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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5.07.17. 금요기도회 -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3(사도행전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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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사도행전 18장 5-11절




    제가 목사다 보니 제가 인터넷에 들어가서 만나게 되는 글들이나 의견들이 성도들이나 목회자들이 쓴 것들이 될 때가 많습니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이스람 문제나 동성애 문제같은 것들이지만, 그와 더불어 참된 목회자에 대한 갈증도 많이 등장하는 주제들 중 하나입니다. 목회자의 도덕성이나 영성, 사랑, 그리고 사회적인 역할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글들도 있지만 많은 성도들이 목회자들, 특히 설교자로서의 목회자에 대해서 가장 심각하게 느끼는 갈증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설교하는 목회자가 드물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그런 글을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 나도 설교자이지만 오늘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이 정말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 말씀대로 설교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성도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며 은혜를 끼치기 위해서 설교하려는 마음이 더 큰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성도들은 어떤가? 과연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될 때, 그것을 진정으로 반길 것이고 또한 그 엄중한 진리들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래서, 제가 제가 목사라는 것을 밝히고서 그런 글들 밑에 “그렇다면 성도들은 진실로 성경이 성경으로 설교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가? 그리고 성경이 그렇게 설교될 때, 정말 그 설교들을 기뻐하고 반가워하며 기꺼이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글을 덧붙여 놓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별로 그런 것 같지가 않습니다. 


    며칠 전에 한 큰 교회의 부목사를 한 분 만나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교회의 성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오늘 한국교회의 성도들의 문제가 그 교회에도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도들이 성경 자체에 관심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시작하고 성경의 내용이나 의미들을 이야기 할 때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예화가 나오면 갑자기 숙여졌던 고개가 들리고 눈이 반짝 거린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 담임목사님도 설교를 할 때, 본문 중심으로 하지 말고 예화중심으로 하라고 주문한다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계속 똑같은 이야기만 드리는 것 같습니다만, 목회자와 성도들, 성도들과 목회자의 관계는 결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목회자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은 곧 성도들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성경이 말하는 것과 같은 그런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고 할 때, 그런 목회자들의 가르침과 인도를 받으며 신앙생활을 해야 할 당사자들이 바로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지요. 성경이 성도란 어떤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면 목회자는 성도들을 그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실 목회자가 성도들을 보면서, 또 성도들이 목회자를 보면서 성도는 이러해야 한다, 목사는 저러해야 한다고 일방적인 이야기를 쏟아놓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목사는 성도를 성경이 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면서 그 이야기를 해야하고, 성도들은 성경의 진리에 순종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서 목회자가 성경적인 목회자가 되어 달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런 이야기들과 요구들이 가치있어지고 의미있어 집니다. 


     오늘로 삼주째 한가지 주제로 설교를 하고 있는데요. 이제 드디어 우리는 제가 이렇게 여러분에게 중이 제 머리 깍는 것같은 설교를 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던 그 말씀 앞에 섰습니다. 그 말씀이란 바로 벌써 세 번째 설교제목이 되고 있는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라는 구절이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이 구절을 처음 읽었을 때, 이 구절은 제가 목회자로서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굉장히 근본적이 질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금새 목사와 설교자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들로 이어졌습니다. 우선, 정말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만 생각하면서 설교자로 일하고 있는가? 과연 목회자란 우선적으로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 목회자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은 목회자의 역할과 관련해서 어떤 사람들이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들이 떠올랐고, 그것이 이렇게 설교가 이어져 가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이 바울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하는 질문에 대한 가장 좋은 대답은 바로 그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일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신실하게 일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아름답고 멋진 열매를 많이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성령님의 역사하심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사람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좋은 열매들을 많이 맺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는 일에 전념했다고 해서 그의 사역이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린도에서의 바울의 사역에 대한 기록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당시 유대인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던 이야기 중의 하나가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만 나오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반대했을 뿐 아니라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 자체를 거부하고 심지어는 핍박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고린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6절을 보시면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구약성경을 통해 예수님이 그리스도, 그러니까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증명해 보였을 때, 그들이 보였던 반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더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로부터 반대와 비방, 그리고 욕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반응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유대인들 때문에 죽을 고비까지 넘긴 적이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바울, 그리고 그 말씀을 전하라는 소명을 받은 바울은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뻔히 반대와 욕설, 심지어는 폭력으로 되돌아 올 줄 알면서도 그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참된 목사, 참된 설교자란 이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 잡혔기 때문에, 그리고 그 말씀을 전하는 일을 소명으로 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뻔히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킬지 알고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만 하고 또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참된 목사이고 참된 설교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이 목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고, 또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목회자는 자신이 정말로 목회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한, 그래서 목회자로 일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한, 절대로 이 일에서 완전히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뜻대로 전하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목사일 수가 없으니까요. 


    목사들도 성도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아할지, 또 무난하게 잘 받아들일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야기를 하면 별로 관심 없어 하고 심지어는 듣기 싫어하며, 거부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목사라는 것을 바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자신이 자기 마음대로나 사람들의 바램대로가 아니라 성경이 이야기하는 대로 목사노릇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래도 좋아하는 이야기 대신에 싫어하는 이야기를 해야 하며, 관심있어 하는 이야기 보다는 그렇지 않은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말씀에 붙잡힌 말씀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저는 사도 바울처럼 말씀에 사로 잡힌 사람도 아니고, 사도 바울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전하는 사람도 못되는 것 같습니다. 비록 그렇게 되는 것이 제가 목표이고, 그래서 여전히 그렇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볼 때마다 스스로에게 실망하게 되고 자신을 책망하게 되지만 그래도 여전히 온전히 그런 목사는 못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바울이 복음에 온전히 사로 잡히고 또 그 복음을 무엇보다도 기뻐했듯이, 성경의 말씀들 중에서 저를 기쁘게 하지 않는 말씀들은 없습니다. 그 의미와 교훈을 깨닫고, 정확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때마다 제 영혼은 정말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런 말씀을 가지고 강단에 서려고 할 때는 정말 정말 그 일이 싫고 피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 주제는 분명히 성도들이 관심 없어 하는 주제이고, 그 교훈은 분명히 성도들이 부담스러워 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목회자 초년생 때는 왜 그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도들이 왜 이런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 왜 관심이 없고, 이렇게 완전한 진리의 말씀을 왜 기뻐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온전히 거듭난 사람들만 있고,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사람들도 있고, 그 사람들은 충분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렇게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런 사람들이 더 많은 곳에서는 주의 말씀을 들고 설교하는 일이 꺼려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설교하면서 그 무관심한 얼굴과 심지어는 불쾌해  보이고 지루해 보이는 표정을 보는 일은 설교자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일일 수 밖에 없으니까요. 


    듣지 않을 것을 알면서, 무관심할 것을 알면서 그런 사람들에게 귀하디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단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에 이르게 하려는 소원을 가지고 있고, 또 더욱 더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고 싶어하는 복음 전도자와 설교자들에게는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그저 말씀만 전하는 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사도 바울이 말씀에 사로 잡혀서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밝히 증언했다는 기록을 읽으면서 바울에게도 설교자로서 그런 아픔과 고통이 있었고, 그런 싸움이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 잡히기를 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말씀대로 전하려는 설교자들이 똑같이 짊어져야 하는 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 짐이 가벼워 지거나 덜 고통스러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는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는 목회자에게 그런 짐이 적게 지워질수록 더 좋다는 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목회자가 하나니의 말씀에 붙잡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그런 짐을 적게 진다는 것은 곧 그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만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고, 또 그만큼 말씀 앞에서 겸손하다는 뜻이 될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가 지녀야 하는 마땅한 모습일테니까요.  


    오늘날 교회 안에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의 유대인들처럼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진리에 관심이 없어하며, 자기가 원하는 말씀만 골라 듣는 성도들은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더 안타까운 것은 한국 교회 안에 그런 성도들이 더욱 더 많아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게 대세가 되어져 가고 있고 아무런 문제가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한국교회의 좋지 않은 면면에 대해서 많이 말씀드리지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시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그다지 은혜롭지 못 할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굳이 여러분에게 자주 그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지금 이 땅의 교회들이 가고 있는 잘못된 길을 제대로 알아야 우리가 그 길로 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 또한 몸된 한국교회에 속한 지체이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문제가 곧 우리들의 문제이고, 계속해서 한국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이 마땅히 해야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몸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또 나만 괜찮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되는 것을 꺼리는 것은 은 정상적인 지체의 모습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체로서 마땅히 몸의 병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 합니다. 그런다고 해서 우리는 한국교회 전체를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한국교회 전체를 바꿀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만이라도, 내 신앙의 모습만이라도 제대로 지켜내는 일입니다. 그게 다가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그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보다도 참된 목회자는 말씀에 붙들려서 말씀을 말씀대로 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때로 그 말씀이 부담스럽고 거슬리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 말씀만이 성도들의 영혼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가장 강력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만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목회자에게 그것을 요구하셔야 하고, 그런 목회자가 될 때 가장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무 너무 부족하지만, 아직도 그 길을 충분히 가지 못하고 있지만 저는 그런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저를 하나님 앞에 세우고 여러분을 살리며 교회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두렵고 부담스럽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모두에게 환영받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저 스스로가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무시당할까봐 거절당할까봐 두렵습니다. 사실 저는 매번 설교를 할 때마다 그런 두려움과 싸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것을 두려워 했는데, 저라고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제가 그런 두려움들을 이기고 온통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 잡혀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는 그런 설교자가 되도록, 그렇게 순전하고 능력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을 베불리 먹이는 하나님의 목동의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꼭 여러분을 위해서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성경이 성경대로 선포되고 가르쳐 지는 것을 진정으로 기뻐하는 성도들이 되도록, 목사가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는 것을 제일 기뻐하는 성도들이 되도록 기도시고, 그런 사람으로 여러분 자신을 결단하며 훈련시켜 나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말씀의 종이 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청하고 순종하는 것! 아마도 이것은 저와 여러분에게 때로는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또 관심 없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자신이 기뻐하는 일을 내려놓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우리 교회에 참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또 즐거이 들려지게 될 때, 우리는 말씀이 우리를 빚어가는 복과 은혜를 경험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로 세워져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목사는 전하라고 하신 말씀에 사로 잡히고, 성도들은 전해지는 말씀에 사로 잡히는 그런 교회로 변화되어져 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그렇게 서로 전하고 들은 하나님 말씀으로 인해 서로 축하하고 기뻐하는 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