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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5.03.20. 금요기도회 - 이 예수가 그리스도라(사도행전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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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7장 1-9절




하나님께서 보내신 온 세상을 구원하는 복된 소식인 복음. 우리는 계속해서 이 복음이 어떻게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땅끝인 로마로 전해지고 있는지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복음만큼 복된 소식이 없고 은혜로운 말씀이 없으며 영광스러운 이야기가 없습니다. 이런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더해지는 기쁘고 영광스러운 역사가 쓰여졌지만, 정작 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항상 반대와 오해, 그리고 박해를 경험하곤 했습니다. 그 우리는 16장을 통해 복음 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당했던 이런 저런 고난과 어려움들, 그리고 혼란스러움들에 어떻게 대처했고, 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들을 그런 어려움과 환난 가운데서 건져 주셨는가 하는 정말 기가 막히는 이야기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당하는 어려움들을 그렇게 영광스럽고 당당하게 받아 넘기며 인내할 수 있었던 이유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에 있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한 개인의 인생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전부가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며, 특히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어떻든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 가운데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었습니다. 그 믿음은 가장 답답할 때도 그들을 전혀 조급하지 않게 만들어 주었으며, 심지어 그들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자기 자신보다는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추구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 믿음이 그들을 그렇게 영광스럽고 담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 그리고 그 일행들은 아시아의 첫 도시였던 빌립보에서 그렇게 한 차례의 커다란 어려움을 당당하게 이겨내고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서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습니다. 여기 사정은 빌립보보다는 나았습니다. 데살로니가에는 여기 저기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었으니까요. 바울은 또다시 회당을 이용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연히 그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들어온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바울은 한 회당을 택했고 거기서 세 번의 안식일에 연속으로 복음을 설교했습니다. 물론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이 대상이니 구약성경을 훑어내리면서 구약의 이런 저런 이야기들과 예언들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전해 주었습니다. 3절 후반부는 바울이 그런 설교들 끝에 전해 준 결론이 무엇이었는지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이 결론을 전해 주기 전에 바울이 전한 설교의 내용은 그 앞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3주에 걸쳐서 설교를 했다면 많은 이야기를 전해 주었겠지만 성경은 그것을 딱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4절 전반부를 보시겠습니다. “뜻을 풀어-이것은 구약의 이야기들과 예언들이 무슨 뜻인지 그 뜻을 풀었다는 뜻입니다 -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바울이 구약성경을 증거로 삼아 데살로니가의 회당에서 전한 말씀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구약성경이 말하는 구원자인 메시야는 반드시 해를 받아야 하며 또 죽어야 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가 하나님께서 보내시기로 약속하신 메시야라는 것을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신 단 한 분이시니 자신이 전하는 “이 예수”만이 메시야라는 것이 바울이 회당에서 전한 복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의 회당에서 전한 메세지를 통해서 복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세 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입니다. 이 세 가지가 예수님을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메시야가 되게 하는 조건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내용에는 반드시 고난과 죽음이 포함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게 빠지면 그것은 절대로 복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런 복음을 통해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할 때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고난당하시고 죽임당하신 분이 바로 자신의 구원자이시고 왕이신 예수님이셨으니까요. 그렇다면 이런 복음,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핵심이고 중심이 되어 있는 그런 복음을 전하면서 바울은 그 복음 때문에 주어지는 고난과 어려움을 어떻게 생각하고 또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느라고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을 사람들이 흔히 어려움을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위해서 받는 고난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근본적으로 세상에 고난을 기뻐하고 반가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 때문에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그것을 전혀 다르게 바라보고 받아들였으며 그래서 오히려 자신이 받는 괴로움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믿음을 지키고 복음을 전하려고 하다가 당하는 어려움들을 결코 억울하게 당하는 고통이나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기가 당하는 고통과 어려움들은 그 남은 고난을 자기 육신에 채우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이 우리를 구원하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에 바울이 그 남은 부분을 채운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누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체입니다. 머리이신 예수님께 복음을 위한 예수님 몫의 고난이 있다면, 머리되신 예수님의 지체인 성도들에게도 자기 몫의 고난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완전히 이루어진 복음이 전해지는데 꼭 필요한, 지체로서 감당해야 할 고난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 고난과 어려움을 감당할 때 우리는 영광스럽고 황송스럽게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예수님의 지체로서 참여하는 것이며, 그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우는 것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그 중심에 있는 복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복음을 우리를 구원하는 진리로 믿고서 구원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복음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믿음 때문에 오해를 받고 손해를 보고 또 고통을 당할 때 그것 때문에 마치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힘들어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어려움들을 마치 필요 없는 것처럼 귀찮아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두렵더라도 두려워하기만 하면서 피해다니기만 해서도 안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영광은 예수님에게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서 맺혀진 값진 열매입니다. 고난과 죽음이 없는 부활이 없고, 고통이 없는 하나님 우편의 영광이 없습니다. 우리의 머리되신 예수님께 그렇다는 것은 몸되고 지체된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날 사탄은 우리를 속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면서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손해 보지 않아도, 고통당하지 않아도, 불편을 겪은 적이 하나도 없어도, 그렇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전혀 자기 육체에 채운 적이 없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며, 거기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속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그 찬란한 영광을 모두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이런 속임수가 통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의 기대와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메세지가 우리가 듣고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이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거짓말입니다. 예수님께 적용된 영광의 원리는 그 지체인 우리들에게도 적용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 한 후에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그 모든 일들을 여유롭게 받아 넘길 수 있었던 것은 그는 자신이 전하는 그리스도가 고난과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의 영광을 얻은 분이시며, 그래서 자기에게도 분명히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육신에 채우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의 크기가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자기의 영광의 크기가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복음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시고 죽음을 당하신 후에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그런 구원자이십니다. 그 고난과 죽음 때문에 영광을 얻으신 분이십니다. 믿음을 따라 살다가, 복음을 전하려고 하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는 항상 이 사실을, 이 귀한 진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그렇게 그 분을 따라 손해를 보고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만큼 복되고 영광스러워 진다는 것, 그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이런 복음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경건한 헬라인의 무리, 그러니까 헬라인 중에서 유대교를 믿었던 많은 사람들과 과히 적지 않은 숫자의 귀족의 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참 잘 된 일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저자거리의 불량배들을 고용해서는 떼를 지어서 성안을 소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마도 그 때 막 생겨난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임을 위해 자기 집을 빌려주었던 야손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알려주는 유대인들이 이런 비열하고 악한 일을 했던 이유가 참 어이가 없습니다. 그 모든 일들이 시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전하는 복음도 마음에 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의 생각에는 절대로 메시야가 될 수 없는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라고 전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들이 그런 유치하고 비열한 일을 저질렀던 이유는 그런 거창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저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아니라 바울과 실라를 따르기 시작했으니까요. 우리가 믿음을 지키고 복음을 전하려고 하다가 당하는 어려움들이 항상 거창하고 영광스러운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저 맘에 안 든다고 우리를 괴롭힐 수도 있고, 그렇게 힘들게 하는 것 자체를 즐거워 하는 사람들의 희생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정말 말도 안되고 별 것 아닌 것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를 괴롭힐 수 있습니다.


폭도들이 야손의 집으로 쳐들어 간 것은 원래는 바울과 실라를 붙잡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거기 없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대신 야손과 성도들을 붙잡아서 시의 관리에게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이 사람들이 천하를 소란케 하는 사람들에 동조한 사람들이라고, 특히 이 야손은 그 사람들에게 자기 집을 내어준 사람인데, 이 사람들은 전부 다 가이사 말고 다른 왕이 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라고 죄를 뒤집어 씌워 그들을 고소했습니다. 관리들과 거기 모여 있던 사람들은 소동을 난리가 났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것은 곧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을 뜻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중요한 일의 결론은 참 허탈할만큼 우습습니다. 그렇게 소동을 벌여 놓고 무리와 관리들은 야손의 일행을 그저 얼마간의 보석금을 받고 석방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악인들의 습성입니다. 악인들은 그게 즐거움이든, 돈이든 그저 자기들이 원하는 것만 얻으면 끝입니다. 그 이상의 가치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야손과 형제들이 당한 고통과 손해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일 자체가 억울한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서는 생전 처음 죄수취급을 받고 끌려간 사람들도 많았을 테니까요.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 때문에 힘든 일을 당했듯이 데살로니가에서는 바울과 실라가 전해 준 복음을 믿은 사람들이 그 복음 때문에 거짓으로 모함을 받아 괴롭힘을 당하고 손해를 입었습니다. 종류와 정도는 다르지만 복음은 이렇게 때로는 그 복음을 전하거나 믿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기도 합니다. 사실 복음은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복음 자체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그 중심에 놓고 있으며, 그 복음이 전해질 때는 항상 그 복음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영광은 그 복음을 위해서 이런 손해와 고통을 감수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또 열매맺게 되기 때문입니다.ㅏ 


복음은 고통과 고난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을 바꾸라고 요구합니다. 복음 때문에 생겨나는 어려움들은 모두가 복음이 전해지고 믿어지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몸에 채우는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가장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게 후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원한 영광의 크기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손해나 고통이 가장 가치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며 가장 복된 것입니다. 이 생각과 믿음으로 여러분의 마음과 믿음을 지켜가시고 또 여러분의 영혼을 무장시키시기 바랍니다. 고난 당하시고 죽임 당하신 그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 예수님이심을 믿는 믿음 가운데서,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손해를 보는 일에 주저함이 없는 담대한 성도들, 그렇게 하늘의 영광을 탐내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