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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02.08. 주일오전 - 오직 강하고 담대하소서(여호수아 2)


2. 수0110to18 - 오직 강하고 담대하소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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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여호수아 1장 10-18절




신앙은 이 세상의 어떤 일보다도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일입니다. 그것은 신앙이라는 사건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영혼 안에서 부터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이 은혜를 받아도 내가 은혜를 받지 않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고, 온 세상이 천국이 되어도 내 마음이 지옥같다면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결국 신앙은 개인적인 사건, 그것도 지극히 내면적인 사건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영혼이며,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는 개인이 전부가 아니고 또 전부가 될 수도 없습니다. 사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많은 성도들에게 그렇게 큰 능력이나 흔들리지 않는 든든함과 풍성함을 주지 못하는 것은 신앙이 점점 더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만 여겨지고 있고 그러는 만큼 신앙생활에서 공동체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이 이렇게 된 이유는 교회에도 있습니다. 교회가 자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실망을 준 것이 사실이니까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 없는 신앙생활, 공동체가 없는 믿음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망가졌다면 함께 고쳐 가면서, 없다면 찾고 세워 가면서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고 그 안에 신앙의 뿌리를 내리고 또 성장해 가야 합니다. 


우리가 종종 신앙에 대해서 ‘나만 잘 믿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또 그런 이야기도 듣곤하지만 그래서는 신앙이 가진 진짜 유익과 능력이 어떤지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교회에 계십니까? 아니면 예배당 안에 계십니까? 두 군데 다 계십니다. 여러분은 예배당과 교회의 차이를 잘 아시지요? 예배당은 예배를 위해서, 또 모임을 위해서 지어진 건물이나 공간을 말합니다. 그러면 교회는요? 교회는 장소나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이고 그래서 교회는 결국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이 바로 교회입니다. 아침에 댁에서 나오실 때, 지금 예배당에 간다고 생각하시면서 오신 분들은 거의 없으실 겁니다. 아마 다들 교회에 간다고 생각하시면서 여기 오셨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습관적으로 교회에 간다는 말을 사용하지만, 이 ‘교회에 간다’는 말 속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광현교회라는 하나의 교회에 속한 식구들이고 또 지체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까지 같은 것은 아닙니다. 다 뿔뿔이 흩어져서 개인적으로 살아가게 되지요. 그러다 보니 평상시에는 마치 내가 개인으로 살면서 개인적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게 되구요. 그런데, 이렇게 주일에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게 되면 우리는 내가 따로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에 속한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고 교제하면서 다시 한 번 한 몸됨을 회복하게 됩니다. 다시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가족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교회’에 오는 이유이고, 단순히 예배당에 예배만 드리러 오면 안되는 이유이고 교회가 반드시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한 몸을 이루고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현실적으로 볼 때,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공동체성이 많이 깨져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진정으로 한 몸의 일부분이라고 여기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그런 교회는 정말 드문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한 몸의 지체들처럼 서로 친밀하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하면 은근히 ‘과연 그게 될까? 가능한 일일까? 이대로도 괜찮은데 꼭 그래야 할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고개를 듭니다. 그런 말들이 의미없는 표어처럼 귓가를 맴도는 소음정도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물론 현실의 교회들의 모습을 보면, 그리고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이 저절로 생겨나게 되지요. 그렇지만 ‘교회’는 반드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가 되어야 하고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힘든 수많은 이유가 있더라도 공동체가 되고, 한 몸이 되고, 하나가 되는 일을 포기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려다가 상처를 입고 아픔을 겪게 된다고 하더라도 꼭 그 길을 가야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하나가 되어야 하고 또 하나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모든 성도들은 예외 없이 하나님과 맺은 한 언약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람은 아담인데요.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가득하라’고 하셨습니다.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복 줄테니 너 복 받아라 하신 것 같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온 인류를 아우르는 하나된 공동체의 조상으로 세우시고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복을 약속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실 때, 수 많은 자손을 주시고 큰 나라가 되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단순히 자녀를 많이 낳는 복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셀 수 없이 많은 하나님 백성들, 그러니까 온 세상을 아우르는 교회의 시작이 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만드실 때부터 하나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 한 몸을 이룬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고 계셨고, 그 계획은 그 때부터 단 한 번도 포기된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모든 약속 안에 항상 큰 민족과 나라에 대한 약속이 들어있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것은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그 약속이 성취되었고, 마지막의 완전한 완성을 향해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언약 안에 있는 언약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언약이 하나이기 때문에 성도는 교회 안에서 결코 교회라는 공동체와 상관 없는 개인으로만 남아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계속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하실 테니까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셨고,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않을 테니까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 언약 안에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실 복들과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드려야할 순종을 하나로 묶어 놓으신 것입니다.  


다이너마이트는 엄청난 폭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커다란 바위도 한 방에 가루로 만들어 버릴 정도의 힘이 그 안에 있지요. 그렇지만 다이너마이트만 가지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 자체로는 별로 단단하지 않은 작고 둥근 막대가 정도 밖에 안되니까요. 다이너마이트가 제 힘을 발휘하려면 그것이 폭발하기 전에 반드시 한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거기 붙어 있는 심지에 불이 당겨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그 속에 숨겨진 어마 어마한 능력이 밖으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이 당겨져야 합니다. 그래야, 원래 그 약속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은혜, 그리고 엄청난 복이 진짜로 우리와 상관있어 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순종, 그것이 다이너마이트의 심지에 당겨져서 그 안에 있는 엄청난 능력들을 끌어내는 불씨입니다. 순종이라는 말은 요즘 성도들에게 참 갑갑하게 여겨지는 단어들 중의 하나입니다. 순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얼굴이 환해지고 웃는 얼굴이 되는 성도들은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자유, 자율성, 개인의 개성, 심지어 개인의 욕망까지.... 이런 것들이 하나님보다 더 대접을 받는 시대가 바로 이 시대이고 우리들 역시 그 속에서 살아가다 보니 우리도 하나님이 아니라 나 개인이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반면에 복과 은혜와 같은 말들은 어떻습니까? 이런 말들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무리 듣고 들어도 좋고 또 좋은 말들이지요. 평생에 듣던 말씀이지만 또 듣기를 원하는 그런 말씀이지요.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복과 은혜만 좋아하고 순종은 싫어할 수 없습니다. 복과 은혜만 챙기고 순종은 나몰라라 할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떨어질 수 없는 하나로 묶여 있고, 게다가 순종이 그 복과 은혜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내가 언제나 함께 할 것이고,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결국 너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해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너는 용기를 내어 담대하게 내가 너에게 준 모든 율법에 순종해야 한다고 하신 것은 여호수아에게 처음으로 주신 새로운 약속과 요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약속이었고 또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의 자격으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복된 약속들이 모두 자신에게 주어질 것을 믿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의 든든한 언약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10절로 들어가면서 여호수아서의 분위기는 완전히 뒤바뀝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상황들 때문에 약해져 있었고 담대함을 잃어버렸던 여호수아는 이제 각 지파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으고 단호하게 명령합니다. 사흘 안에 요단강을 건너게 될 테니까 백성들에게 그 준비를 시키라고 말입니다. 정말 많이 달라져지요? 그런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언약 답게 믿고 붙드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때로는 연약해지고 의기소침 해지며 또 용기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때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새롭게 붙들면 그 사람은 다시 강해지고 다시 담대해 집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실제로 자신과 함께 하시고, 힘을 주시고, 모든 것이 되어 주실 것을 확신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함께 하시면서 주시는 복과 은혜들이 실제로 자신의 것으로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에는 아주 특별한 능력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언약 속에 담겨있는 복들을 먼 미래의 불확실한 일이 아닌 지금 여기서 경험하며 살아가는 현실로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진짜로 믿는 순간부터, 그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실질적인 언약 관계 가운데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그 언약의 내용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내가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됩니다. 여호수아의 담대함은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서 ‘그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거야. 내가 순종하기만 하면 정말로 함께 해 주실거야. 그러니 힘을 내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정말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을 때, 그 믿음을 통해서 이미 그 언약 속의 모든 복들이 실제로 여호수아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언약을 진짜로 믿는 믿음이 아닐 때, 그 언약 속에 담겨져 있는 모든 복된 약속들은 여전히 미래의 희망사항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불안하고 두려워 하게 되지요. 그렇지만,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언약을 진짜로 믿는 믿음이 되면, 언약 속의 모든 복들은 그 믿음 안에서 이미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이 됩니다. 나에게는 이미 현실이 됩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불안함도 사라집니다. 잔잔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든든함이 마음과 생각을 지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들이 삶의 여기 저기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적당히 믿는 믿음이 아니라 진짜로 믿는 믿음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 도장이 찍혀야 계약서가 나에게도 현실적인 효력을 갖게 되듯이 나의 진짜 믿음이 더해져야만 하나님의 언약은 내 삶을 위한 진짜 능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의 믿음이 바로 이렇게 쓸모 있고 능력있는 믿음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담대하고 명확하게 백성들의 지도자들에게 명령을 내린 여호수아는 이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반지파를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너희들이 먼저 요단강을 건너가서 다른 지파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데 선봉대가 되어 싸워 달라고 말입니다. 사실 여호수아의 입장에서는 이 일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을 차지하는 일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성격 때문인데요.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일은 각각의 지파가 따로 따로 알아서 해야할 일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 이루어야 할 하나의 일로 주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들 요단 동쪽의 지파들이 여호수아의 말을 따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 덕분에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는 더 쉽게 그리고 더 확실하게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자기 땅을 할당받았고 또 그 땅을 땅을 차지한 사람들이 자기 목숨을 걸고 다른 지파를 위해서 앞장서서 나간다면 다른 지파들도 하나가 될 수 없는 이유들을 내려 놓고 다들 기꺼이 하나가 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가나안 정복도 하나가 된 하나님의 백성의 협력하여 이루는 하나의 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단동편의 지파들이 이 요구를 받아들이는 일이 여호수와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요구는 요단강 동쪽의 지파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였습니다. 그들은 이미 자기들이 할당받은 그 땅에서 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요단 동쪽 지파들은 한 마디 말도 덧붙이지 않고 여호수아의 말을 그대로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일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하나가 되어서 이루어 가야 할 하나의 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렇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던 여호수아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였을까요? 사실 아무 것도 생기는 것이 없는데 말입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셨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우리는 이 말이 이미 자기 몫의 땅을 할당받고 이미 거기 머물고 있던 사람들에게 한 말이라는 것에 유념해야 합니다. 그 때 이미 그들은 땅을 받았고, 거기서 편안하게 살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 일을 현재의 일이 아니라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는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말한 것일까요? 여호수아의 말은 아직 그 땅은 온전히 너희 것이 아니며, 지금 너희들이 누리는 안식은 참되고 온전한 안식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여호수아가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안식하게 하신 것같이 너희의 형제도 안식하며 그들도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그 땅을 차지하기까지 하라 그리고 너희는 너희 소유지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해 돋는 곳으로 돌아와서 그곳을 차지할지니라” 


원래 성경에서 땅이란 안식을 뜻합니다. 땅과 안식은 완전히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은 따로 분리되어 있는 열 둘이 아니라 마치 한 사람과도 같습니다. 모두가 다 한 언약으로 하나님과 하나로 묶여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가나안 땅은 그렇게 하나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하나가 되고 또 모두가 함께 가나안 땅에서 자기 몫의 땅을 차지하게 될 때, 비로소 모두가 함께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지금 너희는 진짜로 너희 땅을 차지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너희가 누리는 안식은 진짜 안식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결국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그 땅을 주실 것이고, 또 너희를 진짜로 안식하게 해 주실 것이니까, 형제 지파들이 땅을 차지하고 또 안식을 누리는 일을 앞장서서 도와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단 동쪽의 지파들은 그 이야기를 완전히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생각도 여호수아의 생각과 똑같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요단 동편의 지파들은 형제 지파들이 땅을 차지하고 안식을 누릴 때까지는 자기들이 누리는 안식은 참된 것도 또 온전한 것도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들도 확실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자신들이 해야할 일을 결정했던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린 것 같기는 하지만, 제가 다니던 교회의 한 여 집사님의 이야기를 한 번 더 들려 드리겠습니다. 이 집사님의 남편되시는 집사님은 아내의 생일이 되면 꼭 값비싼 옷을 선물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집사님은 그 좋은 옷을 한 번만 입고 거의 입지를 않았습니다. 특히 교회에 갈 때는 전혀 입지 않았습니다. 남편 입장에서는 화가 났습니다. 생각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큰 맘 먹고 옷을 사주는 건데, 전혀 입으려고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하루는 옷장을 열고 맨날 입던 옷을 또 꺼내 입고 나가려는 아내를 향해서 화를 냈습니다. “왜 당신은 내가 사준 옷은 입지를 않는거야? 도대체 왜그래?”하고 말입니다. 그 때 그 아내되시는 집사님은 말끝을 흐리면서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응. 여보. 내가 갈 곳이라고는 교회 밖에 없는데 그런 좋은 옷 입고 교회에 가면 그런 옷 입지 못하는 자매들은 부러워 하고 또 상처 받을 수도 있잖아. 그래서...” 여러분 보시기에 이 여자 집사님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 되십니까? 이 분은 너무 지나친 것일 것입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여러분, 이 집사님과 요단 동편 지파들은 어딘가 닮은 곳이 있어 보이지 않으십니까? 둘 다 자신의 행복을 다른 지체들의 행복과 연결시켜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동체 안의 다른 지체들의 행복과 안식 속에서 자신의 참된 안식과 행복을 찾고 있다는 점에서 둘은 많이 닮아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한 번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그랬더니 바리새인들이 난리가 났죠. 어떻게 안식일에 일을 할 수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 때 우리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죠? “내 아버지가 이제도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정말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안식일인데, 하나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안식일에 쉬지 않으면 절대로 안된다고 하신 하나님이 정작 안식일에 쉬지 않으십니다. 딱 한 번 세상을 지으신 후 첫번째 안식일을 제외하면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안식일에 쉬신 적이 없으십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당신이 만드신 세상,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 특히 이 세상에 사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여호수아, 요단 동쪽을 얻은 지파들, 그리고 말씀드린 그 여자 집사님은 그런 점에서 하나님을 많이 닮아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과연 교회가 어떤 곳이 될 때, 그 교회 안에는 참된 안식과 평안, 기쁨과 든든함이 넘쳐 흐를까요? 교회 안에 하나님을 닮아 다른 지체들의 안식과 평안을 위해서 자신의 평안과 안식을 손해 볼 수 있는 성도들, 그리고 다른 지체들의 평안과 안식 속에 자신을 위한 진짜 안식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아는 성도들이 많아질 때, 다른 지체들의 평안과 안식을 먼저 챙길 줄 아는 성도들이 하나 둘 늘어날 때, 그 교회가 바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교회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언약으로 우리 주님과 묶여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언약으로 서로 서로가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주님과 우리가 그 언약 때문에 몸과 머리가 된 것처럼, 우리들 모두는 그 언약 때문에 한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진 믿음의 싸움을 싸우며, 우리의 삶의 자리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게 하려면, 우리는 하나됨을 지켜 나가야 하고 또 그 하나됨을 회복해야 합니다. 다른 지체들의 안식을 나의 안식과 연결시켜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하고, 그 지체가 안식하지 못하면 나의 안식 또한 불완전하고 불안한 것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고 각자의 믿음의 싸움을 싸우며 또 다른 지체들의 안식을 위해서 수고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주일입니다. 주일은 우리의 안식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일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이 날도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받아 서로에게 그 안식을 나눠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이니까요. 요단 동편의 지파들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강하고 담대하소서” 그런데, 그들은 말만 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의 심중을 헤아리고 다른 형제지파들의 안식을 위해서 자기의 안식을 내려놓으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은 여호수아를 담대하게 해 주고 그에게 안식을 주기에 충분한 능력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안식일에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이 다 그렇게 되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제가 강단에서 여러분을 향해 외치는 말이나,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두런 두런 나누는 모든 말들이 서로를 강하게 하고 담대하게 하는 그런 능력있는 말들이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교회로 모일 때마다 서로가 서로 덕분에 안식을 얻고, 서로가 서로 덕분에 더 강하고 담대해 지는 그런 아름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항상 영적인 싸움, 믿음의 싸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싸움은 절대로 녹녹치가 않습니다. 실제로 자녀 하나 키우는 일도 영적인 전쟁 그 자체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생각 사이에서 우리는 우리 자녀를 어떻게 키워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어려운 시험을 당하고 있는 셈이니까요. 아마 이것은 직장에서, 그리고 가장 친하다고 하는 부부지간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의 언약으로 묶여진 교회 안에 우리를 두시고, 그 하나됨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힘과 격려가 되어 주고 서로가 서로에게 작은 안식을 주면서 함께 싸우게 하셨고, 함께 이기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항상 우리 모두가 하나의 언약 안에서 온전히 하나로 묶여진 하나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다른 지체들의 작은 안식과 담대함의 이유가 되어주는 참 언약의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른 지체들의 안식과 평안함 속에서 자신의 참된 안식을 찾는 참 언약백성으로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내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는 것을 잊지 말게 하소서. 
  2. 우리 모두가 형제와 자매의 안식을 위해서 기꺼이 수고하면서 나의 안식을 나누어 더 풍성하고 든든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하소서. 우리 교회가 서로가 서로를 담대하게 하고 든든하게 하는 성도들의 교회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