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18장 12-17절
제가 처음 전임사역자로 섬기던 교회는 한 100명쯤 되는 성도들이 모여있는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는 큰 교회에서 갈라져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그런 교회였는데요, 굉장히 특별한 점은 그 교회에 담임 목회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교회에 제 친구 아버님의 소개를 받고 갔는데, 돌볼 목회자도 없이 그렇게 성도들끼리 모여 있는 모습이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 청을 거절할 수 없어 그 교회에서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그렇게 원래 교회에서 갈라져 나오고 그런 상태로 근 2년을 지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교회가 목사님을 쫓아내려는 과정에서 일반 법정에다 고소를 했고, 그와 관련된 법정싸움이 끝날 때까지 그만큼의 시간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 때 목사님을 상대로 고소된 건이 지금 기억으로는 열 일곱 건이나 되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지요. 더 놀라운 사실은 그 모든 건수가 다 무고였다는 것입니다. 죄가 없는데도 죄를 꾸며내서 거짓으로 고소를 했던 것이지요.
원래 목사님은 그 일이 몇 달이면 해결될 것이고, 그러면 그 교회에서 목회하려고 하셨지만, 계속해서 무고를 당하고 또 당하는 바람에 그 일이 2년이나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그 목사님께서 컴퓨터를 잘 못 다루셔서 제가 몇 번 소송관련 서류를 준비하는 일을 도와드린 적이 있는데요. 그 때 제가 그 일을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법원에 가면 교회관련 소송을 담당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것을 알고 나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세상에 교회 안에 얼마나 문제가 많고 또 얼마나 쉽게 그 문제를 들고 세상법정으로 가면 교회관련 소송 담당자가 배정되었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분명히 성도간의 일을 가지고 세상 법정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성도들 간에도 문제는 생길 수 있습니다. 그 문제로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할 때가 있을 수 있지요. 그리고 그런 일은 당사자들이 아니라 권위있는 기관이나 사람의 판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원래 교회는 도덕적인 수준으로 보면 이 세상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그저 상식적인 수준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그것을 법으로 정하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데, 세상의 법은 사람의 행동만을 다루는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나 교회가 자신들 안에 생겨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사회법정으로 쪼르르 달려가고 교회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일반 법의 판단을 받고서야 싸움을 그치는 것은 정말 창피하고도 창피한 일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회 법보다도 수준이 낮다고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회 법을 더 권위있게 생각한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항상 말씀과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자신과 이웃들 앞에서 정직합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관계된 일이라고 하더라도 잘잘못을 가리는 일에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자신을 항상 하나님 앞에 세우고 그 분 앞에서 살아가는 것인데,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판단과 행동의 원리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진실됨을 잃어버리고 형식적인 것이 되어 버리면 그 반대가 됩니다. 종교적인 형식을 지키는 점에 있어서는 이전과 같지만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그 사람은 진리를 따라 움직이지 않고 자기 이익과 입장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거짓말을 하고, 힘을 사용해서라도 자기 입장을 관철시키려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교회나 성경의 권위가 아니라 강제적인 힘을 지닌 사회의 법에 더 의존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됨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꼭 지켜야 할 존귀함과 자존심도 모두 저버리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커다란 소송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갈리오라는 사람이 아가야 지역의 총독이 되었을 때, 유대인들이 전부 한통속이 되어서 바울을 고소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갈리오가 총독이 되었을 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갈리오는 주후 51년과 52년 2년 동안 아가야 지역의 총독을 지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고소한 시기는 갈리오가 총독이 된 직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임초기에 대개의 총독들은 지역 사람들의 지지와 인기를 확보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마련인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원래의 법은 어떻든지 간에 숫자로 압력을 가해서 자기들 편을 들게 하려는 것이었지요. 이것은 그 당시 이 지역의 유대교가 얼마나 심각하게 하나님을 떠나 있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 일을 한 번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고소할 때의 모습과 완전히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 때도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압력을 가해서 옳고 그름과 상관 없이 예수님을 처형해도 좋다는 답을 받아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타락한 신앙, 진실성을 잃어버린 교회들이 너무도 쉽게 보이는 모습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생명을 잃게 되면, 기독교 마저도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뭐다 뭐다 하면서 연합체를 잔뜩 만들고, 세를 규합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더러 소금과 빛처럼 스며들고 비치는 일을 통해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라고 하셨는데, 그 일을 할 수 있는 영적인 실력이 없고 능력이 없으니 그렇게 힘이라도 규합해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위험한지 모릅니다. 대개 이런 일들을 하시는 분들은 그렇게 하면 세상에 대한 기독교의 영향력이 커지고 또 세상을 변하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역사를 보면 그것과는 정반대의 역효과만 냅니다.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1996년에 미국에서 여론조사를 했더니 기독교에 대해서 비기독교인들 중 85퍼센트가 긍정적이고 우호적이라는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딱 10년이 지난 후 2006년에 똑같은 설문조사를 했더니 비기독교인들 중에서 기독교에 대해서 긍정적인 의견을 표시한 사람은 16퍼센트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10년 만에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요? 그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가요? 1990년대 말에 미국의 보수주의 교회들이 세속적인 문화를 바로 잡겠다고 조직을 만들고 세를 규합해서 현실정치에 공식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일 때문에 미국 교회는 미국 국민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오해하면 안됩니다. 기독교는 힘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철저히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변화시켜 세상을 감동시키는 사람들의 종교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완력으로 사도 바울을 붙잡아서 갈리오에게 끌고 갑니다. 그리고는 거짓으로 고소합니다.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고 말입니다. 참 우습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말 그대로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율법이 없는 사람에게 와서 율법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그것도 거짓으로 고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유대인으로서의 자존심도 기준도 다 포기한 지극히 이중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짜가 아니면 언젠가는 이렇게 다 자신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참된 것이 아닌 신앙은 위선이고 외식이기 때문에 거기에 자기 자신을 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계획은 완전히 틀어졌습니다. 갈리오는 그래도 원칙에 입각해서 움직이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갈리오는 이미 유대교와 바울이 전하는 복음 사이에 있는 문제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철저히 유대교 내부의 문제이며, 나아가서 어느 정도는 그저 유대인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시기하는 문제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이것이 그의 판결이었고 결국 그렇게 몰려갔던 유대인들은 법정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분이 풀리지 않은 유대인들은 그 당시 회당장이었던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매질했지만 그래도 갈리오는 그 일에 조차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소스데네는 새로운 회당장으로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다가 그런 봉변을 당했던 것 같습니다.
일은 이렇게 끝이 났지만 이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들이 원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일을 통해서 바울을 정죄하고 더 이상 복음이 전해지지 못하게 가로 막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거짓으로, 그리고 정치적인 힘을 사용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고 했지요. 그렇지만 갈리오는 원칙대로 움직였고 또 어느 정도는 복잡한 일에 개입하기 싫어서 너희들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명령을 내리고는 슬쩍 빠졌습니다. 그런데 갈리오는 그 지역에서는 로마 당국을 대표하는 공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의 결정은 그 지역에서는 로마당국의 공식적인 입장이나 마찬가지의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이것이 너희들 내부의 문제이고 절대로 정치적이거나 법적인 문제가 아니며 그래서 로마 당국은 여기에 개입할 생각이 없으니 너희들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히려 이 일 덕분에 기독교는 아가야 지역에서 유대교와 대등한 입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갈리오가 바울을 유대교인들과 대등한 자리에 놓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얼핏 보기에 이 사건은 그저 바울이 억울하게 고소를 당했다가 풀려난 그런 이야기 같이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 사이에 벌어진 싸움에 대한 이야기이며, 또 하나님의 지혜가 승리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인간의 지혜에 의지해서 무언가 원하는 것을 얻고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고 또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대개의 경우,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드러나게 일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사람의 지혜를 따라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연극을 볼 때, 무대에서 움직이는 것은 배우들입니다. 그래서 그 연극이 시작되고 진행되며 또 막을 내리는 모든 일들이 배우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처럼 여겨지지요. 그렇지만 그 뒤에서 그 모든 사람들을 말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며 또 상호작용하게 만드는 것은 연출자입니다. 아무리 배우들이 연기를 잘하고 또 독창적으로 하더라도 그들은 절대로 연출자의 생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연출하시는 연극무대입니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 위에서 연기하는 대다수의 배우들이 자신들이 연출자의 연출 속에서 움직이는 배우에 불과하다는 것과 절대로 그 연극의 흐름 자체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만 다를 뿐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거기에는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이 지혜로운 사탄도 자신의 지혜를 총동원해서 자신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사탄과 그의 부하 격인 악한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들의 의도대로 된 것이지요. 그러나, 어떻습니까? 정작 거기서 이루어진 것은 이 세상과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었습니다. 십자가 위해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정말 이긴 것은 사탄이나 예수님을 못 박은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사탄의 세상의 최고의 지혜와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가 만나 한 판 대결을 벌인 전쟁터였고 결국 그 전쟁에서 하나님은 사탄을 재기불능상태로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우리의 믿음이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이 세상의 방식이나 사람들의 지혜를 따라가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 유혹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강하지요. 온 세상이,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그 방식과 지혜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인간의 드러난 지혜가 아무리 대단해 보이고, 이미 그 효능이 증명된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의 방식이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진짜로 이기는 것, 결국에 성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가 이루어가고 있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고 또 확신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이 누누히 그렇게 말하고 있고, 아주 길게 보면 이 세상의 역사 또한 그것을 반복해서 증명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짧은 인생이 아니라 영원이라는 시간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이기는 편에 서야 합니다.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가리키는 편에 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이기는 것은 영원한 것 밖에 없는데, 영원한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기실 것입니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기고 계시는 것처럼 언젠가는 드러나게 그리고 완전히 이기실 것입니다. 때로 많은 유혹과 시험이 있고, 세상을 따르지 않는데서 오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있을 지라도 언제나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고, 그 지혜의 편에 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수 있는 믿음을 잃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잠시 이기고 성공하는 것 같지만 영원히 지고 실패하는 사람이 되지 마시고, 하나님 처럼 영원이 이기는 참 성도의 영광을 붙들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