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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6.11.08.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고린도전서 8-9장)

* 11월 부터는 음성파일을 올리지 않습니다. 새벽예배 설교준비는 하지만 새벽예배에 참석하시는 분들이 없을 때가 많아서 설교를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설교일 : 2016년 11월 8일 화요일





어떤 사람도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모든 점을 다 흉내내거나 닮으려고 하는 것은 참 위험합니다. 바람직하지도 않구요. 특히 성경은 사실 어떤 사람이 훌륭하다는 이야기를 해 주려고 기록된 책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을 읽으면서 거기 나오는 어떤 인물을 보면서 나도 저 사람처럼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품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점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성경에 나오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같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잡아 끌기에 충분합니다. 특히, 비록 그것이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바울의 모습이나 말들을 읽노라면 정말 바울은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그리고 바울처럼 되고 싶다는 소원이 생깁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 속에도 바울의 그런 모습이 간간히 보이는데요. 참 바울은 우리와 똑같은 예수님을 믿었는데도 어찌 그리 다른 생각과 다른 모습으로 믿었는지 바울의 모습 앞에서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정말 별의 별 문제를 가지고 다 다투고 서로 잘난 척 했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고 먹지 않는 문제로 교회가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사실 원칙은 분명했습니다. 우상 자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일은 신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예수를 믿기는 믿었지만 아직 우상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신앙이 어린 성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런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비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래도 그 정도 수준에서는 벗어나서 이제 그런 고기를 먹는 일에 대해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사람들은 그런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을 수준 낮다고 또 무시했습니다. 


이 일은 양쪽 다 잘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더 큰 잘못이 있는 쪽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고기를 마음대로 먹는, 그래도 신앙이 그만큼은 자란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자유를 잘못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사용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자유를 사용하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더 중요한 목적을 위해서 그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둘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자유를 자유답게 사용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대개 자유는 사용해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자유를 가장 자유답게 사용하는 방법인 줄 알지요. 그렇지만 사실 자유는 다른 더 중요한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을 수 있을 때 정말 자유다워집니다. 그렇게 할 때, 그 사람은 그 자유에 마저 묶여 있지 않은 정말 자유로운 사람이 되니까요. 


바울은 먹는 문제로 싸우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정말 대단한 자유 아닙니까? 형제를 위해서 고기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영원히 포기하겠다고 말할 수 있다니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바울이 직접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정확하게는 바울을 오해하고 곡해한 것이지요. 다른 사도들은 아마 자기 아내와 항상 동행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요. 또 다른 사도들은 그러면서 교회로부터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전혀 도움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될 수 있는대로 자신이 천막을 만들어 판 돈으로 생활을 유지했고, 그 나머지 부부만 그것도 자발적으로 바울에게 헌금을 하는 교회와 성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하는 바울을 보고 바울이 뭐가 걸리는 게 있으니까 저렇게 산다고 하면서 바울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은 사실 자신에게 사도로서 필요한 모든 것을 교회에 요구하고 또 교회로부터 공급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 교회에 부담을 줄 수도 있고, 당시 고린도라는 도시의 문화로 볼 때, 그 일은 바울이 복음을 정직하게 전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인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그것을 모르고 그렇게 곡해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9장에서 주욱 이 일에 대한 해명을 합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따끔하게 훈계합니다. 그러는 중에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그 일을 통해 생활에 필요한 것을 공급받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것을 자기가 받아야 할 상으로 여겼습니다. 그 것을 자신의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기독교의 자유는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지 않을 때 진짜 가치가 타나납니다. 기독교의 권리는 그 권리를 내려놓을 때 더 아름답고 영광스러워 집니다.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내려놓고 사용하지 않을 때, 우리의 자유와 권리는 가장 크게 빛을 발하게 됩니다. 자유만 말하고 권리만 말하는 세상의 정신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으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영광스러운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