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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절기

2014-2015 송구영신예배 -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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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시편 55편 22절




지금 우리는 또 다시 1년을 보내고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서 함께 올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만 사실 지금 이 시간은 사람들이 어떻게 보내야 잘 보낼 수 있을까 가장 고민스러워 하는 시간들 중의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이 시간이면 마음을 새롭게 하고 각오를 새롭게 하며, 또 희망을 회복하기 위해서 산에 올라 새해 첫번째로 떠오르는 붉은 해를 보거나 새해의 출발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환호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산도 바닷가도 그리고 종소리가 울려 펴지던 거리도 썰물이 쓸고 간 겨울 갯벌처럼 썰렁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거기 모였던 사람들의 마음에도 똑같은 허전함이 몰려듭니다. 지난 해를 정리하고 무언가 다가오는 새해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하는 소망에서 나오는 몸짓들이지만 그런 몸짓들이 한 사람의 인생에, 그리고 새로 맞이하는 한 해에 묵직한 의미를 가져다 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이렇게 다가오는 새해의 의미를 스스로 찾으려고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올 한 해가 그러했듯이 다가오는 한 해도 그저 우연히 주어진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이 있으셔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선물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곳에 있지 않고 하나님 앞에 함께 모여 예배드리면서 지나가는 한 해의 마지막 시간과 다가오는 한 해의 첫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이 예배를 통해 우리 인생과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말씀의 비추임을 받으며 지난 시간들을 평가해 보고 다가올 시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고, 또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드리는 일을 통해서 그 뜻을 향한 첫 발자국을 떼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는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런 은혜와 복을 허락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삶이 짐을 지고 가는 듯한 그런 삶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바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만 있으면, 또 저것만 있으면 내 인생이 가벼워질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것을 얻으려고 애써 쫓아가지만 그것을 붙들게 되는 사람도 많지 않을 뿐더러 그것을 붙들었다고 해서 그 인생이 가벼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저마다의 인생은 누구에게나 자기 주인에게 무거운 짐을 지웁니다. 짐의 종류가 다를 뿐이지 짐을 지지 않는 인생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러워 하는 사람도 그 사람만의 짐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그런 짐을 완전히 내려놓고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세상에 없습니다. 인간은 죄인이고,  죄인이라는 그것 자체도 짐이지만 항상 쓸데 없는 짐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고 나면 모든 짐에서 해방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야 말로 모든 고통과 고난, 어려움의 무풍지대에 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 아닌 복음, ‘다른 복음’을 따라가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만큼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짐을 완전히 내려놓고 아무런 거리낌 없는 삶을 살고 싶어한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허상이고 거짓입니다. 꽤 긴 시간을 그렇게 보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런 세월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또 그런 세월이 계속된다고 해도 나중에는 그것 때문에 문제가 생겨납니다. 안타깝게도 죄인인 인간은 전혀 어려움이 없는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1등만 하던 아이가 2등을 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엄친아로 자란 사람은 직장에 취직해서 부적응자가 되기 쉽습니다. 너무 좋기만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여성들은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게 될 확률이 더 높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죄인이라는 말의 또 다른 의미입니다. 그러니 사람은 짐을 지지 않고 살아갈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도 우리가 짐을 지고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되는 말씀을 주십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라” 이 말씀은 짐을 지고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들, 계속해서 다른 짐이 지워지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들에게는 정말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짐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맡아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말씀을 주실 때, 하나님의 특별한 이름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 이름이 무엇이죠? 바로 ‘여호와’라는 이름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다양한 이름들이 나오는데요. 그 중에서도 이 ‘여호와’라는 이름은 전능하신 분, 무에서 만물을 만드신 분, 구원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름입니다. 만약 제가 여러분을 향해 “여러분, 저에게 여러분의 짐을 맡기십시오. 제가 맡아드리겠습니다.”라고 한다면 “당신의 인생을 나에게 주십시오. 그리고 가벼운 삶을 살아가십시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기가 될 것입니다. 저에게는 전혀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똑같은 말을 한다면 그것은 진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며, 전능하신 분이시고,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창조주이시며 게다가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힘들게 하고 또 얽어매고 있는 짐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맡길 수 있고 또 하나님께서는 그 짐을 전부 맡아 주실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시편 103편 13-14절은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아버지가 자기 자녀를 불쌍히 여기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티끌이 어떤 것인지 완전히 아십니다. 또 우리의 본질이 그 티끌처럼 보잘 것 없고 덧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티끌같은 우리가 질 수 없는 짐을 지고서 사는 것을 그냥 보실 수가 없으시니 그 짐을 져 주십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아버지가 자녀에게 그렇가 하듯 우리가 짐을 지고 사는 것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그 어떤 짐도 맡아주실 수 있고, 또 실제로 맡아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말을 들을 때, 우리 안에서는 종종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올 때가 있습니다.   “맡겨도 별 수 없던데요? 상황은 여전히 똑같고 마음은 여전히 평안하지 않던데요? 그래도 내 인생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던데요?” 하고 말입니다. 맡겼는데도 그렇다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틀렸든지 아니면 우리의 맡기는 행동에 문제가 있든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맡기는 것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만약 내가 내 짐을 하나님께 맡기는 일이 잘못되어 있다면 그것은 맡겨도 맡긴 것이 아니게 되니까요. 22절은 원래 다윗 개인의 인생경험에서 나온 그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가 살면서 수없이 경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다른 성도들도 자신의 삶에서 거듭해서 똑같은 경험을 하였고, 그래서 모두들 ‘내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도 이런 하나님이시다’라고 이구동성으로 증거했습니다. 그래서 시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미 오랜 시간을 두고 공증된 사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도 도장을 찍어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들 중에는 22절의 말씀을 자신의 삶 속에서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을 것일까요? 심지어 시편 68편 19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서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의이신 하나님”이라고 까지 말하고 있는데, 왜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자주 경험하지 못하면서 사는 것일까요?  


55편의 앞부분으로 가 보면 거기에는 다윗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원수와 악인이 압제를 받았습니다. 그 압제가 너무 심각해서 이제는 꼼짝 없이 죽었구나 하는 두려움과 극심한 고통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속였고, 심지어는 항상 함께 예배드리러 다니며 재미있게 의논하던 동료와 가까운 친구들에게서 미움도 받고 배신도 당했습니다. 그 때 다윗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그는 자신이 드린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여 탄식하오니…”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다윗은 한 두 번 기도하고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대충 마음 없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반복해서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애원하며 기도했고 탄식하며 기도했습니다.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을 믿고 기도했습니다. 22절은 바로 그 결과, 그런 기도를 드리고 또 드린 후에 그가 경험했던 은혜에 대한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를 나눠보면 정말 많은 성도들이 짐을 지고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한숨을 쉽니다. 한탄을 합니다. 근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주눅이 들어 있습니다. 크고 작은 짐들이 그 인생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물론 그래도 견딜만은 합니다. 그렇다고 죽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마음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얼굴에는 환한 기쁨이 없구요. 계속해서 답 없는 이야기만 반복합니다. 몇 년이 흘러가도 별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좀처럼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바로 기도입니다. 물론 기도를 아얘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가 간절하지 않습니다. 지속적이지도 못합니다. 탄식하며 기도하지 않고 부르짖으며 기도하지 않습니다. 딱 짐 때문에 괴로운 만큼만, 딱 그 그 짐때문에 힘들었던 기간만큼만, 그 짐을 벗어버리기 위해서 다른 방법을 썼던 그 열심만큼만 기도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고 부르짖는다면 될텐데 그렇게 하질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저 그것이 인생이려니 하고 살아갑니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무거운 짐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인생 자체가 짐이구요. 직장도 짐이고, 가족도 짐이고, 생활도 짐이고, 건강도 짐이고, 자녀들도 짐이고, 부모들도 짐입니다. 사실 신앙도 짐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지키고 돌보는 일이 결코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뿐인가요? 그렇게 하려고 한다고 다 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이런 짐이 있다는 것 자체를 부인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부인한다고해서 그 짐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나에게 맡겨라 내가 너를 붙들어 주고 그 짐 때문에 흔들리지 않게 해 주겠다”고 말입니다. 이게 사실일까요? 사실입니다. 그저 성경에 나와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라 수많은 성도들이 지금도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입니다. 


저희 어머니께서는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셨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어머니께서는 급성으로 간염을 앓으셨는데, 진행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입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황달에서 흑달로 발전되었습니다. 간질환에 대해서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흑달까지 가면 끝입니다. 병원에서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때 어머니께서는 병상에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어린 자식새끼들 놓고서 세상을 떠나야 한다니 그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가 어땠겠습니까? 병실이니 소리치지 못했을 테지만 속으로는 가슴이 터지는 기도로 기도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이제 나았다’는 확신이 들더랍니다. 그리고는 그 날부터 급속도로 치료가 시작되는데, 좀처럼 기적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 의사들까지도 이건 기적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 후에도 어머니는 제 기억으로는 다섯 번이나 간염이 재발하였지만 여전히 건강하십니다. 지금도 투병 중인 제 동생 때문에 그렇게 피곤하고 힘드시는데도 이상하게도 간에는 전혀 이상이 없습니다. 네번째 재발하면 간경화가 되고 그러면 결국 간암이 되어 죽게 되는데, 하나님께 짐을 진짜로 맡겼더니 그 짐을 진짜로 완전히 맡아주신 것입니다. 


청년부 때, 제 동기 중 하나가 도금을 하는 업체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금속증기가 폐로 들어가서 심각한 폐질환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질병을 치료하는 약을 먹어야 하는데, 설상 가상으로 검사를 해 보니 간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시겠지만 폐를 치료하는 약들은 대개가 무척 독해서 간에 무리를 주는데, 간이 좋지 않으니 정말 그야 말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본인은 그렇게 살고 싶어하는데도 그저 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청년부원들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금식을 해가면서 꼭 살려달라고 살려만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놀랍게도 한 동안 그렇게 기도한 후에 친구가 치료되기 시작했고 제 기억으로는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다시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간절한 기도, 부르짖는 기도, 가슴을 찟는 기도로 그 짐을 하나님께 맡겼더니 진짜로 그 짐을 맡아 주셨습니다. 이런 경우는 그 짐 자체를 옮겨 주시고 대신 맡아 주신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짐을 맡아 주시는 방법은 이것말고도 또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제 동생이 쓰러지고 나서 저와 저희 어머니가 경험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저러다가 세상을 떠나면 어떻게 하나 두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제 동생보다 어머니가 훨씬 더 걱정스러울 정도였으니까요. 아마 계속 그런 상태였다면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렇고 그 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때는 자다가 일어나 통곡을 하기도 하고, 밥을 먹다가 눈물 흘리며 기도하기도 하고… 어머니는 잠을 이루지 못하며 기도하시기도 하고… 그렇게 몇 달이 흘렀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동생은 세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구 흔들리기만 하고 낙심과 두려움으로 채워져 가던 어머니의 마음이 어느날 부터인가 단단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어머니와 비슷한 체질이었기 때문에 잘 아는데 저희 어머니는 결코 그럴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물론 여전히 마음은 아파하시지만 이제는 흔들림 없이 잘 지내고 계십니다. 이제는 저러다가 고쳐지지 않으면 어쩌지라는 말도 하지 않으십니다. 저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생걱정 안합니다. 이런 경우는 짐은 그대로 놓아두시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그 짐을 지는 사람을 바꿔놓으십니다. 엄청 무거운 짐이죠. 보기만 해도 질릴 정도로 큰 짐입니다. 그런데, 전혀 그렇게 생각되지 않고 그렇게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마음이 저의 경우에는 저를 둘러싼 모든 일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나 목회를 바라볼 때도 그렇고, 자식들을 바라볼 때도 그렇고, 심지어는 저 자신의 부족함을 바라볼 때도 그렇고… 굉장히 짐스러울 수 있는 것들이 저에게 많이 짐스럽지가 않습니다. 동생의 일처럼 기도로 맡기니까, 진짜로 맡기니까 그게 저에게 무거운 짐이 아니라 충분히 질만한 짐으로 변한 것입니다. 아니 그 짐을 져야 할 저를 강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짐을 맡기는 사람의 짐을 맡아주시는 방법은 크게 보면 이렇게 두 가지입니다. 짐 자체를 치워 주시던지 아니면 짐을 져야 할 사람을 강하게 해 주시던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복은 딱 한 종류의 사람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바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진짜로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부르짖으며 기도해야 하고, 탄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 짐을 맡으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예로 들어드린 일들처럼 큰 일들이 아니라 사는데 크게 지장이 없는 일을 가지고는 간절하고 애통하게 부르짖으면서 기도하게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사는데 별 지장이 없다고 느껴지는 짐들이 실제로도 우리 삶에 별 지장을 주지 않고 있습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증명하고 또 거울에 비치고 서로의 눈에 보이는 우리의 표정이 증명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불편한 눈길이 증명하고, 또 그들에게 건내는 말 한마디가 더 확실하게 증명합니다. 폭풍이나 태풍처럼 커다란 어려움만이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는 것은 아닙니다. 작은 여우들이 커다란 포도원을 허무는 것처럼 우리가 별로 지장 없다고 내버려 두는 인생의 짐들이 우리의 삶을 갉아 먹고 있고,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우리 인생을 넘어뜨릴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만 무너뜨려 놓으면 그 인생은 서 있는 것 같아도 서 있는 것이 아닌 그런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무겁게 하는 것들이 모두 다 너무 커서 지기 힘든 짐들입니까? 아니면 작은 근심이나 별것 아닌 미움, 내 마음대로 풀리지 않은 사소한 일들처럼 별 지장 없는 것들입니까? 아마도 작은 일들이 더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짐이 크든 작든, 가볍든 무겁든 간에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맡아 주실 때까지, 그래서 내 영혼과 삶이 가볍게 느껴질 때까지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표정 속에서 평강과 기쁨이 되살아날 때까지, 내가 다른 이들에게 건네는 말이 편안한 말이 되고, 내 마음 속에 있는 이유 모를 앙금이 사라질 때까지 간절히 기도하고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진짜로 하나님께 우리의 짐을 맡기면 하나님께서는 그 짐을 진짜로 맡아 주십니다. 더 이상 우리 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짐이 되게 해 주십니다. 여전히 인생의 짐 때문에 무겁고 힘든 삶을 살고 계시고, 그 짐에 눌린 삶을 살고 있다면 오늘부로 그런 불편하고 힘겨운 삶을 하나님 앞에 내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2015년부터는 그게 크든 작든 여러분을 붙들고 있는 짐, 여러분의 마음에서 평강과 은혜, 그리고 만족과 기쁨, 사랑을 빼앗아가고 있는 그 짐들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고 또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작다고 무시하지 마시고 간절하게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아뢰시기 바랍니다. 아얘 그 짐이 벗겨지거나 아니면 그 짐이 가볍게 느껴질 때까지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기도의 수고를 하십시오. 제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여러분의 삶과 마음, 그리고 생각의 짐을 벗어버리고 가벼운 삶을 살기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혼자서 끙끙거리며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건 정말 어떻게 말씀드려도 절대로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맡기면 맡아주신다는 것! 이것은 변함 없는 진리입니다. 모든 세대의 성도들이 경험하고 또 경험해 온 영원히 복된 사실입니다. 기도의 수고가 무거워서 또다시 포기한다면 2015년도에도 우리는 그 짐을 직접 지고가는 무거운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2015년에는 무엇보다 기도하기로, 기도하며 사시기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온전히 맡겨질 때까지, 짐이 벗어지거나 무겁게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간절하게 기도하기로 작정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그렇게 하고 계신 분들은 그 끈을 늦추지 마시고 더 강하게 쥐십시오. 그래서 맡기면 맡아 주시고, 붙들어 주시고 요동치 않게 해 주시겠다는 그 놀라운 약속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성도만이 누릴 수 있는 비밀스런 복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으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라” 할렐루야! 2015년 한 해는 이 위대한 약속을 붙들고 열심히 기도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짐을 맡아주시고 또 가볍게 지게 해 주시는 은혜 속에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