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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6.11.11. 금요기도회 - 시편 15.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시편 2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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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분문 : 시편 22편 1-10절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혹시 차라리 하나님께서 안 계시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없으셨습니까? 그 편이 더 편하고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하나님 때문에 할 수 없을 때도 살짝 그런 생각이 들지만, 그것 보다는 나를 찾아온 고통과 어려움이 내가 견디기에 너무 어려울 때, 그런데 그 이유를 전혀 찾아낼 수 없을 때 그런 생각이 더 강하게 듭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저 재수 탓으로 돌리고 넘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긍정적인 생각으로 슬쩍 자신을 달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내 인생과 이 세상 모든 일들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또 그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 때문에 불쑥 “그렇다면 왜 나의 인생에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는가?”하는 질문이 생겨납니다. 사실 요즘 우리나라에 일어나는 일들도 그런 질문이 생기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다스리신다면 왜 우리나라에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나는가?”하는 질문 말이지요. 


그래도 우리는 이런 질문을 가지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아무리 부르고 또 불러도, 밤낮으로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아도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으십니다. 도와 주시지도 않고 그 상황을 해결해 주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는 동안에 오히려 상황은 더 힘들어 지기만 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좌절합니다. 세상이 나를 버리고, 내 인생이 나를 배반하더니 이제는 하나님마저 나를 버리셨다는 생각이 나의 마음을 붙들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시편 22편을 그런 부르짖음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이 시편이 다윗이 믿음이 없었을 때 지은 시편이기 때문에 이런 모양이 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뭐라고 부릅니까? “내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하나님께 밤낮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윗을 더 힘들게 했습니다. 내 하나님인데, 나와 언약을 맺으신 나의 하나님이신데, 그런 하나님께 내가 이렇게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시니까요. 


대학시절에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정말 정말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기도해도 하나님께서는 저를 하나님 곁으로 더 가까이 이끌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시간이 계속되니까 나중에는 나는 원래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인데, 혼자 이렇게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하는 생각들이 들어서 얼마나 힘들고 좌절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너무 힘들어서 화가 나고, 그래서 아얘 신앙을 떠나 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 하나님이 자신을 모른 체 하시고 또 자신을 버리셨다는 생각이 드는 일만큼 고통스럽고 힘든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우리 입술에서 흘러 나오는 기도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믿음이 흔들린 사람,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의 기도처럼 보입니다. 지금 다윗이 드리고 있는 기도처럼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나를 버리실 분이 아니시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에게 그런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런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무시하고 계신다고, 그리고 나를 버리셨다고 말입니다. 이럴 때 과연 우리는 이런 우리의 마음을 무시하고 계속 그럴 듯한 기도를 드려야 할까요? 


우리의 기도는 너무나 이성적일 때가 많습니다.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 흔들림 없는 믿음을 고백하면서 기도해야 할 것을 따박 따박 아뢰는 그런 기도를 드립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생각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 그러니까 우리의 감정도 담고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흔들리는 감정들, 나도 어쩔 수 없는 감정들, 하나님을 정말로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의심과 많이 닮아 있는 감정들….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이런 불안하고 우리 스스로도 이렇다 저렇다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감정들도 담고 있어야 합니다. 분명히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바른 기도라는 것이 있지만, 틀리냐 맞냐를 넘어서서 우리 전체를 드리는 기도가 되려면 이런 기도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좌절감이 있을 때는 좌절감을 표현하고, 분노가 있을 때는 분노를 표현하고 그렇게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그릇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불완전함마저 그대로 담고 있는 진실한 기도, 우리 자신의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좌절감을 있는 그대로 기도로 옮겨내던 다윗은 문득 자기 조상들, 믿음의 선배들의 하나님을 기억해 냅니다. 다윗은 먼저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거룩하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조상들의 하나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조상들이 하나님을 찾았을 때, 그 기도를 들으시고 조상들을 건져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조상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구원의 찬양 중에 그들과 함께 거하곤 하셨습니다. 


사실 그래도 희망을 회복하고 믿음을 되찾기 위해서 조상들의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셨는지를 다시 떠올렸지만, 그것이 결국에는 다윗을 더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조상들의 이야기를 되새겨 보니 조상들에게는 그렇게 해 주신 하나님이 왜 자신에게는 그렇게 해 주지 않으시는지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은 조상들은 그 덕분에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는 은혜를 받았고, 수치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이번에도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말씀드립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과 신앙인물들의 이야기들은 분명히 능력이 되고 힘이 됩니다. 그것을 위해서 거기 기록되어 있는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그 말씀들이 나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전혀 상관 없는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할 때, 그 말씀들은 오히려 우리를 더 힘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왜 그 때 그 사람들에게 그런 믿음을 주셨던 하나님, 그 사람들에게 그런 은혜를 주셨던 하나님이 나에게는 똑같이 해 주지 않으시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면 그 때부터 그런 말씀들은 나에게 소망이 아니라 절망감을 줄 수도 있습니다. 다윗이 더 힘들었던 것은 다윗이 지금 그런 경험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회복하고, 소망을 회복하자고 떠올린 조상들의 이야기가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야속함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기도가 왔다 갔다 하지요?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게 사람입니다. 그리고 실은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사람은 이렇게 약합니다. 이렇게 불완전합니다. 세상 없는 사람도 자기 마음에 찾아오는 생각과 감정들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그런 불완전하고 부족한 사람, 자기 마음을 다루는 일에서 조차 무능한 그런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듯하고 자기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온전한 존재가 아니라 말이지요. 오히려 기도는 그래서 정말로 우리 영혼에 유익한 것이 됩니다. 이런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약하고 부족한 존재인지, 그래서 얼마나 더 철저하게 하나님께 의지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에게 돌아온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아니라 사람들의 비웃음과 비아냥거림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혀를 차며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이라고 다윗을 비웃었습니다. 조상들이 하나님을 ‘의탁’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조상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조상들에게 의탁과 구원은 확신의 말들이었고 소망의 언어가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다윗에게는 ‘의탁’과 ‘구원’이라는 똑같은 말이 다윗의 마지막 부르짖음을 더 아프게 만드는 대적들의 비수가 되어 그의 영혼을 찌르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 하나님의 구원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기준으로 보면 굉장히 어리석고 무능하게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고난과 고통을 생각할 때,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이중고를 각오해야 합니다. 그 고난이 주는 고통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님만을 의지할 때, 우리에게 쏟아질 수 있는 오해와 무시 또한 먼저 헤아려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정말로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로  사람들이 나를 비웃을 때, 그 비웃음을 잘 이겨낼 수 있습니다. 


너무 큰 어려움과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마음도 생각도 정상이 아닙니다. 그 때 우리가 보는 하나님, 그 때 우리가 보는 세상, 그 때 우리가 보는 우리 자신은 원래 모습 그대로 보이는 법이 없습니다. 그 어려움과 고통이 우리 마음을 짓눌러 바르게 보고 바르게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그 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왔다 갔다 합니다. 10분 전에는 믿음이 온전한 사람의 마음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과 같은 마음이 되고 또 10분이 지나면 믿음을 되찾게 되기도 하지요. 우리는 그렇게 수없이 믿음과 불신앙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불안정한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그 마음 그대로를 가지고, 그렇게 흔들리고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면 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말씀드리면서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 앞에서 다루어 내면 됩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기도도 좋은 기도이지만, 이런 기도 또한 아주 좋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완전한 사람의 언어가 아닙니다. 확고한 믿음의 사람들만의 언어도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부족함과 불안함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의지와 의탁의 언어,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를 부탁하면 기도를 잘 한다, 못 한다는 말씀들을 하시는데, 이 세상에 못하는 기도는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내 존재와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말씀드리면 그것이 가장 잘 하는 기도이고, 좋은 기도가 됩니다. 


언제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고, 우리를 버리신 것 같이 느껴지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그 하나님께 정직하고 투명하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무엇이든지 다 하나님 앞에 내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기도 속에서 모든 것을 다 받아주시고 내 하나님이 되어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확인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