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21장 1-16절
설교준비를 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을 읽다가 저는 문득 제가 처음으로 저희 모친에게 목사가 되겠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가 생각 났습니다. 저는 원래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교회 부흥회에 갔다가 목회자가 되겠다고 손을 번쩍 든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후에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목회라는 것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생각을 아얘 접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저의 그 헌신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 후에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준비를 하는 중에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이 너무 강력해서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하나님께 항복하고서 목사가 되는 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는 얼마간의 기도 기간을 가진 후에 처음으로 저희 모친에게 그 결정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 때 저희 모친은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근데 왜 하필 그 길을 가려고 하니? 너는 마음도 여리고 건강도 좋지 않은데 어떻게 그 길을 가겠니?” 사실 지금도 저희 모친은 비슷한 말을 많이 합니다. 신학교에 간지 20년이 넘었고 목사가 된지도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왜 목사가 되어서 고생스럽게 사느냐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저의 모친이 신앙이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사실 그 때도 신앙 때문에 저를 극구 만류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희 모친은 제가 목사가 되는 일을 그다지 기뻐하지 않으셨고, 지금도 제가 목사인 것을 편안하게 바라보지 못하십니다. 그저 제가 고생을 한다고 생각에 걱정이 떨쳐지지가 않아서 그러시는 것이겠지요.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과 깊고 풍성한 성도의 사랑과 정을 나눈 바울은 계속해서 시리아를 향해 항해하다가 두로에 상륙했습니다. 바울이 타고 가던 배에서 두로에 내려놓아야 할 짐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바울은 거기서 7일동안의 휴가 아닌 휴가를 얻게 되었고, 그 곳에 있는 성도들을 만나 교제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성도들 중에 몇 사람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을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는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두로를 떠나 그 다음에 도착한 곳은 톨레마이라는 곳이었고, 거기서 하루를 머문 후에 가이사랴에 도착했습니다. 가이사랴에는 일곱집사들 중의 한 사람인 전도자 빌립이 살고 있었고, 그래서 바울과 일행은 그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가보라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 부터 와서 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보자 마자 이 사람은 바울의 허리 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손과 발을 꽁꽁 묶은 후에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 띠의 주인을 이렇게 묶어서 이방인들에게 넘겨 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바울의 일행과 가이사랴의 성도들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게 적극적으로 만류하고 나섰습니다. 아마도 이 때, 바울의 일행들은 그 사람들에게 두로에서 있었던 일도 말해 주었을 것이고, 그래서 이들의 입장에서는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서는 안된다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말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대신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왜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울어서 제 마음을 상하게 합니까? 저는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당하는 일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일도 각오했습니다.” 그들은 물러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바울의 결심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일행은 이렇게 해서 다시 가이사랴에서 만난 몇몇 성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성경에서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제가 목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걱정하고 말리셨던 모친 생각을 했던 것은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바울의 일행과 다른 성도들의 마음이 꼭 저희 모친의 마음과 비슷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그랬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논리적으로 이런 저런 이유가 있으니 바울 당신은 예루살렘으로 가면 절대로 안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울면서 했으니까요. 이것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자신의 여행을 계속하기 위해서 넘어가야만 했던 가장 큰 장벽이었습니다.
일행들과 성도들은 그냥 아무런 근거 없이 바울을 말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두 번이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에 대한 성령님의 경고를 들었습니다. 한 번은 집단적인 계시를 통해서, 그리고 또 한 번은 선지자를 통해서 예루살렘에 가면 일어나게 될 일에 대한 정확한 그림까지 보면서 말이지요. 이것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도록 막아야만 하는 이유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들은 바울을 너무나 사랑하고 아꼈습니다. 아직 간다, 안간다 ,바울의 이야기를 듣기도 전인데, 거기 가면 겪게 될 일을 알게 된 일만으로도 눈물을 뚝뚝 흘릴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니, 그런 그들이 바울을 만류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특히 목회자나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이런 성도들과 이런 교회가 있다는 것은 정말 커다란 축복입니다. 이렇게 서로 사랑하고 아끼며 또 그런 감정을 마음껏 드러내놓고 함께 속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공동체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 특히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큰 위로가 되고 또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보면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때로 그 당사자에게는 가장 넘기 어려운 장애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오늘날도 많은 선교사들은 그런 경험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나 가족들의 만류라는 참 고통스러운 장애물을 넘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라고 하시는 길, 그가 가야만 하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길을 만류하는 것이 비록 방향은 온전하지 못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는 알기 때문에 그 벽을 넘어가기가 더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저는 요즘도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눈물을 흘릴 때가 있지만, 예전에 어떤 영화를 보다가 정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 영화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예수님의 수난을 그린 영화였는데요. 저를 그렇게 울게 만든 장면은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달리는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저를 그렇게 울게 만든 것은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마리아의 모습을 카메라 앵글에 담은 장면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니 마리아를 보아야 하는 그 고통 또한 예수님께서 짊어지셔야만 했던 무거운 짐이었고 실제로는 가장 고통스러운 짐일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아들이기 때문에 져야 했던 그 짐을 끝까지 지지 않으셨다면, 그 고통과 가슴 찢어지는 아픔을 참아내지 못하셨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실 수 있으셨던 것은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 그 어머니를 끝까지 바라 보아야 하는 그 아픈 짐을 감당해 내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길을 가려는 사람 앞에 나타나는 장애물이 비단 악한 사람들의 방해나 핍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를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람들, 그를 아끼고 걱정하는 사람들의 진심 어린 마음이 그가 극복해야 할 가장 큰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사람들은 그런 그들의 진심을 알면서도 그들의 요구를 거절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참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말이지요. 그것 또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 속에 포함되어 있는 어려움일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또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해야 하는 일은 그 자체 만으로도 가벼운 짐은 아닙니다. 자신의 안팎에 있는 거치는 것들을 다 치우고 또 극복해야 그 짐을 질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여기에다가 사랑하는 사람들,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까지 더해지면 그 짐은 몇 배나 더 무거워 집니다. 바울도 그랬을 것입니다. 자신은 예루살렘으로 가야만 합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이 자신에게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몰랐을까요? 아니죠.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수차례나 유대인들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긴 터였으니까요. 그래도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누구보다도 자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성령님의 계시까지 받아가지고 자신이 가는 길을 가로 막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짐은 몇 배나 더 무거워진 것입니다.
이런 경우, 대개 우리들은 그 무게에 짖눌려서 바람직한 방법으로 그 일을 처리하는 일에 실패하기가 쉽습니다. 자신도 어렵게 내린 신앙적인 결정을 자신이 가장 아끼는 사람들이 방해는 격이 되니까요. 그래서 이런 경우 그저 감정적으로만 처리하게 되거나 아니면 너무 경직된 방식으로 처리하기가 쉽습니다. 그런 점에서 13절에 나오는 바울의 반응은 우리가 이런 경우에, 그 모든 짐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울면서 자신을 막아 서는 동료들과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바울은 ‘지금 그러지 않아도 힘든데, 너희들까지 이러면 어떻게 하느냐’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또 ‘내가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데, 어찌 너희들이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느냐’고 그들을 비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대신 사도 바울은 그들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심정을 있는 그대로 알려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만류는 언제나 진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들을 진심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들도 마음으로 다가 왔느니 우리도 마음으로 가다가야 합니다.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닥쳐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일수록 자꾸 이 일을 영적인 대결구도에서만 생각하게 되고 또 그렇게 처리하려고 하게 됩니다. 나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가로 막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그렇게 처리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이 더 큰 상처와 더 깊은 갈등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그래서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나를 걱정해 주는 마음과 사랑을 있는 그대로 알아주고 또 그들의 마음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전달해 주면 됩니다. 그러면 갈등과 대결은 막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서 끝나면 안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그렇게 마음을 마음으로 알아 준 후에, 그 다음에는 자신의 뜻과 결정, 그리고 자신이 따라야만 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분명하고 단호하게 밝혀주어야 합니다. 바울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바울의 말을 가만히 살펴 보면 이상하게도 거기에는 ‘이 일은 하나님의 뜻이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단지 그 일에 대한 자신의 결정과 단호한 의지만 들어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바울을 말리고 있는 동료들과 성도들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 또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서로 부딛히게 만드는 것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이렇게 되는 것을 방지하려고 그저 그 일에 대한, 그리고 그리스도를 향한 자신의 단호한 헌신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주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바로 그 신앙 때문에,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가족이나 형제,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갈등을 겪게 될 때가 있습니다. 내 입장에서는 그들의 이야기를 따르는 것이 내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되기 때문에 그들의 말대로 할래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지요. 일단 우리가 내가 가야 할 그 길, 내가 해야 할 그 일을 양보할 수 없는 거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양보하거나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부딛히고 대결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럴 때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지혜란 것이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마음으로 다가왔으니 나도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끝까지 나를 이해해 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과 마음이 오고가면 됩니다. 그러면 갈등과 다툼은 사그라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후에는 하나님의 일을 향한 나의 뜻과 결단은 단호하고 정확하게 이야기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 일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만약 그 사람이 나를 정말로 걱정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분명히 그런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여 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바울의 이 지혜를 배워서 때로 신앙 때문에 경험하게 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오해와 갈등을 잘 넘어서서 가야할 길을 끝까지 달려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