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0420to23 -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빌립보서29).pdf
본문 : 빌립보서 4장 20-23절
오늘은 빌립보서를 마지막으로 설교하는 날입니다. 오늘까지 29번에 걸쳐서 드디어 마지막에 오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는 이미 소개드린대로 바울의 수많은 서신서들 중에서 특별히 기쁨의 서신이라고 불리는 책입니다. 일반적으로 본다면 이런 기쁨의 서신은 가장 잘 나갈 때, 여러가지 기쁨의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쓰여져야 하지만, 놀랍게도 빌립보서는 가장 힘들 때, 생사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로에서 쓰여진 책이라는 데 그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다이아몬드가 자신의 진가를 발휘할 때가 언제일까요? 다이아몬드가 가장 아름다운 빛을 발할 때는 화려하고 밝은 빛 가운데 있을 때가 아닙니다. 오히려 작고 미미한 빛 가운데 있을 때입니다. 다이아몬드는 그렇게 다른 보석들이 빛을 잃을 때, 오히려 스스로의 진가를 발휘한다고 합니다. 성도의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기쁨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기쁨과 다른 것은 가장 어두운 순간에,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에, 다른 이유들이 전혀 기쁨을 주지 못하고 빛을 잃을 때, 다른 모조품 기쁨들과는 완전히 차별되는 가장 아름다운 빛을 발한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설교를 시작하면서, 제가 소원했던 바는 바로 이러한 기쁨의 비결을 함께 소유하고 그래서, 다른 기쁨과는 전혀 다른 이러한 기쁨을 우리 마음에 가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리더라도 우리가 누려야 할 기쁨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누리는 기쁨과 그 이유도, 능력도 전혀 다르다는, 이것 한 가지만은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만 허락하신 기쁨을 누리려면 이 두 가지를 혼동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두 가지를 혼동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평가절하하게 되고, 그러면 믿음이 주는 진짜 복을 놓치게 되기 쉽습니다. 세상의 기쁨은 보이는 세상의 일시적인 것들로부터 오는 한시적이고 한정적인 것이지만, 성도의 기쁨은 영원한 하늘로부터 오는 영원한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인 우리들에게도 세상에 속한 기쁨을 주십니다.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기르며, 집을 사고 자녀가 훌륭하게 성장하고, 내가 원하던 것을 소유하게 하게도 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로 부터 우리는 기쁨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도 만족스럽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기쁨들을 주시는 것은 우리가 거기에 머물고 그것만 바라보며 계속 그것만 따라가게 하기 위해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땅의 기쁨과 즐거움은 하늘의 기쁨과 즐거움을 가리키는 하나님의 손가락입니다. 땅의 것, 한시적이고 유한하며, 어떻게 보면 허무한 것들을 얻는 것도 그렇게 즐겁다면 하늘에서 너희에게 줄 수 있는 기쁨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생각해 보라는 하나님의 질문이며,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손가락 끝이 아니라 그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향해 가기를 원하십니다.
무엇이 없다고, 부족하다고 해서 반드시 기뻐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무엇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있을 때에만 기뻐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고 그것이 믿음 없는 삶이 궁핍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없어도, 부족해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쁨의 근원을 우리 바깥이 아니라 우리 안에 품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해서 그 증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로만 하면 믿지 않으니까, 믿더라도 확신을 가지기 힘드니까 옥에서, 생사의 판결을 기다리는 한 명의 죄수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솟아나는 기쁨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마지막 설교를 준비하면서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말하고 있는 기쁨의 이유와 비결들을 한 번 찾아보았습니다. 여기 나오는 모든 기쁨의 비결들은 바울 자신이 삶으로 터득하고 최악의 환경에서 증명해 낸 것이니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성도로써 참된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바울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일 것입니다. 찾아보니, 대략 찾아도 한 열 한 가지쯤 되었습니다. 그냥 나온 순서대로 몇 가지로 묶어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묵상하시면서 나에게 없거나 부족한 기쁨의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선 그는 성도 중심, 교회 중심이었습니다. 자기가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의 처지보다는 그로 인해서 시험을 당하고 흔들릴지도 모를 성도들을 먼저 그리고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회원 여러분, 누가 교회 안에서 가장 기쁘고 행복한 사람일까요? 나의 만족, 나의 누림, 나의 위치를 생각하고 그것을 따라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그래서 다른 이들을 진심으로 걱정해 줄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그것이 정말 그렇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실 것입니다. 남을 위하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 안에 참 기쁨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두번째로 그는 복음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투옥을 그저 복음을 전하다가 당하는 고난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더 효과적으로 복음이 전해지게 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더 빛나게 하는 통로로 보았습니다. 바울은 동기야 어쨋든 자신의 투옥으로 인해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것으로 인해 이전보다 복음이 훨씬 효과적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또, 자신의 투옥이 아니었다면 황제의 시위대 안에는 결코 복음이 전해질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투옥되고 나서야 비로서 깨달았습니다. 바울이 삶의 이유와 목적이 자기자신에게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어려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좌절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고난이란 자기 목적의 좌절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복음전파가 삶의 이유와 목적이었고 그 시각에서 바라보니 자신의 투옥은 오히려 그 일에 득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더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소명이라는 것을 중심으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것의 유익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으로 우리 삶에 일어난 사건들을 바라보게 될 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삶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게 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어떤 상황에서건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어 가십니다. 나의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안경을 통해 어떤 상황 속에서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고, 기뻐할 수 없을 때에도 기뻐할 수 있는 기적같은 은혜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세번째로 그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겪고 있는 모든 일들을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과정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의 배후에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결코 실패함이 없을 것임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평안하고 항상 기뻤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의 견고함과 우리가 현실 속에서 누릴 수 있는 평안의 크기는 비례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정말로 믿을 수만 있다면, 내가 당하는 상황이 어떻든지 또 어떻게 변해가든지 간에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마치 폭풍우 속에서도 엄마 품에 안긴 아기는 단 잠을 잘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울은 그 비결을 알았고, 그 비결을 실제로 사용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네번째로 그는 부활과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처럼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를 본받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심지어는 그 분처럼 고난을 받고, 그 분처럼 부활에 이르는 것을 개인적인 최고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있어서 고난은 그를 영광스러운 부활에 이르게 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앙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라면 오히려 기쁘게 반길 수 있는 여유를 지니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 그는 결코 땅을 바라보고 살지 않았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늘에 대해서 말할 때면 흥분을 감추지 못할만큼 하늘에 대한 확신과 소망 속에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땅에서 그렇게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이유도 그러한 삶이 바로 하늘의 영광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영광을 보려고 하면 땅에 집착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땅에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속상해하고 분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의롭게 살다가 고난을 당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에서 영광을 보려고 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결국 신앙에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러나,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땅에서 승부를 낼 필요가 없고, 땅에서 열매를 딸 생각이 거의 없기 때문에 땅에서 벌어지는 삶의 모습과 그 결과에 대해서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땅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는 신앙을 가지라고 권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땅에 있다면 우리는 결코 신앙의 참된 능력을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본전생각하게 하는, 우리의 바지 가랭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삶의 방해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삶이 잘 나갈 때는 괜챦지만, 내가 열심히 하고 정직하게 했는데도 어려움이 주어지면 우리는 불평과 불만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차라리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재수탓하며 툴툴 털어버릴 수 있는 문제도 신앙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상한 모양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만 생각하면서 우리의 삶과 세상을 이끌어 가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땅과 하늘을 한 덩어리로 보시고 하늘나라가 임한 후에 온 세상을 하늘나라로 바꾸시는 일에 관심을 두고 우리의 삶과 역사를 진행해 가십니다. 결론은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최종적인 결산은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결정적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지 않고 우리의 소망을 하늘에 두고 살아갈 때, 우리는 이 땅이 주는 실망을 넘어서서 항상 기뻐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네번째로 그는 고난에 대한 참된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불쾌하게 끼어드는 방해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신을 향한 부르심 속에 원래부터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이했습니다. 성도가 신앙 때문에, 그리고 소명 때문에 당하는 고통과 불이익들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바르게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고난과 고통이란 바울에게는 자신이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계속해서 바른 길을 가려면 그 사람에게는 반드시 자신이 하는 일이 바른 일이라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이런 확신은 먼저 사람들로부터 옵니다. 사람들의 긍정적인 반응과 칭찬이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한 확신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 사이에서는 이런 격려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교회가 이런 인정과 격려가 오고 가는 곳이 될 때, 서로가 서로에게 힘입어서 함께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에게는 또 다른 확신의 출처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고난입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 중에서 사람들의 반응과 칭찬은 다분히 그 사람들이 나로 부터 얻는 이익에 따라서 주관적인 것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런 반응만을 자신이 바른 길을 간다는 증거로 삼는 것은 정확하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난이라는 것을 성도의 삶 속에 넣어놓으신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고난이란 그저 살면서 당하는 생활의 어려움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때문에, 소명 때문에 당하는 고통과 손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신앙양심과 성도의 자존심,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서 당하는 어려움들을 말합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공책정리를 잘 하거나, 숙제를 잘 해가면 선생님은 “참 잘했어요!”라는 도장을 찍어주십니다. 바른 길을 가는 성도에게 고난이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참 잘했어요!”도장입니다. 칭찬은 착각을 일으키기 쉽지만 고난은 비교적 이런 착각에서 자유롭습니다.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부르심 속에 꼭 포함되어야 할 것으로 이해했고, 그래서 고난에 대해서 오히려 감사할 수 있었고, 그 안에서 더 큰 확신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다섯 번째로는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아주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관용과 기도라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이것들을 삶에 적용함으로써 자기 속에 있는 기쁨과 만족을 지켜낼 수 있었고 그 방법을 빌립보의 성도들에게도 알려주었습니다. 그 두 가지는 바울에게 항상 이해할 수 없고 상상을 초월하는 평강의 이유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는 큰 원리만 붙들고 뜬 구름잡는 듯한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인 비결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사람은 큰 일에는 강하지만 오히혀 작은 일에 약할 수가 있습니다. 아주 크고 두드러지는 고난은 잘 견디어도 옆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작은 일들에,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사람들의 괴롭힘에는 쉽게 무너져 내릴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인간이 그렇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도 그렇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이라는 큰 방패와 더불어 관용과 기도라는 작은 방패들을 사용했고, 그것이 그를 지속적으로 기쁨과 평안 가운데 머물게 해주는 가장 현실적인 비결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끝까지 자신의 인간됨을 잃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했으며, 자신의 필요를 말할 줄 알았고, 기쁨과 감사를 풍성히 표현할 줄 알았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신앙이 좋으면 감정의 표현도 많이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이지도 않고 신앙적이지도 않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제대로 된 건강한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야할 순간에 적절하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자기 밖의 세계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은 전혀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경건에 대한 편견이 가져온 생각입니다. 신앙은 전인적인 것입니다. 신앙은 이성과 감성, 의지 모두에 깃들어 있어야 하며, 그 모든 부분을 회복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감정적으로도 건강한 사람이 영적으로도 건강할 수 있고, 건강한 신앙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만이 성도에게만 허락된 진짜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바울의 기쁨의 비결들.... 그 비결들은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곰곰히 살펴보면 그 비결들을 하나로 묶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모든 것의 방향이 속이 아니라 밖을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관심도 밖을 향합니다. 그의 목적도 밖을 향합니다. 그의 소망도 밖을 향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기 속으로 움츠려들지 않고, 눈에 보이는 자기 유익을 중심으로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언제나 성도와 교회를 향하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가 누린 기쁨의 진정한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원래 삶의 질서가 뒤바뀌는 것을 뜻합니다. 나 보다는 다른 이들의 유익을 생각하고, 내 영광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앞세우며, 지금 몸담고 있는 세상보다는 떠나온 본향을 향해 소망을 두게 될 때, 신앙은 우리를 위한 흔들리지 않고 빼앗기지 않는 기쁨의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아이들이 어린이 날 받았던 최고의 선물은 종합선물세트였습니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과자가 이것 저것 잔뜩 들어있어서 두고 두고 여러가지 맛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비유하자면 빌립보서는 기쁨을 위한 비결들을 가득 담은 종합선물세트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 하나의 비결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 이 모두를 흩어지지 않고 쓸모있고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는 상자가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를 시작하는 1장 2절에서 빌립보의 성도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할 것을 기도합니다. 그리고, 빌립보서의 마지막 절인 4장 23절에서도 역시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의 심령에 항상 함께 있기를 축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빌립보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은혜라는 상자 안에 기쁨을 위한 비결들이 한 가득 들어있는 것이 바로 빌립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신앙을 참된 신앙이 되도록 만들어 주고, 우리에게 풍성한 신앙의 유익을 누리게 하는 수많은 비결들과 방법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고 또 그 복들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며 열심히 그런 것들을 중심으로 생활하게 될 때, 약속된 영적인 유익들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의 기쁨 또한 그런 것들 중의 하나이며, 빌립보서는 그 기쁨을 위한 비결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비결을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일이 기쁨을 얻기 위한 전부는 아닙니다. 이런 것보다 먼저, 그리고 이런 것들 위에 꼭 더해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기쁨의 비결에 순종하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지고 또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해질 때만 비로서 약속된 기쁨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기독교가 단순한 도덕이 아니며, 기독교가 실천의 종교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우선적이고 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기계적인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행함이 부족해도 은혜가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우리의 행함이 완벽해도 은혜가 더해지지 않으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요즘 기독교가 약해진 주된 이유들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실제적이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어떻게 해라’가 무척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에 따르면 비슷한 결과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들 중의 대부분은 세속적인 충고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별 차이가 없지만 결국에는 별로 큰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진짜는 은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가장 중요한 신앙의 원리가 생략되어 있고, 그래서 그런 것들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결정적인 것은 우리의 실천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무슨 선행을 하든, 무슨 덕의 실천이 있든, 또한 무슨 말씀에 대한 순종이 있든지 항상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심령 속에 항상 머무는 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풍성한 영적인 유익을 위한 비결들이 은혜라는 큰 상자 안에 담기고, 그래서 제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러한 영적인 복들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가 말하는 기쁨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복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것은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져야 하며,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은혜를 구하는 삶과 신앙의 태도를 배우고 또 유지해 가야만 합니다.
이제 빌립보서의 모든 말씀을 마칩니다. 바울의 뒤를 따라 저도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 위에 머물도록 간구하며 기도하시고, 그것을 놓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를 얻고 또 지켜가는 것을 여러분 삶의 중심에 놓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은혜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기쁨을 찾아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은혜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기쁨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항상 겸손하게 은혜를 구하고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게 하소서.
- 우리 교회 위에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소서. 은혜 가운데 풍성하고 은혜 가운데 기쁨 넘치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 중보기도 : 신앙의 기쁨을 모르는 성도들에게 신앙의 기쁨을 맛보게 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