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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03.01. 주일오전 - 이처럼 사랑하사


20150301SM.mp3.zip





     본문 : 요한복음 3장 13-21절




     지금은 덜하지만 20대 때의 저는 인간관계에 대해서 참 고민이 많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고민들이란 것이 결국 제가 스스로를 온전히 사랑하고 받아들이지 못해서 생겨난 것들이기는 했지만, 그 고민들 덕분에 얻은 것도 참 많았습니다. 그 때 인간관계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고,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나름대로의 방향을 세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깨달은 것들은 굉장히 평범한 것들이었지만 제 자신의 경험과 고민을 통해서 알아낸 것들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에 제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면서 생겨나는 많은 질문들을 푸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고민하셨거나 혹은 고민 중이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특히 누군가와의 관계가 깊어지고 성숙해 지지 않아서 고민해 보신 적, 한 번쯤은 다 있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어떤 관계가 깊어지고 성숙해 지기 위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시간입니다. 함께 보낸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관계는 그만큼 더 돈독해지게 마련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정된 시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정된 시간이 곧 우리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그 시간만큼의 생명을 그 사람에게 할애한 셈이 되고, 결국 시간을 나눈다는 것은 나도 모르게 내 생명의 일부를 나누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1년간 사귄 사람과 십년지기 친구는 아무래도 같을 수가 없습니다. 1년된 사이에 10년된 사람들만큼 친해지려고 하거나 그런 관계를 요구하면 오히려 그게 부담이 되어서 관계가 성숙해 지는 것을 방해하게 될 것입니다. 좋은 관계를 위한 첫 걸음은 서두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그리고 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 오히려 참된 관계를 위한 가장 빠른 지름길입니다. 


     사람들의 관계에 있어서 빨리 익는 열매는 없습니다. 왜 관계의 진전이 없는가를 고민하기 전에 그 관계를 위해서 충분한 시간이 투자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까지 이 시간의 법칙을 뒤집을 수 있는 한 가지 변수가 있기는 합니다. 그것은 바로 시간 안에서 주고 받는 ‘진심’이라는 변수입니다. 만약 1년 동안 진심을 나눈 사람들과 10년동안 알아왔지만 전혀 진심을 나눈 적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면 1년 동안 진심을 나눈 사람들의 관계가 훨씬 더 깊고 진지한 관계가 될 것입니다. 10년 아니라 20년이라도 서로 진심을 나누지 않는다면, 그 관계 안에서 참된 친밀함이 생겨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의 참되고 친밀하며 인격적인 관계를 정말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우리는 서로 진심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진심을 보이고, 상대방의 진심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사람들 사이의 관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도 꼭같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들 모두가 다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관계에 있어서도 시간과 진심은 똑같이 중요합니다. 우선 우리가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를 원한다면,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차분히 평생 하나님을 알아갈 각오를 하고 우직하게 한 길을 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꿔가기 위해서 최대한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언제나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바로 ‘진심’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진심을 알아야 하고 그 진심에 대해서 나의 진심에서 나오는 반응을 드려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이 가진 진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진심을 다하면 그렇게 되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사이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 24절과 25절을 보시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는 그의 몸을 저희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잘 아십니다. 아주 속속들이 완전하게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그 누구의 설명도, 해명도 들을 필요가 없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잘 모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기도 쉽고 사실 오해하고 있는 것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우리 쪽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 우리가 그 분의 진심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으로 보면 저에게 있어서 참된 신앙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진심을 알게 되었을 때, 나를 향한 그 분의 본심을 깨닫게 되었을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일산에서 교회를 섬길 때, 그 교회의 남자 집사님들 몇분과 성경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신앙의 동기에 관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몇 안되시는 분들 중에서 몇 분이 “벌 받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이 무서워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 때 많이 놀랐습니다. 신앙의 바른 동기에 대해서 너무 깊은 오해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그 문제를 다루면서 가르쳤지만 그 분들의 그런 생각이 쉽게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분명히 신앙에는 두려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두려움 없는 신앙이 참 신앙이 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은 신앙의 참된 동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놓아두어서도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느 정도까지는 신앙이 자라는 것 같지만 이내 한계에 부딛히고 맙니다. 신앙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로 발전하지 못하고,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벌 받지 않기 위해서 조금 긍정적으로 말하면 복 받기위해서 이것을 하고 또 저것을 하지 않는 율법적인 모습에 머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은 마치 자녀가 매를 맞지 않거나 사탕을 얻기 위해서 부모에게 겨우 겨우 마지못해 순종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모습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참된 영광을 보고, 신앙의 풍요로움을 누린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은 그렇게 강한 웅변도 아니며, 여기에는 자극적이고 화려한 미사여구도 없습니다. 멋진 표현을 가지고 우리를 감동시키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입술을 빌어 그저 담담하고 잔잔하게 단 한 가지 사실을 말해주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만큼은 꼭 알고 믿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정말로 많이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세상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스럽지도 않고, 사랑받을만한 이유도 없는 그런 세상이었습니다. 그 세상은 철저히 하나님께 대해서 등돌린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 덕분에 생명을 얻었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빛이 되어주고 계셨지만 세상은 그 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자기 땅, 자기 백성들 속에 오셔서 그들과 함께 계셨지만 알아보지 못했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성전을 자기 욕심과 자기 영광으로 가득 채워버린 세상이었고,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가르친다는 율법선생까지도 거듭남이라는 말조차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영적으로 무지하고 무감각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그런 세상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런 줄 다 아시면서도 그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사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참 모습을 모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서도 무지하고, 그 사람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행하는 일들에 대해서도 무지합니다. 만약 우리가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악한 일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 일들을 행하는 사람들의 속마음에 대해서 구석 구석 다 안다면 그런 세상을, 그리고 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그 대상이 우리 자신이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저렇게 합리화하지 않고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자신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잘 모르고, 나 자신도 잘 모릅니다. 그 속내와 악한 행동들을 다 알지 못합니다. 빙산의 일각 만큼도 그 참된 속 모습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을 흔쾌히 사랑하지는 못합니다. 사람들이나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은밀한 행동들과 숨겨진 속내까지 다 아셨지만 그 세상을 기꺼이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그런 세상을 위해서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내어 주셨습니다. 내어주시되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살리시려고 놋뱀을 들리게 하셨던 것처럼 그 세상을 위해서 아들을 십자가에 달아 드시는 방식으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 아들을 바라보는 자들, 그 아들을 믿는 자들을 죽음에서 살리시려고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세상이 망하기를 원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 분의 소원은 항상 사랑하는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심을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고 오해합니다. 그리고 그 오해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합니다. 세상을 향한 사랑보다는 죄인들을 위한 진노를 하나님의 본심으로 여기며, 구원하시는 하나님보다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더 크게 생각합니다. 사랑한다면 진짜 사랑한다면 왜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지 않느냐고 따지면서 자기가 가던 길로만 가려고 합니다. 


    사람은 원래 모두가 다 예외 없이 심판의 대상이고 멸망의 대상입니다. 그냥 놔두면 모두 그 길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들 모두를 구원하고, 하늘백성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려면 인간 스스로 넘지 않으면 안되는 높은 산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비뚤어지고 일그러진, 그래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의 의지라는 산입니다. 인간 스스로 자신이 심판받을 수 밖에 없는 반역자임을 깨닫고, 죽어가며 광야의 뱀을 바라보는 그 심정으로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붙들고 있었던 어둠을 내버리고 새로이 찾아온 빛을 붙들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고개를 땅으로 향한 채 빛이 아닌 어둠을 고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안에 있는 악을, 그 어둠을 어둠으로 인정하기 싫어서 악을 선이라 말하며, 어둠을 빛이라 우기면서 가던 길을 고집스럽게 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애타는 마음에는 결코 미치는 못하는 아주 적은 숫자였지만 그 빛을 알아보고 빛으로 나아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전에 어둠 속에서도 빛을 소원했던 사람들이고 빛의 편에 서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빛을 원하고 빛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참된 빛을 발견했을 때 주저없이 그 빛으로 나아와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 세상 모두가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너무 사랑하시기에 그 누구도 놓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바로 그 소원을 가지고 아들을 십자가에 달아 높이 드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있는 어둠을 버리기 싫어서, 자신의 어둠이 드러나는 것이 싫어서 빛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빛을 바라보지 않으니, 빛으로 나아오지 못합니다. 빛으로 나아오지 않으니 빛에 속할 수 없었고, 그들은 그렇게 계속해서 어둠 속에 갇힌 사람들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영원한 운명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죄에 대해서 진노하실 것이고, 믿지 않은 자들은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성품이시고 정의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렇게 하지 않으실 수는 없으십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기를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하나님 되시지 말라는 것이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 해서 빛이 밝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세상을 그렇게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처음 예수를 믿기 시작할 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음생활을 하는 내내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래서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때로는 그것을 의심하게하는 일들도 발생할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고 그 어려움이 풀리지 않고 계속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나의 잘못으로 하나님께 혼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 인생이 그런 하나님의 징벌로 가득 차 있다고 느껴질 수 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그래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나를 여전히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을 위해서 그리고 그런 나를 위해서 이미 독생자를 아낌 없이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이미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이미 심판을 면제받은 사람들입니다. 빛이신 예수님 덕분에 어둠에서 빠져나와 빛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를 그리스도라 믿는 진실한 믿음만 있다면 이미 우리는 안전지대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단지 안전지대에 머무는 것을 넘어서서 신앙의 참된 풍성함을 내 것으로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나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그 사랑을 붙드는 일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가장 확실히 붙드는 방법은 시작과 근원으로 돌아가 그것을 다시 붙잡는 것입니다. 이삭이 아버지가 팠던 곳을 다시 파서 솟아오르는 샘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근원만 붙잡으면 거기서 흘러나오는 풍성한 샘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그 사랑을 붙들기 위해서 해야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영혼의 풍성함을 붙드는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랑이 흘러나오는 샘근원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 샘근원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가 못 박히셔서 높이 들리셨던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위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눈앞에 가져다 놓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폭포수 아래 서도록 우리를 인도해 줍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다른 곳을 향해 있는 우리의 눈을 다시 십자가로 향하게 해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눈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보느라고 하나님의 사랑을 놓치고 있으며,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심을 느끼려고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내 인생이 잘 풀려 나가고, 내 마음이 편하고, 힘든 병이 치료되는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원이 아닌 지류입니다. 간간히 흐르는, 그것도 희미하게 흐르는 시냇물에 불과합니다. 언제든지 말라버릴 수 있고 그래서 우리를 실망시킬 수 있는 작은 시냇물, 자칫하면 우리의 눈길을 오히려 본류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는 그런 시냇물 말입니다. 십자가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만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하나님 사랑의 샘근원입니다. 우리가 그 십자가를 제대로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그 사랑을 붙들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그 십자가에 달려 높이 들리셨던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진심입니다. 그렇게 독생자를 내어주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심입니다. 우리가 거기서,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심을 보지 못한다면, 그 사랑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진심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흔히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 생각합니다만, 사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며, 그래서 진심과 진심이 만나는 관계이며 교제입니다. 만약 우리 믿음에 풍성함이 없고, 자유함이 없으며, 넉넉한 쉼이 없다면, 아직도 내 신앙이 하나님의 진심을 알고 그 진심에 진심으로 응답하는 응답이 없기 때문이기가 쉽습니다. 이제는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진심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 높이 들린 하나님의 마음에 눈길을 고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서 뜨겁게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나의 신앙생활이 하나님과의 영광스러운 열애가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달아 높이 드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영생을 얻게 하려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은혜를 주시려고 말입니다. 내 인생에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내가 그 어떤 힘겨운 순간을 맞이하더라도 높이 들린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피뭍은 사랑이 넘쳐 흐르는 십자가는 언제나 우리 눈 앞에 있습니다. 항상 그 십자가를 바라보시며 하나님의 진심을 다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확인하시고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말입니다. 죽음보다 강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그 무엇도 십자가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는 없습니다.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위험이나 칼도, 말 안 듣는 자녀도, 속 썩이는 배우자도 비어버린 내 주머니도, 세계적인 경제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믿는 한 우리를 그 사랑에서 끊어지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매일 매일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진심을 더욱 진하게 알아가는 복된 과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진심에 뜨겁게 반응하는 행복복한 순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항상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진심을 헤아리며 그 깊고 풍성한 사랑 가운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나의 신앙 생활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진심을 헤아리고 나의 진심을 하나님께 드리는 깊고  풍성한 교제가 되게 해 주소서. 
  2. 세상은 흔들려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흔들림이 없다는 사실을 진실로 믿고 그 능력을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