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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5.10.23. - 밀레도에서 3(사도행전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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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20장 13-21절




지난 두 주 동안 우리는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건넨 첫마디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 첫 마디는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라…”라는 말이었습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이 한 마디 말 속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 동안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살아온 삶의 길을 회상하고 있고 그 회상을 통해서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앞으로 그들이 걸어가야 할 삶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바울은 지금 자신의 삶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저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꺼내서 자신과 같은 길을 가야 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지도와 나침반으로 내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있는 이유는 자신이 그저 일반적인 기준으로 볼 때, 칭찬받고 존경받을만한 훌륭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예수님을 본받아 살고 일하려고 최선을 다해 애썼기 때문입니다. 그는 에베소의 성도들이 자신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그들 또한 예수님을 흉내내면서 사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분명히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서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기둥은 누가 뭐래도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믿음을 통해서 죄 용서를 받아 구원을 얻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도가 어떻게든 예수님을 흉내내면서 살아야 한다는 원칙의 중요성이 약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로 오셨을 뿐 아니라 두번째 아담으로서 우리의 모범이 되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고 구원받은 ‘참 사람’이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려고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흉내내며 살아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길이고 또 ‘참 사람’답게 살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성도로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만의 삶과 신앙의 이야기들을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들을 들려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면서 살지만 한 편으로는 서로 서로에게는 서로의 삶에 대한 증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써 내려갈 우리 삶과 신앙의 이야기들이 더욱 더 아름다워져 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나중에 우리 주님 앞에 설 때, 서로의 증언 덕분에 더 영광스러워지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자기 삶과 사역의 증인으로 불러세운 사도 바울은 이제 자신의 삶에 대해서 증언하기 시작합니다. 증인들이 눈 앞에 있으니 위증을 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자신을 미화하고 자기가 인정받는 것이 그의 목적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는 이전에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보여 주었던 자신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겸손, 눈물, 그리고 인내… 이것이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 처음으로 언급한 내용인데요. 사실 일반적으로 볼 때, 이런 것들은 지도자가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면서 내세울 수 있는 덕목은 아닙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이런 것들은 강함이 아니라 약함의 상징으로 생각되는 그런 것들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갖추기 원하기 보다는 버리기를 원하는 것들이니까요.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는 이런 것들이 기쁨이나 능력, 강함이나 당당함 같은 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다른 신앙과 구별되고 세상과도 차별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에서 이런 것들이 더 이상 귀하게 여겨지지 않을 때 이미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다운 기독교로 남아 있을 수 없고 신앙 또한 참된 신앙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기독교 신앙은 자기다움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다른 모습을 취하려고 애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목회자들은 스스로 카리스마 넘치는 제왕적인 리더십을 꿈꾸고 있습니다. 성도들 또한 자신들의 목회자가 그런 지도자가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고, 스스로도 그렇게 강한 존재가 되려고 발버둥치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보면 오늘 우리가 기독교 신앙이 대대로 가치있게 여겨왔던 미덕들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참 기독교를 회복하려고 하는 것은 번짓수가 영 틀린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기독교 신앙은 겸손이나 눈물, 그리고 인내 같은 사람들이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자질들을 최고의 가치를 가진 미덕으로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이런 것들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 이 세상을 바라보시고 대하시는 기본적인 태도이고 또한 우리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항상 지니고 계셨던 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알려주는 하나님의 모습은 강한 군주의 모습이 아닙니다. 분명히 그런 모습도 있지만 성경은 오히려 백성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향해서 안타까워 하시고, 항상 자세를 낮춰서 백성들을 찾아와 그들을 간곡히 설득하시는 분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집 나간 아들이나 아내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아버지와 남편의 모습으로, 그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지, 전능, 무소부재, 창조주, 주인이라는 우리 하나님을 설명하는 다른 말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지만 분명히 성경이 알려주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하나님과 똑같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자 하나님이라고 부르지요. 그런데, 이런 성자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것도 왕이나 귀족, 혹은 권세가가 아니라 가장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태어 나셨고 목수가 되어 사셨습니다. 태어나신 곳부터가 마굿간이었으니 예수님의 겸손과 낮아지심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자신의 목숨까지도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내려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온갖 수모와 경멸을 참아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겸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들을 위해서 겸손이라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겸손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여러 번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어져 버린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또 가족과 지인의 죽음 앞에서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죄에 빠져 있는 비참한 인간의 실상과 그 죄의 형벌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참고 참고 또 참으셨습니다. 온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등을 돌릴 때도 그들을 인내하셨고 베드로가 세번씩 맹세까지 해 가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줄 알면서도 그를 버리지 않으셨으며,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아넘길 줄 아시면서도 끝까지 그와 함께 하시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영광이신 그 분이 십자가 위에서 그 모든 멸시와 고통을 참아내셨고, 불멸이신 그 분이 죽음의 순간까지 온 몸으로 죽음을 받아내셨습니다. 그렇게까지 참고 인내하셔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또 자녀가 되는 복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누가 뭐래도 겸손과 눈물, 그리고 인내를 그 어떤 능력이나 자질보다 더 가치있고 귀한 것으로 봅니다. 가장 높은 미덕으로 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오늘날 우리는 교회도, 성도들도 여기에 가치를 두는 참되고 복된 눈이 많이 흐려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입으로는 겸손을 말하고, 눈물을 말하고 인내를 이야기 해도 실제로 그것을 선택하고, 정말로 거기에 가치를 두는 사람들과 교회는 너무나 드물고, 실제로 그것을 따르는 경우는 더더욱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또 세상이 더 잘 압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이렇게 된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교회와 성도가 세상과 뒤섞여서 세상의 방식으로 세상의 것들을 얻으려고 했고 또 세상을 이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을 이기자’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맞습니다. 교회는 분명히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그러라고 부름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니까요. 그렇지만 교회와 성도가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같은 싸움 판에 끼어들어서 이전투구를 벌여 완력과 아름답지 못한 수단으로 이기는 그런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방법으로는 세상과 구별되어 거룩해 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닮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그러라고 부름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사용하는 방법과는 정반대의 방법으로 살아가면서 그 방법으로 세상을 극복해 내도록, 이 세상을 향해 전혀 다른데 정답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냥 생각해 보면 이 방법이 전혀 통할 것 같지 않고 패배가 정해져 있는 방법인 것 같이 보여도 그것이 우리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이기시기 위해서 사용하신 방법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기신 하나님의 지혜가 깃들어 있는 가장 확실하고 능력있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방식으로 이 세상을 구원해 내셨다면 이것보다 더 강력한 삶의 방식은 없을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방식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방식에 따라 살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겸손하고, 우리가 세상을 위해 눈물 흘리며 우리가 세상으로 인해서 참고 인내할 때, 우리는 세상에 지는 것처럼 보여도 세상을 극복하며 세상에 대해서 해답을 들려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도 바울처럼 다른 이들을 향해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우리의 겸손과 눈물, 그리고 인내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인생에 그런 이야기들을 기록해 가야 합니다. 성공담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더 많이 더 쉽게 얻고 움켜쥔 이야기가 아니라 겸손에 대한, 눈물에 대한, 그리고 인내에 대한 이야기들을 말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흔적을 바울이 흉내냈듯이 우리가 그를 따라 예수님을 흉내내는 일이 될 것이고, 그래서 누군가를 참 신앙의 길로 이끄는 일인 동시에 우리 자신을 가장 영광스럽고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세상의 가치관에 너무나 진하게 물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따라 살면서 세상의 것을 얻고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세상의 방법으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세상의 방식은 세상의 가치관에서 나왔을 뿐 그것은 절대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 될 수 없고 그래서 그것으로는 더 확실하게 세상에 속할 수 있을 뿐이지 그 세상을 극복해 낼 수 없습니다. 세상을 극복하기는 커녕 그 세상에 휘말려 결국 세상을 닮은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이 사회의 천덕꾸러기가 되어가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이 나라의 기독교는 더욱 더 힘들어 질 것이고 멸시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우리 신앙이 자랑스러운 것이 되게 하기를 원한다면 이제까지 우리가 잘못 알고 잘못 걸어왔던 것과는 반대의 길을 가야 합니다. 겸손의 길, 눈물의 길, 그리고 인내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지식까지, 그러니까 이 세상을 알고 평가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속속들이 새롭게 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거듭났다는 말의 의미라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우리 삶의 가치를 정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처럼 살아가는 것을 성공적인 삶이라고 불러서는 안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이 가치있게 여기셨던 것을 가치있게 여기며 바울이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사고방식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누군인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고, 이 세상을 이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분명 그러한 우리를 복되다고 하실 것이며 영원한 영광으로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고 그래서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 앉아 계시니까요. 


우리가 우리 주님을 따라 주님처럼 겸손하고 주님처럼 울며, 주님처럼 인내하며 살아서 온 세상에 우리 주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증인들, 세상의 귀히 여김을 받는 영광스러운 예수의 증인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