하게 된다면 또다시 묶이게 되는 것 아닌가 하실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큰 틀에서 보면 복음은 그저 우리를 묶는 대상만 바꿔 줄 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렇게 우리가 다시 묶이게 된다는 사실이 아니라 다시 묶이게 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지구를 만드셨구요. 그 우주와 지구를 채우고 있는 모든 것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얼마나 광대한 분이실까요? 우리의 이 작은 머리로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흔히 하나님을 ‘무한한 분’이라고 표현하기는 하지만 사실 인간은 무한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복음을 믿고 나서 하나님께 속하고 또 묶이는 것이 과연 그 동안 우리를 묶기에는 너무도 부족해서 항상 우리를 억압하고 부자유스럽게 했던 다른 것에 묶이는 것과 같을까요? 과연 하나님께 묶이는 것이 부자유해 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참 복음을 믿은 사람들에 대해서 교회 바깥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놀랍습니까? 아닙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한계가 있게 마련인데, 성도가 묶여 있는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니까요. 무한에 묶여 있으니 그 자유도 무한해서 세상이 다 달려들어도 묶어 놓을 수 없는 그런 자유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도 바울과 바나바 앞에 제사상을 차렸던 루스드라 사람들처럼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고정관념 때문에 더 온전한 자유를 얻고 더 큰 은혜를 얻는 일에 실패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자유로우신 분이십니다. 또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이 주실 수 있는 자유와 은혜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 어떤 장소나 행동, 그리고 사람에 묶여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강하게 묶일 수록 우리에게 주어지는 자유는 더 크고 풍성해 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하나님께 더 단단히 묶이겠다고, 그래서 더 온전하고 풍성한 자유를 얻겠다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고정관념은 물론이고 특별한 은혜도, 심지어는 기적에 대한 경험조차도 여러분을 묶게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그런 것들은 그저 하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생각하시면서 은혜를 주실 수록 더욱 더 분명하게 하나님만 바라보시고, 놀라운 일을 경험할 수록 더욱 더 단단하게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만  묶어 놓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고 또 알 수 없는 참 자유를 누림며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