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5.08.07. 금요기도회 - 아볼로라하는 유대인이(사도행전 118)



20150807FE.mp3.zip





본문 : 사도행전 18장 24-28절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바울이 잠시 에베소에 들러서 회당에서 사역을 하고 에베소를 떠나 가이사랴로 갔다가 예루살렘을 거쳐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갔다가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지역을 거쳐서 다시 에베소로 돌아올 때까지의 기간 중에 에베소에서 일어났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번에 살펴 보았듯이 고린도를 떠난 바울과 일행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에베소에 왔습니다. 이 때 에베소는 그저 잠시 거쳐가는 도시였기 때문에 바울은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 거기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기는 했어도 충분히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식 표현으로 맛만 조금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그렇게 떠날 때, 사도 바울은 금새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함께 여행하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에베소에 남겨두고 예루살렘을 향해 갔으니까요. 그러나, 사도 바울의 여행은 생각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일단 예루살렘까지는 예정대로 갔고 거기서 시리아 안디옥까지도 생각했던 기간 내에 도착했던 것 같지만, 거기서 갑자기 여행의 방향이 바뀝니다. 안디옥을 떠난 바울은 다시 에베소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갈리디아와 브루기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차례로 돌아보게 됩니다. 이것은 아마도 그 지역의 교회들을 다시 한 번 복음으로 굳건하게 해 주어야 할 조금은 급한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도보로 여행했기 때문에 그 여행은 상당기간 동안 계속될 수 밖에 없었는데요. 그 기간이 긴만큼 아마도 에베소에 남겨 놓고 온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때문에 바울의 마음은 많이 무거웠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원래 고향이었던 로마에서 이주해 온 후, 제 2의 고향으로 삼았던 고린도를 바울과 동행하려는 목적으로 떠난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이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짊어져야 할 짐들 중의 하나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은 자기 계획이 있어도 그것을 고집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분명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필요보다 훨씬 더 긴급하고 중요한 교회나 성도들의 필요가 있을 때는 그것을 따라 움직여야 하니까요. 그래서 인간적으로만 볼 때는 참 마음이 아프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또 사람과의 약속을 깨뜨리고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지역을 순회하면서도 두 사람 때문에 마음 한 구석에 짐을 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짐을 금방 내려놓을 수도 없었지요. 그런데, 그렇게 바울이 긴 여행을 하는 동안에 두 사람이 있었던 에베소에 한 사람의 전도자가 도착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은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이었다가 예수를 믿게 된 아볼로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정말 성경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박식하고 깊이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말도 정말 조리있게 잘하는 그런 사람이었지요. 그러던 차에 복음을 접하게 되었고 열심히 그 복음을 배워 전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만큼 복음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또 복음을 가르치는데 더 적합한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한 가지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가 요한의 세례, 그러니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세례는 알고 있었고, 그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은 열심히 가르쳤지만 성령세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볼로가 전하는 복음을 가만히 듣고 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가 전하는 메세지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는 일은 결국 성령충만함으로 완성되는 것인데, 아볼로가 전하는 메세지 속에는 그것이 빠져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를 데려다가 그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복음 속에서 빠져 있는 내용에 대해서 가르쳤고, 정확하지 않은 것들은 더 정확하게 말씀을 풀어 설명해 주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사람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두 사람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 두 사람은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나서 1년 반 조금 넘는 기간을 바울과 함께 보내고 함께 에베소로 왔다가 거기서 바울과 헤어진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 두 사람은 이미 로마에 있을 때부터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이 로마 교회는 오순절의 마가의 집에 성령님께서 임하시던 때, 예루살렘에 순례객으로 왔던 사람들 중에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다시 로마로 들어가 자생적으로 생겨난 교회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적어도 사도들로 부터는 제대로된 양육을 받은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은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난 후에야 비로소 바울로 부터 양육을 받았던 셈이지요. 그러면 아무리 길어도 이들이 제대로 말씀을 배운 기간은 2년이 채 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그 박식하고 언변이 뛰어난 아볼로가 전하는 복음 속에서 부족한 부분을 찾아냈고, 그래서 그 아볼로를 데려다가 그에게 완전한 복음을, 그것도 구약성경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풀어주면서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그만큼 복음에 대해서 온전하게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 두 사람을 생각하면서 오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특히 복음을 가르치고 배우는데 얼마나 무관심해져 있고 열심을 얼마나 많이 잃어버렸는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우리 교회에 온 지가 3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그래도 하나님 말씀만 가르쳐 보겠다고 발버둥쳐 왔는데요. 분명히 저는 바울이 아닙니다. 그 분만큼 탁월함이나 영감, 그리고 열정이 대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제가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몇가지 질문을 드려보려고 하는데요. 이 질문은 여러분을 탓하기 보다는 성경교사로서의 저 자신을 점검하기 위한 질문이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면서 한 번 스스로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난 3년 동안 저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하나님을 알고 성경을 아는 일에 있어서 얼마나 더 진전을 보이셨고 얼마나 더 확실해 지셨습니까? 이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실 정도가 되셨습니까?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듣고서 그 안에서 틀린 것이나 불완전한 내용을 찾아내실 정도가 되셨습니까? 텔레비젼이나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설교들을 들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분별하실 수 있으십니까? 이런 일들에 있어서 그래도 많은 발전이 있으셨습니까? 


3년은 저에게나 여러분에게 절대로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특히 금요기도회에 오시는 분들은 저와 제일 많이 만나는 분들이고 또 제가 가르치고 전하는 말씀을 제일 많이 듣는 분들입니다. 저의 특별 클래스이지요. 그런데도 만약에 우리 안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일어났던 그런 변화들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사실 저와 여러분은 이 일에 있어서 두 사람과 바울을 통해서 도전을 받고 자극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어떤 사람이 성인이라고 할 때, 그 사람이 그래도 예수 믿은 지 한 10년쯤 되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가르치는 일은 은사에 속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탁월하게 잘 가르치는 사람만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확실히 알고 있다면, 그리고 아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누구나 다 가르칠 수 있고 또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어떤 교회를 막론하고 이런 사람이 정말 많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해 온 햇수는 자랑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못합니다. 그것은 아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한국교회가 분명히 청산해야 할 문제입니다. 어떤 분들은 몰라도 예수 믿을 수 있지 않느냐고 항변하기도 합니다. 물론 아얘 복음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이 부족하다면 몰라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에도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과 성경, 그리고 구원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것들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절대로 알지도 못하는 것을 확신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적어도 도시 지역에 사는 성도들 중에는 이런 분들이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모두가 다 머리가 나빠서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모르는 상태로 남아있다는 것은 그만큼 아는 일에 무관심하고 또 열정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제대로 잘 가르쳤을 때를 말하는 것이니까 가르치는 사람의 책임이 큰 일이기도 하지말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도 여러분을 더 제대로 더 잘 가르치려고 애쓰겠습니다. 여러분도 배우고 익히는 일에, 여러분의 신앙의 알맹이를 채워넣는 일에 더 열심을 내 주십시오. 그래서 적어도 우리 교회 바깥에서 듣는 설교나 가르침들이 어디는 옳고 어디는 잘못되었는지는 분별할 수 있는 수준이 되시고, 그래도 젊으신 분들은 향후 몇 년 안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 보겠다고 목표를 세우시고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는 일에 헌신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아볼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저는 아볼로도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아볼로는 성경의 전문가였습니다. 대단히 박식했고 말도 너무 잘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배웠습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들이 하나 하나 풀어주는 성경말씀을 차분히 배웠습니다. 아볼로가 그 내용을 다 모르고 있어서 끝까지 다 들었겠습니까? 아닙니다. 거의가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성령세례 부분만 몰랐겠지요. 그렇지만 그는 두 사람이 들려주는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또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알고 있는 복음을 더 온전하고 풍성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게 쉬운 듯하지만 참 쉽지가 않습니다. 제가 성도들을 가르쳐 보면 그게 대번에 들어납니다. 오랫동안 예수 믿은 분들치고 겸손하고 열정적으로 배우려는 태도를 보이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중요한 내용은 사실 몇 년만 예수믿으면 거의 접하게 되고, 설교라고 해 봤자 다 성경에서 나오는 것이 그리 새로울 것이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저를 비롯한 그 누구도 아볼로 정도로 해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에는 아볼로가 가지고 있었던 구멍보다 더 심각하고 큰 구멍이 많이 뚫려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그런 아볼로가 천막을 짓는 것을 업으로 삼고서 살아가는 촌부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면 우리는 세살난 아이가 들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귀를 기울여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것이 우리들의 마땅한 태도요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볼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가야로 건너가게 되었는데요. 이 이후의 그의 사역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두 사람에게서 배운 아볼로의 복음은 그야 말로 온전한 복음이 되었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빈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반대하는 유대인 랍비들과의 논쟁에서도 그들을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그렇게 빨리 성장해서 아볼로를 가르치지 않았다면, 아볼로가 그렇게 겸손하게 두 사람에게 배우지 못했다면 분명히 아볼로의 사역은 훨씬 더 위축되었을 것이고 스스로도 많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 놀라운 사역의 결과들은 이렇게 세 사람의 열정과 겸손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열매였던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성경과 영적인 일들에 대한 무지에 깊게 빠져 있습니다. 한 때는 그래도 믿음이라도 강조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마저도 시원치가 않습니다. 사실 저는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도대체 무엇을 붙들고서 사역을 하고 있고 또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꽤 자주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교회는 기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붕도 없는 건물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 줍니다. 기독교는 분명히 아는 것이 다라고 말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저 믿으면 된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제대로 아는 바를 확실하게 믿어야 한다는 것이 신앙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바른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아는 것과 믿는 것, 이 두 가지가 항상 함께 가야 하지만 지금 한국교회에 더 시급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알고 나서 믿어야 그게 진짜 믿는 것이 되기 때문이고 모르고서는 못 믿는 것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분명히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해서 일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치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도 그러시지요? 여러분도 말씀의 능력을 믿으시고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으시지요?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 말씀을 말씀 그대로 제대로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그 말씀을 배우고 아는 일에 열심을 내지 않는다면 말씀의 능력도, 그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도 아무런 소용이 없어지고 맙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교회는 더 열심히 제대로 가르치고 더 열심히 듣고 배우며 믿는 그런 공동체로 세워져 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되어야 하며 또 아볼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우리가 알고 믿는 바로 인해서 우리 삶이 변화되며 또 우리 주변을 아름다운 열매들로 채워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져 갈 것입니다. 


우리 더 열심히 가르치고 더 열심히 배웁시다. 그래주실 수 있으시겠지요? 지금보다 더 진지하게 더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워 주실 수 있으시겠지요. 저도 조금씩이라도 더 열심히, 그리고 제대로 가르쳐 보겠습니다. 오늘 여기 없는 분들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부터 시작합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 인생과 교회 안에서 주님의 말씀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더 헌신해서 이런 복된 광경을 보는 복을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